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9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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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혼란기’로 더 잘 알려진 제국 역사상 최대의 전쟁, ‘2자 동맹전쟁’은 정확히 기원 119년 9월, 남부제후군의 동부 샤레이 침공과 서부제후군의 북부 하임달 침공으로 개시되었다. 1월에 있었던 황제의 ‘연두교서’에도 불구하고 무려 9달이나 지난 후에야, 그것도 두 지역에서 따로따로 전쟁이 개시된 이유는 황제의 ‘황제령 통과 불허원칙’과, 서부와 남부간의 연합군 주도권 싸움 때문이었다.
오르마즈의 예상대로 이번 전쟁에서 철저하게 제3자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세나우스 2세 황제는 남-서부 연합군이 황제령에 일단 집결해 북-동부 사이의 연결로인 탈라스와 킨자이를 제일먼저 공격해 두 지역의 허리를 끊어놓고 시작하겠다는, 전략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인 요구를 당초부터 강력하게 거부한 바 있었다.
황제의 이 거부는 표면적으로는 ‘황제령에는 제후군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윰 포고령 1차 추가령---바로 황제가 오르마즈와 함께 황제령을 탈환하면서 발표했던---에 따른 것이었지만, 실상은 강력한 군사력의 남-서부가 상대적으로 약한 북-동부를 일시에 무너뜨려 버리고 단기전으로 끝나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한 황제의 술책이었다.
게다가 연합군을 조직한다해도 자신에게 접한 지역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서부와 남부간의 세력싸움도 여기에 한몫 거들었다. 남부는 동부만 접하고 있는 반면, 서부는 북, 동부 모두와 접하고 있는 불리한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부가 남부와 함께 동부를 협공한다면 북부가 군사기지 하임달을 통해 자신들의 두 번째 핵심지역인 수베르를 곧바로 반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무서운 오르마즈까지 귀향해 북부에 가세한 상황에서 서부로서는 ‘서부가 두들겨 맞아주는 동안 남부가 둥부부터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겠다’는 남부의 빤한 술책에 말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임달을 통해 북부수도인 코윈을 먼저 무너뜨리자는 서부와, 샤레이를 통해 동부수도인 요동을 먼저 무너뜨리자는 남부와의 9개월간에 걸친 주도권다툼은 아무 결과도 남기지 못했고, 결국 두 지역의 독자공격이라는 최악의 패착으로 드러나고 만 셈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보나마나였다.
동부의 초입인 샤레이를 기세등등하게 공격해 들어간 건 마누엘 델루지 경이 이끄는 20만 남부제후군이었다. 마랄루에서 동부 기병 2만과 첫 조우한 8만의 남부 중장보병대와 중장기병대는 기습에 실패한 척 도주하는 경기병을 쫓아 거의 반나절을 결사적으로 추격했고, 빠른 기병대와 느린 보병대는 추격로를 따라 길게 늘어져서 앞뒤로 두 토막이 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랄루의 뻥 뚫린 반사막지대였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적들을 쫓던 남부제후군을 막아선 무려 5만이나 되는 동부기병대였다. 총사령관이며 동부 최고제후인 암바카이 슈트란 휘하 중장기병대장이며 그의 차남인 샤자한, 그리고 경기병대장을 맡은 마굴루 트라티누스 부인은 안마당인 이 샤레이의 초원을 종횡무진하며 남부의 느려터진 중무장 병력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북부 하임달을 공격한 서부의 상황은 더 좋지 못했다. 바니샤드의 막내동생 칼림 플레렌이 이끄는 16만의 서부제후군은 4만의 오합지졸 보병을 이끌고 나온 가짜 오르마즈에 속아 사방이 가로막히고 자기 와이어까지 걸려있는 산악분지에 보급도 끊긴 채 고립되고 말았다. 8만의 보병대와 1만의 직속 창기병대를 이끌고 등장한 ‘진짜’ 북부연합군 사령관 오르마즈는 그들의 숨통을 틀어막은 채 무려 한 달 동안의 지리하고도 끔찍한 공방전을 펼쳤다.
서부제후군은 결국 35일 만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지만 그 지옥 같은 기간 동안 오르마즈의 끈질긴 기습으로 죽은 병사들과, 얼어 죽거나 굶어죽은 병사들,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은 서부 병사들은 무려 5만이 넘었다.
“이번은 궁여지책으로 막은 것뿐입니다.”
도망치는 적들을 휘하 창기병대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추격하고 돌아온 오르마즈는 전투를 처음부터 지켜본 할아버지 빌루이 카파키에게 사뭇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5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분지는 곳곳에 흩어진 5만의 서부제후군의 피와 그동안 죽은 시체들의 썩은 내로 숨쉬기도 고약할 지경이었다.
