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50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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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하늘을 올려본 라손이 씽긋 웃음을 지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등지고 나타난 이 셔틀은 그다지 특별하게 튈 것도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한’ 화물셔틀이었다.
“빨리 타십시오. 언제 남부 놈들이 올지 모릅니다.”
셔틀 안에서 뛰어나온 조종사가 일행들에게 얼른 손짓을 해 보였다.
제일 먼저 셔틀에 오른 코리온은 피곤한 듯 말에서 뛰어내리며 조종석 쪽으로 다가갔다. 조종실의 장비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재빨리 살피는 코리온에게 아무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조종석 밑에 살그머니 손을 밀어 넣은 그가 작은 부품 한 개를 재빨리 뽑아내는 모습 역시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탑승이 끝난 것을 확인한 조종사가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휴, 기르기트로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30분쯤 걸릴 겁니다.”
키타이 사막을 박차고 떠오른 셔틀은 기르기트가 있는 남쪽으로 즉시 기수를 돌렸다.
잘 날아가던 셔틀에서 갑자기 이상경보가 울린 건 이륙하고 약 10분 정도가 지나고 난 후였다. 셔틀에서 직접 느껴지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그 요란스런 경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어느새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특히나 지난번 셔틀사고로 한 팔이 부러졌던 자이납은 벌써부터 ‘버블장치’가 어딨냐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뭔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조종사에게 천연덕스럽게 다가간 코리온이 질문을 던졌다.
“그, 글쎄요......화물칸 캐빈 부분에 이상진동이 감지되었습니다. 특별히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왜 이러는지......”
조종사의 걱정스런 말에 코리온이 짐짓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착탈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더 이상 가면 위험할 듯 하니 잠깐 내려서 점검해보게나. 내 직접 도와주지. 일단 안전한 곳에 착륙시키게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재’ 코리온의 지적에 당연히 그러려니 한 조종사는 별 의심 없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안전한 곳을 찾아 사방으로 확 트인 반사막 한중간에 결국 셔틀을 다시 착륙시킨 조종사는 코리온의 손짓에 따라 수리용 공구함을 들고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종석에 자리잡고 앉은 코리온은 캐빈에 여전히 앉아있는 일행들에게도 나가라 손짓을 해 보였다.
“캐빈이 언제 풀려서 떨어져 버릴지 모르니 짐들 가지고 다들 내려있게. 캐빈이 풀려 떨어지면 위험하니 좀 멀찍이 떨어져있어.”
“알겠습니다.”
코리온의 지시에 하심을 비롯한 라손과 자이납, 라스가 말과 낙타들을 이끌고 급히 셔틀 화물칸에서 내려섰다. 그들이 모두 멀찍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코리온은 방금 빼두었던 부품을 조심스럽게 제 위치에 다시 끼워 넣었다.
“저어, 학장님, 착탈장치에는 별 이상이 없는 듯 합니다.”
조종석 아래를 탕탕 두들긴 조종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내민 코리온이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후익 때문인가? 그쪽 한번 보겠나? 내 여기서 살필 테니.”
“알겠습니다.”
코리온의 지시에 후익을 살피러 급히 뛰어가던 조종사는 도크와 문이 느닷없이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기체를 다시 탕탕 두들겼다.
“하, 학장님......문이 오작동......”
순간 혼비백산해 조종석 문으로 달려가던 조종사는 셔틀 엔진이 갑자기 작동하기 시작하는 요란한 진동음에 놀라 주저앉아버렸다.
“이, 이게 뭐야.......바얀 장군님! 바얀 장군님!”
상황을 뒤늦게 눈치 챈 조종사가 멀찍이 뒤에서 생각 없이 서 있던 라손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셔틀은 모든 출입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땅을 박차며 이륙하고 있었다. 조종사의 목소리를 제일먼저 들은 자이납이 필사적으로 달려와 이륙하는 셔틀에 뛰어올랐지만 그로서도 이미 높이 떠올라있는 셔틀을 붙들기는 역부족이었다.
