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56화 (355/1,132)

< -- 356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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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법무부가 있는 황궁 남쪽 별관에서 열린 이 ‘희대의 재판’에는 황실 종친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 제후가 사람들과 대사들, 유학자들까지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이 부근에 1만의 근위대 정규군 병력과 3천의 가디언들을 배치한 베흔은 느긋한 기분으로 오늘 벌어질 ‘쇼’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흔, 네 이놈, 네가 감히......”

사색이 다 된 레곤 대공주가 황실 종친 사람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시작 전부터 재판정 한쪽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코리온의 아버지인 부마 예르마크 경 역시  원수 같은 근위대장을 야속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 제4제후 세닉 가 군 사령관이기도 한 그로서는 남부의 피를 받았으면서도 남부를 버린 아들 코리온의 재판에서 부인 레곤 대공주처럼 마음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말없이 옆으로 돌아선 그의 눈동자에는 울분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애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유학자가 제 의견을 말한 게 도대체 뭐가 잘못이라고!”

예르마크 경은 악을 쓰듯 울고 있는 부인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 한쪽에서 귀찮은 듯 귀를 후비던 베흔은 재판정 한쪽의 문이 열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태자위이신 수우 플레렌 델루지 전하께서 드십니다.”

수우의 입장에 사람들은 누군가는 일어나기도, 다른 누군가는 무어라 불평을 늘어놓거나 대놓고 고개를 돌리는 등등 온통 제멋대로의 모습이었다. 북부대사들과, 그리고 평소에 북부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던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나란히 그대로 앉아있는 모습은 어쨌든 꽤나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 수우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동부제후들이 철천지원수인 남부제후들과 나란히 일어선 것 또한 기가 막힌 상황이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수우의 뒤를 이어 코리온에게 옆구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었던 제롬이 지팡이를 짚은 채 정실 오르테 부인과 나란히 들어섰다.

“죄인을 끌고 들어와라.”

수우의 지시에 반대편의 문이 열리자 몇몇 사람들이 일제히 탄식을 토해냈다. 눈가리개를 한 코리온이 두 명의 건장한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비틀거리며 끌려나오고 있었다. 조금은 여윈 얼굴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그의 매서운 얼굴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형식적인 변호인조차 거부한 그에게는 도움을 줄 그 누구도 곁에 없었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레곤 대공주가 결국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군 코리온 세닉 리쿠는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이라는 제국의 지도적 신분이면서도 반역의 수괴이며 황족을 사칭한 가디언 카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심지어 제국의 신성한 유학자들을 선동하기까지 하였으니 제국의 가장 악랄한 범죄인 역모죄에 해당함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간 조용해진 홀 안에는 레곤 대공주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둘째, 죄인은 남부 최고제후인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을 미리 치밀히 준비한 칼로서 살해하려 시도하였으니 살인미수죄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세째, 지난 9월, 파예드 아카데미 교내에서 43명의 유학자를 살해할 것을 직접 지시하였으니 살인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몇 유학자들이 갑자기 큭 하는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를 들으라는 듯 냈다. 남극성당에서 온 그들 개혁파 유학자들은 저들이 뜬금없이 지난번 2차 학란을 들고 나온 그 빤한 속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눈이 가리워져 있던 코리온이 턱을 붙들고 있던 가디언을 억지로 떨쳐내며 언성을 높였다.

“자칭 재판이라는 이 행각은 포고령 1차 추가령 1편 39조에 의거한 재판장 자격요건을 불비하였으며, 원문 제4편 5조에 의거한 정당한 변호기회를 박탈하였으며, 제5편 91조에 의거한 증거공시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니 무효임을 밝힌다. 너희에겐 나에 대한 재판권 자체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악을 쓰듯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리듬이 있는 평소의 아름다운 음성이 아니었다. 울부짖듯 소리치는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재판정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뭐, 뭐야.”

재판장을 맡은 수우는 저 유학자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조금 당황했는지 옆에 앉은 형 제롬의 눈치를 얼른 살폈다. 아리아노 경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놈! 내 증거를 댈 필요도 없이 네놈이 스스로 반역을 인정하는구나! 감히 공인된 장태자위이며 황제의 대리인인 수우 델루지 전하께 그런 언사를......”

아리아노 경의 반박은 그의 가는 목소리를 압도하며 쩌렁 울려 퍼진 코리온의 외침에 그대로 파묻혀버렸다.

