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51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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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공세에서 대실패를 기록한 남부와 서부는 각각 다른 전략을 들고 나왔다. 초원에서의 동부기병과의 정면승부가 승산이 적다는 것을 깨달은 남부의 마누엘 델루지 경은 그들이 가진 ‘경제력과 인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마누엘에게 잔인하지만 결정적인 조언을 준 것은 남부 3제후 카산드라 호지 부인이었다. 그의 의견에 따라 경무장한 10만의 대규모 기동보병을 양성한 남부는 동부 곳곳을 급습하는 기동전략을 택하게 되었다.
원래는 서부제후군이 잘 써먹던 이 방식을 도입하면서 남부 역시 그 특유의 견고한 중장보병과 경보병이 결합된, 나름대로 한 단계 발전된 군대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발전’은 대부분이 무고한 민간인인 그 ‘기동전’의 희생자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부 녀석들은 무조건 인종청소할 것’을 지시받은 이들 경보병들은 가뜩이나 인구밀도도 얼마 되지 않는 샤레이의 많지 않은 거주지들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요하게 공격해 초토화시켰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퍼부으면서, 15년간의 샤레이의 참혹한 학살극은 결국 1천 4백만 명이라는 헤아리기도 끔찍한 희생자를 남기고 말았다.
동부제후가 중에서도 가장 유목민 색채가 강한 2제후 트라티누스 가가 믿는 건 적들을 한군데 모아 대규모의 기병으로 몰아치는 것이었지만 남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남부는 철저하게 회전을 피하며 민간인 거주지만을 번갈아 초토화시켰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더러운 동부 야만족 유목민’이라는 죄 하나만으로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날 이후 트라티누스 가가 남부와는 절대 손잡을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건 별로 이상한일도 아니었다. 결국 동부 2제후 트라티누스 가는 변변한 회전 한번 치러보지도 못한 채 요동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샤레이를 차지하면서 기세등등해진 남부는 동부 수도인 요동과 코라산에 비슷한 방법의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최소한 요동에 있어서는 초기 10여 년간 이 계획이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가서 수백만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인종청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사실 문제는 코라산을 차지하고 있는 3제후 하크로딘 가였다. 반농경 가문인 하크로딘 가는 동부에서는 비교적 우수한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셔틀강습이 어려운 험한 삼림 산악지형이라는 점도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곳에서는 ‘굼뜬 눈먼 장님’이 되어버리는 남부보병을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맘먹고 기습해 들어간 경보병들도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드는 민간인들과 거친 산악 게릴라에게 혼쭐이 나서 돌아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코라산에서의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전체 전황은 갈수록 어려워져가고만 있었다.
그에 비하면 탄탄한 경제력의 북부와, ‘오르마즈’라는 걸출한 명장을 상대로 승부를 내야 하는 서부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지난번 하임달 공세에서 대패를 기록했던 서부는 3년 후, 방향을 바꾸어 이번엔 북부의 또 다른 관문인 동부 탈라스에 15만의 대군을 동원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동부의 온 신경이 남부와의 전쟁에 가 있는 동안 북-동부의 연결로를 끊고 뒤통수를 친다는, 나름대로 생각 끝에 내린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험한 사막에서 그들을 맞아준 건 북부에서 지원 왔다는 4만의 ‘정체불명의 보병들’과 난폭하기 짝이 없는 1만 기의 탈라스 유목민들이었다. 키의 3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장창을 빽빽하게 앞세우고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는 그들 보병들은 3만에 달하는 낙타병 부대와 기병부대를 순식간에 무너뜨려 서부 병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걸핏하면 폭발하는 북부인 특유의 다혈질 성질을 붙든 건 바로 그 장창이라는 무기 자체였다. 유난히 긴 그 무기 자체가 대오를 묶는 역할을 할뿐 아니라 집단으로 뭉치지 않으면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는 그 압박감이 무질서하게 싸우는 것으로 대별되던 북부인들의 모습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바로 그것이 오르마즈가 노리던 것이었다.
게다가 1차 돌격을 마친 그들은 짧게 줄인 창을 들고 도망치는 적을 도륙하거나 보조무기인 칼, 도끼를 들고 이전 같은 그들 특유의 난폭한 기질을 십분 발휘하는 놀라운 유연성까지 발휘해서 서부의 지휘관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 무서운 보병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검은 사신’으로 이미 악명을 얻은 오르마즈라는 사실도 그 공포감에 한몫 거들었다.
