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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52화 (351/1,132)

< -- 352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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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년 때문이다......다 네년 때문이야!”

서부연합군 기지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카렐에게 연락을 해온 샤드니가 붉게 충혈된 눈에 살기를 내뿜으며 갖은 폭언을 퍼부어댔다.

“네년만 없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어! 이제 어쩔 거야! 학장님께서 네년 때문에 돌아가시면 어쩔 거냐는 말이다!”

카렐의 병상을 지키던 네페티 부인조차 동생의 반 쯤 미쳐버린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네년은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돼! 이 천하에 쓰레기 같은 년아!”

눈을 부라린 샤드니는 이번엔 함께 있던 네페티 부인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누님! 이제 정신 차리시죠! 저 더러운 가디언 핏줄 곁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저놈 이제 끝입니다! 제위 따위 이제 다 필요 없습니다!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근위대와 다시 동맹을 맺어서 학장님을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저년을 지 애비처럼 죽여서 그 대가리를 썩어서 말라비틀어진 가죽만 남을 때까지 매달아놓을 겁니다! 아니, 두고두고 제 간식거리로 삼을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군.”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혼자 씩씩대던 샤드니는 그대로 통신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미안해......내가 대신 사과할게.”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큰 손에 뺨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코리온이 넘겨준 쪽지를 다시 펼쳐본 카렐은 아직까지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샤드니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샤드니가 저리 나오리라는 걸 학장도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테고.....그 양반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난 내 뜻을 적은 것뿐이네. 근위대장.”

베흔이 코앞에 들이민 ‘격문’ 사진을 바라보며 코리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보다 계승서열이 높으니 제국의 법도와 도리대로 카렐 태자가 제위를 잇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동부와 플라칼 가 지휘관들의 살기어린 눈빛과 근위대 가디언들의 위협적인 분위기에도 코리온은 표정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수염도 깎지 못한 꺼칠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단정한 자태로 의자에 똑바로 앉아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과 대군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흥분을 애써 죽이며 눈앞의 이 도도한 유학자를 당장이라도 때려잡을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는 쪽은 베흔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만으로 근위대의 지난번 교시에 따른 ‘역모죄’가 성립한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자네들의 교시 따위 내용이 무언지는 내 관심 없네. 난 도리에 따라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뿐이니.”

코리온의 뻔뻔할 정도의 태도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헤즈 사령관이 옆에 선 히르직스 들으라는 듯 속삭였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포고령에 규정된 역모 수괴에 대한 형벌이 무언지는 잘 아실 텐데요.”

“윰 포고령 원문 제2편. 제1장. 황실의 전복, 황제 및 그 직계존비속의 살해, 후계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자는 책형, 사지절단형, 화형, 생리박피형에 처할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정도와 방법은 황제 혹은 그 대리인의 임의로 가감할 수 있다. 바로 자네에게 필요한 형벌 아닌가.”

눈빛하나 변하지 않은 코리온의 대꾸에 그만 분노가 폭발하고 만 베흔이 코리온의 멱살을 번쩍 잡아 올렸다.

“아무래도 황궁 지하 12층에 다시 보내줘야겠다. 이 허여멀건 서생 놈아.”

“다시 가게 되다니 반갑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코리온이 베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뜨끔 한 베흔은 그의 눈길을 피하려 했지만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 물결처럼 조금씩 울렁이는 그 눈빛은 덫에 걸려든 이 먹이를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내 네페티 부인을 버릴 때 자네도 함께 버렸어야 하는 건가?”

“무......무어......”

“지금 자네의 그 개인적인 분노는 내게 찔린 거한 덩치 녀석 때문이겠지?”

마치 최면을 거는 듯, 가는 음성으로 속삭이는 코리온을 베흔이 어렵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 괴상한 포로를 떨쳐낸 베흔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머리를 싸쥐었다.

‘제기랄......이놈 뭐, 뭐야......’

몇 달 전, 파예드에서 이 괴상한 녀석을 독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뒤통수를 망치로 계속 후려치는 듯 지독한 두통에 베흔은 결국 거품을 물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쓰러진 그의 모습에 곁에 있던 남부 지휘관들이 급히 달려들었지만 한 번 쓰러진 베흔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쪽 구석에서 코리온을 내내 매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샤자한 공이 결국 한발 나서며 쓰러져있는 그의 어깨를 꾹 밟아 비틀었다. 코리온의 옷이 미끄러지면서 고문의 흉터가 가득한 그의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쓸데없이 혀를 놀려가며 잘난체 해봤자 네놈은 죽을 수밖에 없어.”

“근위대장은 악한으로서의 지조라도 있으나 그대는 그나마도 되지 못하니 도대체 무엇이라 칭해야할지도 떠오르지 않는구나.”

“뭐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샤자한 공을 플로브 경이 급히 잡아당겨 제자리로 끌고 돌아왔다. 베흔과 샤자한 공의 속을 번갈아가며 긁어놓은 코리온은 바닥에 쓰러진 채 뜬금없이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옷이나 입으시죠.”

