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47화 (346/1,132)

< -- 347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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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 시입니다.”

유목민 부인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코리온이 멀리 지평선 가까이 보이는 많지 않은 불빛을 응시했다. 3일 동안 서쪽을 향해 꼬박 달려 한밤중에 도착한 저 작은 오아시스 도시는 바로 며칠 전 서부제후군과 남부제후군의 혈전이 있었던 키타이 기지 인근이었고, 기지의 급수시설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긴가?”

모래먼지가 잔뜩 앉은 유목민의 가죽옷을 입은 코리온의 야위고 그을린 얼굴에는 거칠한 수염까지 돋아나 그 매서운 얼굴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코리온과 라스가 탄 이 허름한 마차는 도시 북쪽의 캐러반 루트를 타고 언젠가 라손과 탈란의 기병대가 샤드니와 싸움을 벌였던 오아시스변을 따라 마을에 천천히 다가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비릿한 물냄새가 무디어져있던 코리온의 코를 자극했다.

코리온 일행이 설마 기지 주변으로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지, 바얀 시 주변에는 많지 않은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만이 주변에서 몰려드는 인근 유목민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스트 바얀 시장이 운영하는 여관에 내려주겠소. 우린 남쪽으로 조금 더 가서 가축시장 부근에서 캠핑할 테니. 할룩스는 여관에서 빌려줄 거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의 남편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소.”

고개를 돌린 코리온은 옆에 실려있던 ‘조황비전’의 마구를 들쳐보았다. 화려한 가죽과 보석, 세심하게 조각된 공예품들로 이루어진 이 귀한 물건은 엔간한 사람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고가의 물건이었다.

“내 감사의 뜻으로 말을 주고 싶으나.......나 역시 이곳에 다시 움직여야 할 것이니 대신 이 마구를 드리겠소. 큰 시장에 내다 팔면 족히 말 10마리는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리고.......내 연락처를 줄 테니 차후에 연락을 주면 내 후사하겠소.”

마차를 몰던 남편은 무뚝뚝한 성격대로 고개만 보일 듯 말 듯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대신 저 말에 간단한 마구를 매 드리리다.”

“정말 요즘같이 장사가 안돼서야......”

코리온이 넘겨준 제법 큰 루비를 확대경으로 유심히 살피던 여관 주인이며 이곳 시장인 도스트 바얀은 마치 입에라도 붙은 듯 불평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저 썩을 놈의 서부 놈들도 모자라서 이젠 남부 놈들까지 들어와서 쌈박질을 해대질 않나......제기랄, 이 망할 동네는 운도 지지리도 없지......흠, 30골드쯤 가겠구려. 말 한 마리에 사람 두 명이니 하룻밤에 6골드만 주시구려.”

“할룩스 좀 쓸 수 있겠소?”

유목민 차림의 코리온이 그새 배운, 아니 먼 옛날 어린 시절에도 한때 배운 일 있던 동부 유목민 방언으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자그만 키의 도스트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쑥 솟아올라간 코리온을 빤히 쳐다보았다.

“10푼만 내시구려. 근데, 외모나 손이 유목민답지 않으시구려? 근데 신통하게 유목민 방언을 쓰시니.......어디 분이쇼?”

방 키와 낡아빠진 할룩스를 내민 도스트가 얼굴에 칭칭 감은 검은 터번 사이로 드러난 코리온의 갈색빛 특이한 눈동자에 괜한 호기심을 발휘했다. 대놓고 눈을 찡그리는 코리온의 모습에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 도스트는 라스와 함께 객실로 올라가는 코리온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런데 올 사람 같지는 않은데......”

카렐의 병실 문을 때려부술 듯한 기세로 달려 들어온 하심의 손에는 할룩스가 단단히 쥐여 있었다. 솔과 앉아 잠시 소담을 나누고있던 카렐의 앞에 넙죽 꿇어앉은 하심이 사뭇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학장님이십니다! 무사히 탈출하신 모양입니다!”

“뭐? 뭐? 정말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의 앞에 하심의 할룩스를 통해 나타난 형상은 많이 꺼칠해져 있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코리온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바깥소식과 완전히 단절되어있던 코리온 역시 한쪽 다리도 망가진 채 보조호흡장치까지 붙이고 힘겹게 앉아있는 카렐의 모습에 꽤나 놀란 모습이었다.

“역시, 해내셨구려, 오라버니.”

카렐이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형상에 손을 뻗었다. 조금은 어색한 표정의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어디로 연락을 해야할지 몰라서 일단 교수에게 했네.”

“잘 하셨습니다.”

“샤드니에겐 내 잘 있다는 말 정도만 전해주게.”

내심 뜨끔한 카렐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다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서 코리온에게 샤드니가 남부에 생포되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죠. 기뻐할 겁니다.......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장 셔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지금 바얀 시에 숨어있네. 도스트 바얀이라는 자의 여관에 묵고 있는데......”

“예에? 바얀 시요?”

코리온이 여전히 키타이 기지 주변에 있다는 말에 카렐이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곳엔 저희 셔틀 접근이 불가능하니......제 부하들을 캐러반으로 위장시켜서 들여보내겠습니다. 만 하루나 이틀정도 걸릴 테니 그동안 조심해 기다리고 계십시오.”