그렇게 기병 전력을 잃은 12만의 서부 보병대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탈라스 유목민 기병들의 측면지원을 받은 북부보병대의 2차 돌격에 12만 중 3만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2만이 포로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남긴 채 그들은 서부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북부를 끊임없이 침공했던 서부는 단 한 번도 변변한 승리를 거두어보지 못한 채 30여년의 귀한 시간과, 1백만이 넘는 무수한 인명만을 까먹어가고 있었다.
“어제 하임달에 상륙한 서부제후군 2만은 북부기병대 5천의 기습으로 다시 후퇴했다고 합니다.”
기원 150년의 어느 날, 전날의 전황을 들고 황제를 찾아온 베흔은 그의 양옆에 서 있는 황제의 든든한 두 아들, 로노와 주페에게도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크고 우람한 덩치에 아버지인 가잔 클라투스를 꼭 빼닮은 로노 장태자는 그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남극성당에서도 그럭저럭 좋은 성적의 준수한 박사과정 생도였다. 다만 장태자라는 지위 때문에 여자가 꼬이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다혈질인 그 성격 탓인지 물불 못 가리는 여색 때문에 요즘 황제의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얼토당토않은 황손이 튀어나올 것을 걱정한 황제가 이 바람둥이 아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까지 시켜버렸을 정도였으니 황제의 고민도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었다.
반대편에 서 있는 둘째 주페 태자는 그런 다혈질 형에 비하면 훨씬 냉혹한 성격을 지닌 남자였다. 아름다운 적갈색 머리칼의 이 태자는 11살에 입학한 남극성당 육서과정을 단 9년만에 마친 후, 학교를 옮겨 서부 파예드 아카데미의 박사과정에 입학해 지금은 그곳의 하급교수인 수찬까지 올라 있었다.
하지만 얼핏 문약해 보이는 이 둘째태자는 실상은 황제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미래의 무장이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이 태자의 벗은 몸은 마치 X들을 연상케 하듯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져 있었고, 놀라운 칼솜씨와 창솜씨 역시 엔간한 수준의 X들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평소 생활 또한 그 형과는 딴판이어서, 최고위 황족으로서의 호사도 모두 거부한 채 유학자다운 극도로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제국의 전반적인 보수화를 주도할 인물이 아니냐는 우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비등했다.
이런 사람들의 걱정이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유난히 맺고 끊음이 분명한 이 태자는 지나치리만큼 강한 주관을 지닌 원칙주의자였고, 황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종교재판관으로나 딱 어울릴 인물’이라는 그다지 곱지 않은 촌평까지 듣고 있었다. S혈통의 발현자이며 원리주의 유학자, 심지어 무장이기까지 한 그는 특별히 악행을 저지른 일은 없었지만 언뜻 감정이라고는 거세된 듯한 그 성격 때문인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인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실제로 십여 년 전, 3천여의 근위대를 이끌고 나갔던 ㅤㅋㅞㄹ크의 반란군 토벌작전에서도 그가 자진투항한 자 270여명을 무장해제만 시키고 돌려보냈다는 ‘선행’은 무려 420여명에게 눈 깜짝도 않고 행한 집단 교수형으로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당시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변의 권고에 ‘내 저항한 자는 죽인다 이미 공포했으니 이제와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며 그들 모두를 2층의 거대한 교수대에 마치 건어물처럼 주렁주렁 목매다는 광경을 한 잔의 차와 함께 태연하게 지켜보았던 그런 남자였다.
어찌 보면 황제와 잘 어울릴 그 성격 덕에, 그는 이제 곧 학업을 접고, 신임 아메샤 스펜타 군단의 사령관이 되어 완전한 무장의 길로 접어들 예정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북부사령관 오르마즈는 계속 서부 정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최고제후 빌루이 카파키가 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베흔이 자료를 내밀자 황제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폐하께서 원하시던 바는 이미 거의 거두시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들린 굵은 그 목소리에 황제는 둘째아들 주페를 살짝 째려보았다.
“30년간의 전쟁특수로 이미 황제령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은 제후지역을 압도하고 있으며, 최소한 서부와 남부에 있어서만은 황실의 존엄함이 드높아졌습니다. 전쟁이 더 길어진다면 동부에서 부당한 학살극을 벌이고 있는 남부의 폭주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이젠 폐하께서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 전쟁을 속히 마무리 짓고 동부와 북부까지 포용하셔야 할 때이오니......”