보다 못해 코리온에게 다가선 릴라크가 찬 바닥에 누워있던 그의 벗겨진 옷을 추스르며 부축해 일으켜주자 플라칼 가 지휘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릴라크 경은 미남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남부 지휘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취조실을 빠져나온 베흔은 저승에서라도 돌아온 듯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그는 파일 하나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아리엘에게 짜증스레 물었다.

“뭐냐?”

“돌아간 샤드니 녀석이 공식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순간 눈이 확 뜨이며 문서를 낚아채듯 받아든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학장만 돌려주면 제위경쟁을 모두 포기하고 앞으로 근위대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니......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놈.......순발력 하나는 정말 알아줘야겠군. 돌아간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킬킬대며 웃기 시작한 베흔은 취조실 안에 서 있는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을 힐끔 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그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여전히 뒤흔들었지만 일단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샤자한 저놈을 공중에 붕 뜨게 만드는 게 좋을까? 아니면 골 아픈 학장 놈을 이 기회에 제거하는 게 나을까?”

“솔직히 동부보다는 강한 서부가 더 유용성이 크지 않을까요?”

고개를 치켜든 베흔이 아리엘의 눈동자를 올려보며 갑자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자넨 나하고 손발이 정말로 잘 맞는걸.”

“푸훗.”

취조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코리온은 방 안에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 이 둘만이 남자 갑자기 키득거리며 의미 없는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의 기이한 눈빛에 이유 없이 기분이 상한 샤자한 공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멍청한 작자 같으니, 내가 정말로 죽을 것 같나?”

“뭐라고?”

“서부로 돌아간 샤드니 공이 내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을 것 같은가? 날 살려주는 것을 대가로 벌써 백기를 들었을 텐데?”

순간, 무언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진 샤자한 공은 자기도 모르게 이 유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꿈틀대는 그의 갈색빛 눈동자에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 기묘한 떨림이 흘렀다.

“샤드니 공에게 화친요청을 받은 근위대장은 지금 표정관리를 하느라 미칠 지경일 게야. 자네의 동부는 이미 카렐을 배신했으니 돌아갈 데도 없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 말로, 내세울 거라고는 기병밖에 없는 그대 동부보다야 2차 혼란기 때부터 오랜 동맹관계도 있어왔고, 힘도 막강한 서부에 끌리는 건 근위대장에겐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어느새 코리온에게 말려들어간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은 그의 눈빛을 멍 하니 바라보며 넋이 빠져 있었다.

“어차피 난 죽지 않을 것이고, 자네들은 다시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것이니 내 앞에서 도도하게 굴어 봤자네. 이제 판은 결정된 것 아닌가? 가서 근위대장에게 나 코리온 리쿠 학장을 약속대로 빨리 죽이라 재촉해보게나. 어떤 대답이 나올까 정말로 궁금하군.”

코리온의 자신만만한 웃음소리에 할 말을 잊은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들은 허둥지둥 취조실을 나섰다.

샤드니의 전문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는 베흔의 뒤로 샤자한 공과 플로브 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넘겨받은 문서를 급히 파일 속에 감춘 베흔은 그를 돌아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제 약속대로 해 주어야겠군.”

샤자한 공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베흔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이라뇨?”

“우리 원래 약속에 저놈을 잡는 대로 처형하겠다 하지 않았나.”

샤자한 공이 조금 부아가 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베흔이 이마를 탁 치며 대답했다.

“아아, 그렇지, 깜박 했습니다. 흠, 명색이 대군에 파예드 아카데미의 학장이니......무작정 잡아 죽일 수는 없고......당장 황제령으로 압송해서 재판을 열겠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빤한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재판이라니? 잡는 즉시 죽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는 말이야!”

샤자한 공이 언성을 높였지만 베흔은 짐짓 난처한 듯 딴청을 피우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바로 칼로 쳐 죽이겠다는 게 아니고 바로 재판을 열어 죽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젠장 재판이라니! 우리가 언제 그런 합의가 있었냐고!”

방금 코리온에게서 들었던 언질을 떠올린 샤자한 공이 얼굴을 잔뜩 붉히며 고함을 질렀지만 베흔은 여전히 뻔뻔스런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키는 이 근위대장 베흔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재판을 최대한 빨리 처리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전 볼일이 있어 이만,”

샤자한 공에게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인 베흔은 그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방향을 돌리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멀어져가는 베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샤자한 공이 이를 갈았다.

“서부가 절대 저놈과 손잡지 못할 다른 방책을 찾아야겠다.”

코리온의 덫에 걸려든 샤자한 공은 자신이 그 포로가 원하고 있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너무도 욕심이 컸다. 지금껏 손잡았던 그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그의 욕심은 이번엔 새 동지, 베흔의 선택을 조금씩 옥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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