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53화 (352/1,132)

< -- 353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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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인인 마하와 어린 딸 네페티를 데리고 아라무트를 찾은 바니샤드 플레렌 대공은 그날따라 기분이 꽤 좋았다. 바로 어제 사람들 눈을 피해 이곳에 도착한 그는 클수록 어머니를 닮아가는 이 인형같이 예쁜 딸을 바라볼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아버지랍시고 자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 손에 숨어 자라고 있는 딸에 대한 묘한 죄책감 또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3년 전, 막내아들 샤드니를 아이가 없던 동생 칼림에게 몰래 입양시킨 것 역시 가문 족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는 누나의 불쌍한 길을 되짚지 않게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책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로서는 하루빨리 저 악귀 같은 황제를 없애버리고 자신의 딸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망할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승리로 이끌어서 제국의 주도권을 두 손에 움켜쥐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너무 깊은 데 가지 마라.”

자그만 개울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기 시작한 딸 네페티에게 바니샤드 공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마하를 그대로 닮은 엷은 금발과 보석같이 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는 이 아홉 살배기 자그만 딸아이는 황제의 강압에 못 이겨 부인과 이혼했던 그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안 가요. 여기 있을게요. 아빠.”

아이가 입가에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아빠와 바깥에 나온 네페티는 기분이 잔뜩 들떴는지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 얕은 개울물에 신나게 발로 물장구를 치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서부에서도 가장 외지고 인적이 드문 이곳 아라무트 산악지대는 갖은 미신에 전설까지 판치는 극도로 폐쇄적인 곳이었다. 암살집단으로 더 유명한 사교(邪敎) 광신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곳은 명목상 서부 5제후 이스마엘 가의 영지이기는 했지만 제도권의 정치력은 그다지 미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정치 따위에 무신경한 그들 광신도들은 자신들을 조용히 눈감아주며 공생하고 있는 서부, 혹은 황실에서 특별히 의뢰를 받거나 자신들의 땅이 부당하게 침입당하지 않는 이상은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없었기에, 십여 명의 경호원들만을 데리고 이곳까지 나오면서도 바니샤드는 신변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깊은 곳은 없습니다. 깊어 봤자 무릎 정도입니다. 저희가 계속 보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경호대장이 딸아이만을 계속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바니샤드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물가에 내놓은 딸이 영 신경이 쓰이는지, 바니샤드는 그쪽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무슨 이상한 동물은 없는 거지?”

“기껏해야 송사리 정도가 고작이죠.”

“쟤도 모처럼 맘대로 놀게 놔둬요.”

지나치리만큼 이것저것 따져드는 바니샤드의 팔을 잡아끌며 마하가 웃음을 지었다. 냇물에 쭈그려 앉은 어린 네페티는 아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소라, 가재 같은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반 쯤 넋을 놓고 있었다.

“아이 잘 보고 있어.”

물가에 선 경호원에게 몇 번이고 확인을 받고 난 바니샤드는 그제서야 기다리고 있던 마하의 옆에 편히 드러누웠다. 그렇게 따뜻한 햇볕 밑에서 잠시 누워있던 그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깜박 잠들었던 바니샤드가 눈을 뜬 건 어린 네페티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기겁을 하고 일어난 바니샤드는 냇물 한중간에 어깨 위만 드러낸 채 무슨 이유엔지 계속 울고 있는 딸아이를 발견하고는 무작정 물에 뛰어들었다. 아이를 지키는 임무를 맡겨놓은 경호원 녀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네페티! 울지 마! 아빠가 가니까, 잠깐만 기다려! 응?”

깊지 않은 냇물을 가로질러 딸아이에게 달려간 바니샤드는 무슨 이유엔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딸에게 얼른 두 팔을 뻗었다. 어른 남자의 허벅지 정도 올 깊지 않은 물속에서 아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오들오들 떨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자, 아빠가 안아줄게.”

어린 딸의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은 바니샤드는 그 자그맣고 여린 몸이 바닥에 무언가로 단단히 묶여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순간 바니샤드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핏기까지도 싹 사라져버렸다.

“아악!”

무언가 물속에서 그의 발목을 거칠게 낚아채면서 미끄러운 바위를 딛고 위태롭게 서 있던 바니샤드는 그만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 다가온 예리한 칼날은 허우적거리며 급히 일어나려는 바니샤드의 목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베어버렸다.