“재판권에 대한 이의를 보류하고 밝히니, 카렐 장태자는 제국의 제위를 이을 정당한 후계자임을 학자인 나의 판단으로 밝혔으며, 제롬 공은 본인을 폭행하고 칼로 찔렀으니 정당한 방어행위를 한 것이며, 지난 9월의 일은 교내의 문제이니 학장인 내게 그 판단의 전권이 있을 것이다.”

“저, 저놈 입을 막지 못해!”

발끈 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제롬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하지만 그의 굵은 목소리로도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장내를 압도하며 포효하듯 소리치는 코리온의 목소리를 덮을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포고령 원문 제2편 299조에 의한 유효한 형사재판을 요청하니, 저 앞에 있는 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을 본인 코리온 세닉 리쿠에 대한 폭행 및 살인, 납치 미수로 고소하며, 근위대장 베흔을 남서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교사범으로 고소하며, 카렐 카파키 리쿠에 대한 제위 승계권을 부인한 이 사이비 재판부 전체를 포고령 원문 제1편 제2장에 의거한 역모죄로 고발하니......”

코리온의 등뒤로 달려든 근위대 병사 한 명이 그의 입에 거칠게 입마개를 채워버렸다.

“젠장, 독한 놈 같으니.”

기분이 적잖이 상한 아리아노 경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는 입마개가 채워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코리온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쏘아붙였다.

“이제 질문을 할 테니 죄인은 예 혹은 아니오로만 대답해라!”

“이런 엉터리 재판 집어 쳐라!”

서부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두겐을 선두로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난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청중석과 재판부 사이를 막아 선 근위대 병사들에게 집기를 집어던지고 먹물을 뿌리기 시작하면서 재판정은 순간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다행이군.”

아리아노 경이 히죽거리며 공소장을 읽기 시작했다. 갖은 증거자료들을 뒤적거리던 아리아노 경은 이런 요식행위 따위에 공소장이 쓸데없이 너무 길다고 내심 투덜거리며 별 성의 없이 읽어버리고는 재판장인 수우에게 올렸다. 유학자들과 근위대 병사들이 온통 뒤엉킨 이 난리통 속에서 코리온에 대한 고발내용은 재판장석 부근의 몇 사람들을 빼면 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듣는다고 달라질 일도 없겠지만.

“재판장의 권한으로 명한다. 소동을 일으키는 유학자들을 모두 쫓아내.”

형의 눈짓을 받은 수우가 양옆에 대기 중이던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손에손에 고무막대 하나씩을 든 가디언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루루 몰려들면서 청중석은 일시에 비명과 공포분위기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놀라 넘어지는 청중들을 무참하게 짓밟으며 돌진한 그들 가디언들은 경비병들과 몸싸움 중이던 유학자들의 머리를 가차없이 두들겨 자리에 쓰러뜨렸다.

“뭐 하는 짓이냐! 감히 제국의 유학자들을.......”

가디언 한 명의 멱살을 붙들려던 두겐 역시 고무막대에 머리를 얻어맞으며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난동을 부리던 50여명의 원리주의 유학자들은 채 10초도 되지 않을 눈 깜짝할 새 가디언들에게 짓밟혀 신음소리와 함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자리에 함께 있던 개혁파나 중도파 유학자들조차 경악을 감추치 못했다.

“제국이 유학의 나라이거늘.......”

일어서서 항의하려던 개혁파 유학자의 외침은 순식간에 재판정을 포위한 2백명이 넘는 정규군 병사들과 가디언의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결국 자그맣게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유학자들을 저러면.......”

조금은 겁에 질린 듯한 수우의 웅얼거림에 베흔이 냉큼 대꾸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귀찮게 상소나 올리고 듣기 싫은 잔소리나 실컷 해대다가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시 사그러드는 거 저 서생들의 습성이니까요. 지금껏 4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항상 그런 식이었죠.”

“별것도 아닌 입만 살은 것들이라니까.......”

너무도 간단하게 진압되어버린 그들 유학자의 난동에 제롬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툭툭 털었다. 난동을 피운 원리주의 학자들이 질질 끌려 나가면서 재판정 안은 최소한 겉으로는 조용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이상의 자료들을 인정하는가! 인정하면 고개를 끄덕여라!”

아리아노 라자루스 대신의 물음에 코리온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물론 무슨 자료들인지 듣지도 못한 코리온이었지만 어차피 막힌 입 때문에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팔에 수갑을 차고, 눈도 가려지고, 입마개까지 한 상태에서 코리온은 그 격한 호흡소리와 침묵만으로 자신의 격앙된 감정과 울분을 토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침묵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오니 전하께서 이자에게 그 모든 죄를 적용하며 당연히 사형을 선고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울 기운조차 잃어버린 대공주는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가까스로 숨소리만 이어나가고 잇었다.