적을 포위 공격한 지난 35일 내내, 오르마즈는 형편없는 보병들과 문란한 군기 때문에 낭패를 겪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대1 싸움에만 능한 거친 북부인들은 걸핏하면 명령을 어기고 적진에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기가 일쑤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군기사고는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서부연합군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을 이번 전투에서 적들에게 살길을 뚫어준 것도 계곡 중 하나를 차단하고 있어야 할 보병연대가 얼마 되지 않는 서부 장갑보병들을 잡겠다며 멋대로 병력을 이동시켜버린 탓이었다.
“볼 것도 없다. 참수해.”
말에서 뛰어내린 오르마즈가 근위병들의 손에 끌려온 문제의 연대장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의 명령에 도끼를 든 근위병이 버둥대는 연대장을 질질 끌고 사라져갔다. 발이 걸리는 돌덩이를 힘껏 걷어찬 오르마즈는 신중한 성격의 그답지 않게 잔뜩 격앙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사령관에 오르고 난 후 강력한 군율로 전군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오합지졸의 대명사 같던 북부제후군은 조금씩 그 면모를 달리해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엄격한 규율만으로 강군을 만든다는 건 높으신 분들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고 타성에 젖어있는 일선 지휘관이나 병사들에게 일거에 복종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어차피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중랑장급 장교인 연대장을 참수한다는 것도 이전의 북부제후군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궁여지책이라니, 어쨌든 우리의 대승 아니냐.”
스스로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손녀딸의 태도에 의아해진 빌루이 카파키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의 얼굴에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노인은 가문의 뜻을 어기고 황실에 충성하던 손녀를 배신자로 선포했고, 한번은 교수형까지 언도해 유배지 쿠트라스의 지하감옥에 쳐 넣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사업가 출신의 빌루이는 돈 문제에는 유난히 밝았지만 20년 가까이 프라임 지역을 점령했으면서도 정작 황실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그 전적에서 보이듯 정치나 전쟁 쪽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보니 북부가 외적의 위협에 마주한 지금, 그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건 한때 자신이 그리도 미워했던 이 손녀딸뿐이었다.
35일간의 포위전 동안 거의 잠도 이루지 못하면서 지친 기색이 역력해진 오르마즈는 자신을 싣고 달리느라 지친 애마 절영의 입에 직접 물을 부어 넣어주며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병들의 대오는 여전히 개판이고 멋대로 튀어나가는 놈들 잡는 데 전군의 20%를 동원하고 있는 게 제대로 된 군대입니까.”
투구를 벗은 오르마즈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얼굴을 시종이 가져온 찬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키우고 있다는 그 보병들은 언제 전장에 내놓을 거냐.”
“적당한 때가 되면요.”
할아버지의 질문에 오르마즈가 건성 대답했다.
이 오합지졸의 북부연합군을 맡으면서, 그는 지금의 이 군대로 장기간을 버티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바램대로 이 전쟁이 장기전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는 뒤로 자신이 그동안 기획했던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성전의 참전경험이 있는 베테랑들과, 기존 보병대에서 선발한 5천의 하급 사관들을 주축으로 그는 장창을 주 무기로 한 극도로 통제된 보병대와 창기병대를 새로이 키워내고 있었다. 약 4년 후 실전배치를 목표로, 그들은 다른 부대들과는 철저히 격리되어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에서 훈련받고 있었다.
“이놈아, 그만 좀 핥아라.”
더러워진 얼굴을 계속 핥아대는 절영의 장난에 오르마즈가 모처럼 웃음을 지었다. 성전의 해부터 함께 해온 이 검은빛의 수려한 말은 지금은 그의 상징처럼 알려진 녀석이지만 오르마즈 본인에게는 또 다른 소중한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열쇠 같은 존재였다.
오르마즈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기원 45년, 그가 민병대 준장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TSG 저항군 지도자였던 에르네스토는 하나같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몇 번이나 되는 암살의 위협과 어렵게 싸워오고 있었다. 특히나 오르마즈가 '침묵의 자매들' 제40대 대신관이었던 야푸르 빈 다하카르를 죽인 이후 피의 응징을 선언한 교단은 TSG 지도부 인물에 대한 무차별적인 암살이 콜로니 곳곳에서 벌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도 자객의 손에 결국 세 번째 아내까지 죽고 난 직후, 슬픔에 잠겨 있던 에르네스토는 아들 샤미르와 그 후손들을 제발 지켜달라며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이 충성스러운 심복에게 보이고 말았다. 그때 오르마즈가 함께 접한 건 그 모습은 물론이고 목소리조차도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에르네스토의 장남인 18살 소년, 아니 청년 샤미르의 심장을 얼려버리는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후 샤미르가 자신에게 남긴 수십 통이나 되는 편지들 첫머리에 모두 적혀 있던 ‘나의 첫사랑이며 유일하고도 영원한 단 한사람’이라는 말이 남자들이 흔하게 쓰는 그저 그런 입 발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오르마즈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모르지만, 그 잔혹한 독재자이며 ‘핏빛 비수’는 오르마즈의 앞에서는 나이어리고 수줍음 많은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동정을 벗어버리던 그 소중한 밤을 함께 보낸 후, 오르마즈의 품에 기대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던 순간까지도.