“아빠......”

공포에 질린 어린 네페티의 작은 턱이 따닥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회색빛 위장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암살자는 물 밖으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냇물을 타고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다.

“하.....하.....학......”

의식을 더듬어 딸을 꽉 붙든 바니샤드의 몸부림은 의미 없는 마지막 숨소리로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홍색 피가 맑은 물살을 타고 딸 네페티를 감싸 돌았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바위에 묶인 네페티는 계속 울고 있었다. 사랑하던 딸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바니샤드의 청록색 아름다운 눈빛이 조금씩 탁해져갔다.

“아빠......아빠......”

9살의 이 어린 소녀는 아버지의 붉은 피 속에 몸을 담근 채 평생토록 절대 잊지 못할 그 끔찍한 최후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무력하게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150층으로 주페를 불러올린 황제는 어머니의 느닷없는 부름에 의아해하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니샤드 대공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던 황실은 그가 죽을 때 그의 전 부인 마하와 그를 빼닮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더 큰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세간의 관심이 암살사건 자체보다 바니샤드의 불륜에 온통 쏠리면서 정작 중요한 암살자의 정체에 관한 것은 도리어 뒤로 밀려나버렸다. 불륜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서부제후들과 플레렌 가에서도 ‘암살자가 누구냐’라는 문제를 감히 들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나 제국에서 가장 엄한 도덕률을 자랑하던 서부의 최고제후가 그런 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플레렌 가는 같은 서부 제후들의 치욕스런 비난을 그대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충격이 크겠구나.”

“어머님께서......국상을 인정해주셔서......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상복을 입은 채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아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었다.

바니샤드 대공의 불륜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황후위 박탈은 물론이고, 국상도 선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사방에서 들끓으면서 그의 아들로 알려졌던 ‘주페 플레렌 리쿠’ 태자 역시도 정치적으로 난감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전 부인과의 한순간의 실수 정도는 용서해줌이 마땅하다’며 도리어 죽은 바니샤드 공을 감싸고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황후위에 대한 예법대로 3년간의 국상과 황실 묘지 상위에 묻힐 권한까지 부여하고 스스로 공석에 상복을 입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의 이런 행보들은 ‘피에 굶주린 독재자’로만 알려졌던 그의 이미지를 ‘엄격하지만 속내는 따뜻한 지도자’로 각인시키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남겨진 어린 딸 네페티를 사생아가 아닌 공식적인 혼생자녀에 준해 인정해줄 것을 플레렌 가에 명하면서 이 너그러운 황제에 대한 제국민의 지지는 극적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내 가능하면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말씀하십시오.”

황제의 진지한 표정에 조금 긴장한 주페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바니샤드 대공이 네 친아버지가 아니더구나.”

순간 커져버린 주페의 큰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40년을 넘도록 바니샤드를 친아버지로 알고 대해 온 주페에게 이 사실이 어마어마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떨군 채 한참동안 말이 없던 주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분의 이번 사건 때문에 제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을 것을 걱정해 그런 거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닥치거라.”

황제가 얼굴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대공은 네 아버지가 아니다. 내 설마하니 자식의 유전자검사도 해 보지 않았을 줄 아느냐?”

황제의 말에도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품고 있던 주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분을 42년간 아버지로 알고 자랐으니 이제와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분을 제 아버지로 여기겠습니다.”

아들의 고집에 황제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자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널 자식취급하지도 않았어. 너도 다른 태자들처럼 1년만 상장을 하거라.”

황제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하지만 주페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전 3년간 상장을 하겠습니다. 제가 서부 파예드에 적을 두고 있으니 혼자 남은 네페티 역시 제 배다른 여동생삼아 돌보아주겠습니다.”

“이 답답한 것 같으니!”

황제가 고함을 버럭 질러버렸다.

“네 친아버지는 그때 하렘에 있던 라바니 세호다. 세호 가 종장 벨리크 세호 녀석의 남동생이다. 넌 주페 플레렌 리쿠가 아니라 주페 세호 리쿠야. 어쨌든 서부 혈통이기는 매한가지이니.....내 내외에도 그리 알릴 것이다.”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통고해버리고 돌아서는 황제에게 주페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러하오시면 소자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직접 찾아도 되겠습니까?”