“학장님! 학장님!”
미친 듯이 달려온 하심이 바닥에 꿇어앉으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지만 코리온 혼자 타고 있는 저 셔틀은 야속하게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안됩니다! 학장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그제서야 코리온의 의도를 깨달은 하심이 눈물 젖은 얼굴로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그의 마지막 외침은 셔틀 안의 코리온에게까지 들리기에는 너무도 미약했다.
“아무래도 황제령으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곤죽이 되어 축 늘어진 샤드니의 뺨을 톡톡 두들기며 남부 심문관이 입을 삐죽거렸다. 서부의 각종 기밀사항을 캐묻는 이번 심문에서 샤드니는 멍 한 얼굴로 헛소리만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솔직히 꼴 보기 싫은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플라칼 가 지휘관들과 함께 심문을 옆에서 지켜보던 릴라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명색이 서부 최고제후인데 저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을 위해서도......”
“릴라크 자넨 미남한테 너무 약한 게 탈이라니까.”
히르직스의 농담에 플라칼 가 남자 지휘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이 연합군 사령관 시절 바로 릴라크 자신을 카렐의 칼밑에 디미는 못된 짓을 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명색이 서부 최고제후인 사람을 저렇게까지 대하는 건 어딘지 아니다 싶은 생각에 그는 이 심문을 더 이상 지켜보고픈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걱정말게. 이놈을 목 쳐 죽여도 서부 놈들은 어차피 찍소리도 못해. 서부에서 최고제후는 일개 학장만도 못한 존재 아닌감?”
큰소리를 친 베흔은 샤드니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올리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때, 갑자기 심문실 문이 열리더니 당혹스런 표정의 아리엘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대장님! 급한 연락입니다.”
“누가?”
무성의하게 되묻는 베흔과 남부 지휘관들, 심지어 맞고 있는 샤드니까지도 번갈아 쳐다본 아리엘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리쿠 학장입니다.”
순식간에 넋 나간 표정이 되어버린 얼굴의 베흔과, 피투성이가 된 채 그에게 머리채가 잡혀있던 샤드니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아리엘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북극 부근의 날찍한 분지 중앙에는 제일먼저 도착한 근위대 셔틀이 세워져 있었다. 열린 도크에 기대 선 베흔은 마른 고기조각을 신경질적으로 씹어대며 시계만을 바라보았다.
“놈이 정말로 나타날까요?”
그에게 다가온 아리엘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베흔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했을 따름이었다. 베흔에게서 고기조각 한 개를 받아든 아리엘이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혼자 킥킥거리며 다시 물었다.
“이거 누가 더 손해보는 장사죠?”
“글쎄,”
사람 죽는 일이라면 무조건 입가에 웃음부터 품는 이 잔혹한 녀석을 바라보며 베흔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싸움 실력도 그렇고, 머리까지 제법 쓸 만한 이 녀석은 걸핏하면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쳐 죽이는 것만 빼면 지금 근위대에서 바로 자신의 2인자 노릇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생각하나마나 아니겠나?”
베흔의 대답에 아리엘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음침하기까지 한 그의 웃음소리를 넘어 남쪽 하늘에서 점 하나가 문득 모습을 나타냈다. 세호 가 문장을 달고 있는 그 셔틀은 베흔의 헬리오스 셔틀과는 1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분지 반대쪽에 조용히 내려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사뭇 긴장한 표정의 라바니 경과 몇 명의 서부 병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늘의 주인공께선 어디 가셨나?”
고개를 내민 베흔이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한쪽 언덕 뒤켠에서 볼품없는 화물셔틀 한 대가 저고도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먼저 와 있는 라바니 경의 셔틀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막 착륙한 조종석 문을 열고 키 큰 유목민 복장의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훗, 맞긴 맞군.”
베흔이 손을 툭툭 털며 앞으로 나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짧은 수염으로 거뭇거뭇해진 얼굴이었지만 지난번 아들 제롬을 찌르고 달아났던 그 죽일 놈의 유학자에 틀림없었다.