“내 알아서 할 것이니 네가 아직 신경 쓸 필요 없다.”
속내를 들킨 듯 불쾌한 표정을 지은 황제는 아들의 입을 그대로 가로막아버렸다.
베흔과 함께 들어온 종친부 대부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폐하, 그리고 기쁜 소식입니다. 막내 레곤 공주저하의 아드님이신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마마 역시 S완전발현자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황제가 불쾌함에 일그러들었던 표정을 대뜸 풀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황제에게 골치만 안겨주던 사고뭉치 막내딸이 어머니인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돌게 만든 것도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남극성당 고거지학과정 학부생도로 재학 중인 황제의 막내딸 레곤 공주는 굳이 좋게 말하자면 화통한 성격으로 걸핏하면 이런저런 사고를 쳐서 황실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곤 했던 인물이었다. 남자관계 또한 화끈하다 못해 무모한 이 막내공주가 ‘저지른’ 결혼 또한 어머니에게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사실 레곤의 유난히 높은 눈을 처음 만족시켰던 오르마즈는 원래부터 그가 언감생심 탐을 낼 처지가 되지 못했다. 북부연합군 사령관으로 있는 오르마즈와 결혼시켜달라며 일찌감치 10대 때부터 어머니를 달달 들볶았던 그였지만 그 어머니가 허락을 해 줄 리가 만무했다.
딸의 생떼에 난처해진 황제는 ‘그러면 네 개인교사인 세네피스가 오르마즈하고 꼭 닮았다니 어떠냐?’라고까지 물었지만 세네피스는 레곤이 원하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쨌든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그 고집쟁이 딸도 최소한 오르마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부 4제후 세닉 가 종장 이렌느 부인의 남동생 3형제는 미남미녀가 별로 없기로 소문난 남부 같지 않게 하나같이 출중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성격과 각자 분야에서 빼어난 재능으로 인정받고 있는 훌륭한 미혼의 남자들이었다. 그들 중 큰형이었던 이르센 세닉은 일찌감치 황제의 눈에 띄어 40년 전, 결국 하렘에 들게 되었다. 이렇게 얼떨결에 결혼한 그였지만, 지금은 가장 총애 받는 남자들에게나 주어지는 145층의 황빈 침소를 차지하고 있었고, 황제에게 타니토 세닉 리쿠라는 훌륭한 공주까지 안겨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두 동생들이었다. 황궁에 있는 큰형을 만나러 왔던 그의 두 동생들은 그 어머니를 그대로 본받은 나머지 두 공주, 넷째 모디아크와 막내 레곤에게는 충분히 노려봄직한 ‘목표물’ 이었다. 결국 이 두 어리버리하고 착한 청년들은 148층의 태자 침소가 ‘황족과 관계된 귀빈에게 주어지는 특별영빈관’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시종과 종친들, 친구들까지 몽땅 다 동원한 요란스런 파티에 휩쓸려 버렸다.
과정이야 어쨌든, 자매간의 이 은밀한 모의는 대성공을 거두어서,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이 두 남자들은 보통의 제국민들이라면 감히 들어와 볼 엄두도 못 낼 148층의 태자 침소에 공주들과 함께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신들의 경악스런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무장인 모디아크는 유학자인 둘째에게 협박 반 설득 반으로 결혼해 주겠다는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들에 비하면 어딘지 볼품없는 자신의 외모에 내심 걱정하던 레곤은 그보다 훨씬 더 ‘화끈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동원했고, 뱃속의 아이를 이제 어찌할 거냐며 한바탕 울고 짜고 한 끝에 궁지까지 몰린 막내 예르마크의 입에서 ‘당장 결혼해 주겠다’는 말을 기어이 끄집어냈다.
어쨌거나 7년 전인 143년, 21살의 나이어린 공주가 뱃속에 7개월이나 된 아기를 가지고 올린 혼례식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딸의 이 수완에 두 손 다 들어버린 황제는 첫손자가 곧 태어난다는 사실로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7살이 된 그 문제의 아기, 코리온은 어린 나이부터 이미 고대어를 능수능란하게 읽고 해석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사람들 사이에 혹시 또 다른 발현자가 아닐까 하는 기대에 들뜨게 해 오던 터였다. 어쨌든 자손들이 날로 번창하는 모습에 황제는 하마터면 대가 끊길 뻔 했던 아버지 세나우스 1세를 떠올리며 맘껏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리고오......”