주페의 물음에 움찔한 황제는 그 작은 눈을 씰룩거리며 아들을 째려보았다.

“어차피 소자 유전자를 채취해 검사해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사옵니다. 라바니 경이 진정 아버지시라면 세호 가 사람들과 제 혈통에 일치하는 것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들의 추궁에 갑자기 표정을 잠시 일그러뜨렸던 황제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품으며 대답했다.

“그럼 네 맘대로 해 보거라. 아무리 검색해도 네 생물학적인 아버지의 자료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니.”

“무슨......말씀이십니까?”

“라바니 경의 머리칼을 가서 얻어오든, 아직 묻지 않은 대공의 시체나 그 딸자식에게서 세포를 얻든 네 맘이다. 실컷 비교해 보거라. 어미인 나를 뺀 그 누가 네게 유전자를 물려줬는지 말이다.”

“......”

“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어쨌든, 넌 이제 주페 세호 리쿠니 그리 알고 있거라.”

묘한 웃음을 남긴 황제는 떨고 있는 아들을 남긴 채 침실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죽은 아버지 바니샤드의 뒤를 이어 새로운 서부 최고제후로 오른 브라코 발 플레렌 공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린 여동생 네페티를 자신의 친동생으로 플레렌 가의 족보에 올린 것이었다. 숙부 칼림에게 입양되었던 막내 샤드니도 데려올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자식이 없는 그 숙부를 생각해 그 아이는 샤드니 발 플레렌이 아닌,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으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간 친정인 발 가에 숨어 지내던 친모 마하 발 부인도 플레렌 가 종가 안에 아담한 별당을 따로 마련해 아직 어린 여동생을 키우며 함께 살게 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이 일가에 있어 최대의 비극이기도 했던 바니샤드의 죽음은 황제의 너그러운 용서 덕택에 그 딸이 세상에 얼굴을 떳떳이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서부 최고제후의 등장과 함께 전쟁의 양상도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남부를 제치고 스스로 제국의 주도권을 잡아야한다는 생각에 북부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식’ 공격을 계속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젊은 아들 브라코는 그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북부 하임달과 동부 탈라스에 무리하게 설치해놓았던 전진기지들과 정착민촌을 모두 철수시키고 총 25만에 달하는 병력을 요충지인 수베르에 모두 집결시켜버렸다. 그리고 그는 2차 혼란기 초기 결렬되었던 남부와의 연합군 형성을 다시 제안했고, ‘동부를 먼저 공격하자’는 남부의 핵심 요구사항을 전격 수용했다.

결국 2차 혼란기가 남-서부 연합군 대 북-동부 연합군간의 싸움으로 굳어진 건 전쟁이 시작되고 무려 3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동부에서는 3천 5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장에서, 혹은 학살과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갔고 소모전을 전개한 남부 역시도 누계 3백만 이상의 군인들이 전사하고 난 후였다. 물론 비슷한 숫자의 군인들을 잃은 서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다른 곳들에 비하면 가장 ‘멀쩡하게’ 남아있는 건 서부의 끊임없는 침략을 경계인 하임달과 탈라스에서 꿋꿋이 지켜난 북부 쪽이었다.

양 지역을 합쳐 총 35만의 대군을 결성한 남-서부연합군은 그때까지도 공방을 계속하던 요동으로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그에 대항해 북-동부연합군은 북부 최고제후 빌루이 카파키와 동부 최고제후 암바카이 슈트란을 공동사령관으로 삼아 27만의 연합병력으로 이에 맞서게 되었다. 10만의 북부 보병대를 주축으로 하는 17만의 보병은 오르마즈가 그 지휘를 맡았고 동부기병을 주축으로 하는 10만의 기병대는 암바카이의 차남 샤자한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최강의 전열을 완비한 양측은 이제 2차 혼란기의 백미로 꼽히는 요동-샤레이 공방전을 그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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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금 미쳐서 연참합니다........가 아니고, 수요일까지 다른 일이 있어 미리 올립니다.>

덧 : 연참하면 그 전회의 조회수와 추천수, 코멘트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도전하고자 합니다.ㅜ.ㅡ 혹시 압니까, 그 진리가 깨지면 이 뒤로도 종종 미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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