“저새끼, 이제야 제대로 걸렸군.”
입맛을 다신 베흔이 주먹을 어루만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상황을 잘 모르는 라바니 경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코리온은 별다른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가디언 몇 명과 의무관을 데리고 당장 라바니 경이 직접 나오라’는 급박한 연락에 허둥지둥 나오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갑작스레 나타난 코리온과, 먼저 와 있는 근위대 셔틀에 어리둥절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맞은편 근위대 셔틀에서 두 개의 들것과 몇 명의 포로들이 끌려나왔다.
“병사 네 명만 날 따라오게.”
입술을 굳게 깨문 코리온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도 두 개의 들것을 든 근위대 병사들과 포로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나아가는 코리온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코리온의 망토에 돋은 검은빛 털이 살을 에는 듯 불어오는 북극의 칼바람에 매섭게 물결쳤다.
“잠깐.”
정확히 중간에 도착한 근위대 병사들은 코리온의 한마디에 들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코리온 역시 잠시 멈춰 서서 들것 옆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샤드니와, 지난번 키타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던 사르키스가 각각 들것에 실려 있었고 사르키스를 따라 결사대에 지원했다가 포로가 된 서부 병사 십여 명이 양손이 꽁꽁 묶인 채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꺼칠한 수염이 돋은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지은 코리온이 들것에 실려 있는 샤드니의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입에 재갈이 채워진 채 손발이 단단히 묶여있는 샤드니가 눈물을 흘리며 미친 사람마냥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코리온은 그런 샤드니의 아름다운 푸른빛 눈동자를 미소띤 얼굴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맷자락으로 샤드니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준 코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와 혼인하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게 되어 미안하구나......넌......부디 나처럼 옛 생각에 빠져 살지 말고......”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가던 코리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짧은 웃음으로 나머지 뜻을 보였을 뿐이었다. 입고 있던 검은 털망토를 벗어 샤드니의 가슴 위에 덮어준 그는 품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옷 속에 조심스레 끼워주었다. 코리온을 따라온 따라온 서부 병사들이 그의 눈짓에 샤드니와 사르키스의 들것을 들어올렸다.
“잘 가라. 샤드니. 뒷일은 네게 부탁한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감추려는 듯 코리온은 뒤로 휙 돌아서버렸다. 그리고 근위대 셔틀을 향해 걷기 시작한 코리온과, 라바니 경을 향해 실려가는 샤드니는 다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들것 위의 샤드니가 거친 신음소리와 함께 실성한 듯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코리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매정하게 멀어져갔다.
“근위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코리온 리쿠 학장님.......훗, 면도부터 하셔야겠군요.”
빈정거리듯 떠들던 베흔이 옆에 선 아리엘에게 손짓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히죽거리며 달려 나온 아리엘은 멀리서 보고 있는 서부 병사들 보라는 듯 이 유학자의 등을 무릎으로 사정없이 찍어 짓눌러버렸다.
“아윽,”
바닥에 쓰러진 채 손발에 수갑이 채워지던 코리온은 멀리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간 샤드니에게서 재갈과 포박이 풀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너무도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등과 목을 짓눌리고, 머리채를 움켜잡아 고개가 치켜올려지는 이 고통도 바로 며칠 전 경험한 듯 너무도 익숙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됐습니다.”
포박한 코리온을 마치 짐짝처럼 바닥에 질질 끌고 아리엘은 베흔을 따라 셔틀에 다시 올랐다. 하지만 베흔도, 아리엘도, 자신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오는 코리온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그 묘한 웃음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학장님 타시던 조황비전 안장에 끼워져 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있는 카렐에게 하심이 내민 건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누런 종이에 공용어로 쓰여진 그 글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내가 저들에게 잡혀든 것이 아니라 저들이 내게 잡혀든 것임을 곧 알게 될 것이네. 내가 죽음을 맞는 날, 샤드니는 자네와 손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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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출판본이 조아라 프리미엄에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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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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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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