마치 그날 밤 샤미르의 눈빛처럼, 젖어드는 듯 검고 큰 절영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르마즈는 이 말의 보드라운 털에 말없이 이마를 기댔다.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제발 힘을 주시길......”
자신이 내보낸 서부 군인들이 북부 하임달에서 죽음을 맞고 있는 그 순간, 아켐의 플레렌 가 종가의 종장 침소에는 ‘황후위’이며 서부 최고제후인 바니샤드 플레렌 대공이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이 미남자의 매끈한 몸매는 흐트러진 이부자리 위로 그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드러나 있었다. 종가 정원 헤네랄리페를 넘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그의 반짝이는 다갈색 머리칼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종장이 본가의 자기 침실에서 옷을 입고 자건 벗고 자던 문제가 될 리는 없겠지만 다만 그 옆에 누워있는 금발머리 미모의 여인이 문제였다.
“브라코가 기뻐하더군.”
입가에 미소를 띤 바니샤드가 함께 누운 여인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걔도 이젠 애가 아니니까.”
피식 웃으며 대답한 이 아름다운 여인은 바닷물처럼 반짝이는 옅은 파란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바니샤드의 가슴을 자극적으로 어루만졌다. 옆에 누운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여자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모습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걸.”
“뭐, 어때, 엄마아빠가 잠자리 같이하는 건데. 걔도 이젠 100살이 넘었다구.”
바니샤드는 함께 누운 마하 사예브 발 부인의 가슴 위에 몸을 기울이며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부 최고제후가로 시집간 알리아 아야톨라 부인과 함께 서부, 아니 제국 제일의 미녀로 손꼽히는 이 여인은 발 가 종장 사우드 부인의 여동생이었고 한때 바니샤드의 정실부인이기도 했던 여인이었다.
마하가 전 남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못된 황제 귀에 들어가면 어쩌지.”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해.”
“황궁엔 또 언제 돌아가야 돼?”
“뭐, 전쟁 덕택에 한동안은 그 못난 년 볼 일 없을 거야. 나도 그년 생각만 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다구.”
바니샤드의 얼굴을 걱정스레 올려보며 마하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떴다.
“근데, 주페인가 그놈 당신 아들 절대 아니지? 틀림 없댔지?”
“아이씨, 믿으라니까. 나 그년 몰래 피임했다고 몇 번 말했어?”
바니샤드가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하자 그제서야 안도한 마하는 몸을 포갠 채 귓불과 뒷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는 전 남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그놈은 누구 자식이야? 생긴 거 봐선 동부나 남부 피는 아닌 것 같던데?”
“내가 알 게 뭐야. 그년 남자가 한둘이어야지. 나 말고도 서부 남자가 몇 명인지 알아?”
“그런데......천재라며? 11살에 벌써 남극성당 생도라면서? 사람들은 다 당신 아들로 알고 있던데?”
“뭐, 내 아들로 알아주면 당장은 좋지. 나도 황실에서 목소리 낼 수 있으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키득거리던 바니샤드는 이 아름다운 전 아내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보며 마치 바람소리같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때가 되면.......우리 아들 브라코가 태자가 될 거라구. 주페나 로노 같은 놈들이 아니고. 걸리적거리는 오르마즈 그놈도 쫓아냈으니......이젠 나만 믿어.”
화려한 침실에서 오가는 이 은밀하고도 발칙한 대화는 바니샤드의 ‘공식적인’ 이혼 이후 20여년간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하지만 세나우스 2세 황제는 물론이고 측근의 그 누구도 이 ‘불륜 아닌 불륜’의 존재를 아직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바니샤드는 점점 더 대담해져만 가고 있었다.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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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분들께서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오셔서 대
답드립니다. ^^;;
이 파트에서 제목에 해당되는 사람은 2명입니다. 현재 이야기의 한명과
과거 이야기의 한명입니다. 사실 양쪽 다 본격적인 내용전개가 되지 않은 상태
이긴 하지만 최소한 현재스토리의 주인공은 대강 짐작은 하시리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