탁자에 놓여있는 메모지를 얼른 살펴본 수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리아노 경에게 물었다.

“바, 반역죄에 해당하는 처벌이 어떤 것이 있는가?”

“포고령 원문 제1장 제2조에 의거, 반역죄는 사형에 처하되 그 방법은 책형, 사지 절단형, 화형, 생리박피형에 처할 수 있사오며, 그 구체적인 방법과 강도는 전하께서 임의로 정하실 수 있사옵니다! 이자는 그 죄질이 극히 흉악하오니 고려해주시옵소서!”

적어온 쪽지를 살펴본 수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는 코리온은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여전한 태도로 앉아있었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는 형 제롬과 베흔의 눈치를 다시 살핀 수우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모의 수괴 코리온 세닉 리쿠에게 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의 살인미수를 적용하여 50대의 태형에 처한다. 태형이 끝나면 역모죄를 적용하여 나무판에 못박아죽이되 그 형을 가중하여 사지에 쇠못이 아닌 나무말뚝을 박고, 발을 짚을 발판을 두며, 미리 찔러 상처를 내지 않고 최대한 서서히 죽일 것이다. 죽은 후에도 그 시체는 썩어 바람에 쓸려가고 벌레와 새가 갉아먹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황궁 앞 광장에 그대로 방치할 것이다.”

“뭐?”

끔찍한 형벌에 충격을 받은 레곤 대공주는 항의 따위는 할 새도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청중석은 황족들의 비명소리와 남, 동부 제후들의 박수소리, 북 서부제후들의 격한 항의의 외침으로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우가 조금 놀란 듯 얼른 말을 이었다.

“다만 저자가 그간 학계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면을 요청한다면.......참수형, 혹은 종신형으로 감해주는 은사를 베풀 것이다.”

“전하의 자비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수우에게 형식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 아리아노 경이 코리온의 뒤에 서 있는 병사에게 입마개를 풀라 눈짓을 보냈다.

“네 전하의 자비로운 은사를 귀에 들었을지니, 지금 당장 전하께 그간의 죄를 뉘우친다 한마디만 하거라. 그러면 전하께서 너의 죄를 크게 사면하실 것이니......”

거의 엉금엉금 기듯 피고인석까지 나온 레곤 대공주가 근위대 병사들을 제치고 아들에게 손을 뻗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코리온, 제발, 너도 저항할 만큼 했으니, 이젠 제발, 이 엄마를 봐서 사면을 빌어라, 응?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제발, 코리온, 이 천하에 불효막심한 자식아!”

어머니의 필사의 호소에도 말없이 턱를 악물고 있던 코리온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게 감히 뉘우치라 하는 저것은 도대체 뉘 집의 개 짖는 소리더냐?”

짐짓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코리온이었지만 아들의 그 맑던 목소리가 마치 울 듯 메어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의 눈을 가린 눈가리개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음을 뒤에서 버둥거리던 레곤 대공주는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220년 전, 철없던 시절에 이미 받았어야 할 형벌을 결국 그는 이제 다시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코리온!”

절망한 레곤 대공주는 그만 자리에 털썩 꿇어앉고 말았다. 수우는 눈앞의 유학자가 자신에게 언도된 끔찍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비조차 구하지 않자 충격을 받은 듯 멍 해져있었다. 유학자를 차라리 참수하자고 간청하는 자신에게 형과 베흔은 ‘지독하게 끔찍한 형벌을 언도하면 결국 사면을 청할 테니 그때 가서 종신형 정도로 낮춰주면 되지 않느냐’며 자신을 설득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수우는 자신이 결국 형과 베흔에게 또다시 농락당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죄인 코리온 세닉 리쿠에게 태형과 책형을 확정한다!”

아리아노 라자루스 대신의 큰 고함소리가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재판정을 싸늘하게 울렸다. 가디언들에게 다시 팔을 붙들린 코리온은 몇몇 유학자들의 악을 쓰는 고함소리와 레곤 대공주의 울부짖음,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온통 뒤엉켜버린 이 시끄러운 재판정에서 끌려 나가 황궁 지하 감방으로 다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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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을 줄 알았는데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길군요.;;;

<3차 출판(5.6권)의 예약을 개인 사정상 당초 예고보다 조금 늦은 14일경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예약공지를 그때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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