베흔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두 태자와 종친부 대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치를 챈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에게 말했다.
“내 피곤하니 들어가 봐야겠다. 모두들 가서 자거라.”
“알겠습니다. 소자들 돌아가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폐하.”
황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두 태자와 대부가 방을 비워주자 황제는 베흔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이곳 집무실에서 바로 연결된 작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66층, ‘나무의 방’으로 가겠다.”
“존명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베흔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개인 집무실과 바로 붙은 150층 주 침실로 오늘도 가지 않는 황제의 모습을 의아한 듯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황제의 남자관계를 생각해보면 황궁 건립 후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황제가 그곳의 침대에 누군가와 함께 누워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측근들과 은밀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 황제는 매번 이렇게 귀찮게 황궁 별실로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원래 150층 침실 자체가 ‘황제만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황제가 원할 시 그 누구든 불러들일 수 있다’고 바로 황제 스스로가 만든 내명부 규율에는 대놓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럴 거면 그런 규정은 뭣 하러 만들었담.’
혼자 생각에 잠긴 베흔이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가 혼자 자는 날, 드물게 그의 머리맡을 지킬 때 빼고는 베흔조차도 그 웅장한 침소를 두 눈으로 본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남편 바니샤드 대공조차도 149층 황후의 침소에서 황제를 맞았을 뿐, 150층 침소에는 발조차 들여놓아볼 수 없었다.
황궁 160층부터 170층까지, 11개가 준비되어 있는 황제의 ‘별실’ 들은 이 황궁을 손수 기획하고 건설한 세나우스 2세의 그 허영기의 산물이었다. 각각의 주제별로 다른 스타일로 디자인된 11개의 침궁 중 오늘 황제가 택한 ‘나무의 방’은 초록빛 잎이 반짝이는 활엽수들로 가득 장식된, 마치 숲과 같은 곳이었다.
안에 들어선 황제는 문을 잠그며 따라 들어온 베흔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보았는가?”
입술을 굳게 다문 베흔이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결과는?”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망할 놈......”
황제가 이를 빠드득 갈며 뒤로 휙 돌아섰다. 꽉 움켜쥔 황제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베흔이 몇 장의 영상카드들을 내밀며 말했다.
“아켐의 종가에서 틈날 때마다 그년을 만나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
“매일 만나건, 딱 한번 만났건 죽을죄긴 매한가지지.”
보다 만 영상카드를 휙 내던져버린 황제는 장에 있던 술을 꺼내 벌컥 들이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흔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
“둘 사이에 숨겨둔 딸도 하나 있습니다.”
“씨발 개새끼! 지가 감히 황제인 날.......”
순간 흥분한 황제는 먹다 만 술병을 그대로 벽에 내던져 버렸다.
“지금 9살 된 네페티 발 플레렌이라는 계집애입니다. 그 뒤에도 마하 그년이 한 번 더 임신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산했는지 아니면 어릴 때 죽었는지 그 아이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가관이군,”
바니샤드의 대담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행각들에 기가 막혀진 황제는 잠시 허탈한 웃음까지 지었다. 황제에게 조금 더 다가선 베흔이 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할까요?”
베흔의 질문에 황제는 서슴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없애버려. 그 잘난 가족끼리 오손도손 함께 있을 때. 이젠 필요성이 다했으니.”
황제의 단호한 대답에 씨익 웃음을 지은 베흔은 어느새 황제의 얼굴에 가슴이 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서 있었다. 그는 두 개의 긴 깃털장식을 늘어뜨린 황제의 조우관을 벗겨 옆에 내려놓고는 어깨의 금빛 머플러까지 끌러 침대 옆에 던져버렸다.
베흔이 황제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다시 물었다.
“여자하고 그 딸년은요?”
베흔의 자극적인 손길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황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살려놔. 욕심 부렸다가 괜히 의심받을 필요 없지. 그것도 지금 같은 때에......그 나머지 일가는 나중에 한 번에 쓸어버리면 될 테니.”
“원하시는 대로.”
묘한 비음을 섞어 속삭이듯 대답하는 베흔의 붉은빛 머리칼을 황제가 한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베흔은 몸이 잔뜩 달아있는 황제의 입술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어느새 불이 꺼져버린 침실 안에서 황제는 또 한명의 ‘비공식적인 남자’와의 하룻밤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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