지친 듯한 표정의 코리온은 카렐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라리 다행이군.”

코리온이 행여 들을세라 카렐이 낮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차마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카렐은 코리온이 살아만 있다면 저 골아픈 샤드니가 적에게 생포되어 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조금은 못된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그 생각에 빠져있던 카렐은 코리온이 샤드니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깜박 머릿속에서 지워놓고 있었다.

감방에 쓰러져 맥없이 누워있는 샤드니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던 제롬이 함께 있던 베흔에게 의아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저놈 이제 어쩔 거야? 그냥 죽여버릴까?”

“그래도 각하 외숙부인데 말씀이 과하시군요. 입양은 됐지만 어쨌든 네페티 부인의 친동생 아닙니까.”

씁쓸한 표정을 지은 베흔이 제롬에게 그다지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며 대꾸했다. 입을 삐죽거린 제롬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숙부는 지랄......친누나 뒤집어엎고 죽이려 든 놈이 무슨.”

제롬의 독설에서 애써 관심을 끊은 베흔이 입을 열었다.

“처리방안은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행여 코리온 그놈이 살아있다면 저놈을 우리가 잡아두고 있는 게 도리어 놈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일수도 있죠. 그놈이 이제와 정말로 카렐과 손잡으려할지 누가 압니까. 그랬다간 중간에서 우리만 바보 됩니다.”

“그럼 풀어주겠단 거야? 저 새끼 약혼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제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서 있던 제롬은 마치 보라는 듯 옆구리의 드레싱을 두들기며 씩씩대고 있었다.

피식 웃음지은 베흔이 잘 다듬은 수염이 돋아난 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각하를 찌른 놈은 그 학장놈이지 저놈이 아닙니다. 저놈을 어떻게 처리할는지는 학장 그놈이 어떻게 발견되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죠.”

“무슨 소리야?”

제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시간을 봐서는 학장놈이 살아있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놈이 죽는 데 가장 큰 가능성을 둔다면 저놈도 죽여버리는 게 유리하죠.”

“그럼?”

“샤드니 저놈에게 자식이 없으니 다음 계승순위는 저놈 양아버지인 칼림 플레렌이죠. 야비할 정도로 현실적인데다가 학장과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은 놈이니 뒷구멍으로 우리와 손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 양아들이 누구 손에 죽었던간에 말이죠.”

“그럼 만에 하나 학장이 살았다면?”

“뭐, 살았어도 두 가지 경우가 있겠죠. 우리 손에 산채로 걸리면 저 다정하신 두 약혼자께 함께 죽는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을 테고.”

“풋.”

제롬이 코웃음을 치며 장난스레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놈이 살아서 서부제후군한테 돌아간다면?”

“그리 확률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약혼자를 살릴 건지, 아니면 지 뜻대로 카렐 놈과 손잡을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겠죠. 하지만 저놈을 버리고 카렐 놈과 손잡으려 한다면 플레렌 가와 세호 가에서 즉시 저항할 테니 어차피 쉽지는 않을걸요.”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베흔은 그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감방을 나섰다. 일단 샤드니를 사로잡은 이상, 코리온이 살아있든 죽었든 그는 모든 상황에 다 내놓을 수 있는 패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서부를 이도저도 못할 어정쩡한 상황에 빠뜨려놓았으니 이제 기르기트로 도망가있는 카렐을 확실히 끝낼 순서였다.

“자이납, 너 누가 보면 선이라도 보러 가는 줄 알겠다?”

옷에 앉은 먼지를 거의 10분마다 한 번 꼴로 털어내고 있는 자이납을 째려보며 라손이 입을 삐죽거렸다. 건장한 낙타 위에 앉은 자이납은 그답지 않게 한 손에 커다한 양산까지 들고 행여나 햇빛에 얼굴이 상하지나 않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라손의 잔소리를 들은 척 만 척한 자이납은 거울에 얼굴을 한 번 비춰보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헤헤, 이뻐요?”

“에휴, 그분이 널 안 보내려고 하셨을 때 눈치챘어야 되는데.”

캐러반 루트를 타고 북쪽으로 걷고 있는 이 잡스런 방물장수 행렬은 10마리의 짐낙타와 5마리의 말, 그리고 3명의 사람들---라손과 하심 그리고 카렐에게 갖은 어거지 생떼를 써 가며 합류한 자이납---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제쯤 도착하는 겁니까?”

얼굴에 쓰고있던 베일을 들춘 하심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라손에게 물었다.

“빠르면 오늘 밤. 늦으면 내일 아침정도.”

익숙한 주변 지형을 죽 둘러본 라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굴을 조금 찌푸린 하심이 불만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차를 타고 가면 훨씬 빠를 텐데......왜......”

가끔 세상물정 모르는 티를 내는 하심의 엉뚱한 질문에 라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길 보란 듯이 차를 몰고 지나가면 녀석들의 광역스캐너에 바로 잡힐 테고, 교수님이 평생 보신 것보다 더 많은 남부제후군들을 여기서 마주치는 영광을 맛보게 되겠죠?”

“기왕이면 저녁때 도착해서.......피곤하니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묵고......흐흐흐.”

자이납의 능글맞은 웃음소리에 라손과 하심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리며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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