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57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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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산의 전투 이후 지리멸렬한 패퇴를 거듭하던 남-서부 연합군에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진 건 그들이 요동을 완전히 내주고 샤레이까지 후퇴하고 난 158년의 일이었다. 남부 최고제후 테번 델루지 공, 서부 최고제후 브라코 플레렌 공과 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장군을 불러낸 황제는 그들의 눈물을 쏙 뽑아놓을 정도의 폭언과 호통으로 사령부를 일시에 공포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누엘 델루지 네놈이 전쟁이 시작되고 양민만 수천만 잡아 죽인 것 말고 변변한 승전 한번 거둬본 일이 있느냐? 그런 놈이 사령관이라고 버티고 있으니 이 썩을놈의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 턱이 있냐는 말이다!”
황제의 고함소리에 마누엘은 고개만 푹 숙이고있을 뿐 제대로 된 변명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브라코 공이 쓸데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제 숙부이신 칼림 플레렌 장군께 새 사령관을......”
“그놈이라고 전쟁 내내 오르마즈에게 쫓겨 다니기만 했는데 그런 놈을 뭘 믿고 사령관을 맡겨!”
괜한 말로 황제의 호통만 벌어들인 브라코 공 역시 무안하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한참을 씩씩대던 황제가 그들 세 명을 비롯한 사령부 사람들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너희들 한심한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으니 근위대 X기병대 1천기를 보내주겠다. 1년 이내에 이 망할 전쟁을 끝맺지 못하면 너희 놈들 모가지가 남아나지 못할줄로 알아라.”
황제가 근위대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사령부 내에 잠시 기쁨의 분위기가 넘쳤다. 하지만 눈치 빠른 주페 태자는 어머니의 이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이미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설마.....”
눈을 부라리던 황제가 한참 기뻐하던 그들 지휘부에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놓았다.
“포고령에 제후군과 근위대의 연합군은 그 지휘를 황제 혹은 황손이 맡도록 되어 있으니 이제 그곳에 가 있는 내 아들 주페가 너희들의 총사령관이 될 것이다!”
황제의 단호한 선언에 깜짝 놀란 제후들과 지휘관들의 시선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황실 고문관’ 주페에게 일제히 쏟아졌다. 그리고 이제 전쟁은 막바지를 향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차례였다.
“우리 기병대는 아직 지난번 영성자산에서의 패배를 다 수습하지 못했고 적들의 10만 기병대는 아직 건재하다. 이곳 루사는 기병전에 천혜의 조건을 가진 곳이니 녀석들은 이번엔 기병대로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내 직접 우익의 기병대를 이끌겠다.”
단호하게 선언하는 주페의 황금빛 투구 위로 옅은 가랑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의 지평선까지 뻥 뚫린 이곳 루사 평원은 ‘바람의 군대’ 동부기병들에게는 가히 제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긴 창을 옆구리에 낀 주페는 뒤에 도열해 선 5만의 남부 중장기병대와 3만의 낙타병부대, 그리고 그들 중간에 정체를 감춘 채 대기 중인 근위대 X기병대쪽에 한번 시선을 주었다.
갑주도 전혀 입지 않은 채 붉은빛 비단전포와 창, 각자 잘 쓰는 무기 하나씩으로 무장한 GOE 기병대는 기마술을 배운 4세대와 5세대 X들로 이루어진 근위대 최강의 특수부대였다. 도보상태로도 정규군 기병 정도는 손쉽게 꺾어내는 막강한 X들에게 기동력과 높이를 부여할 말까지 주어졌으니 저들의 돌격을 상대할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대1 대결로 벌어질 이번 기병간의 전투에서 이들은 저 잘난 동부기병들에게 저승사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멀리 평원 반대편으로 정연하게 도열한 북-동부연합군의 모습이 보였다. 전열에 북부보병들을 엷게 배치한 그 모양만 보아서는 오르마즈가 이번엔 샤자한이 맡고 있는 양익 동부기병들에게 결판을 맡기려는 심산인 듯 싶어보였다.
“적 보병대를 무너뜨리는 건 포기한다.”
주페의 선언에 자존심이 상한 보병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장군이 대뜸 입가를 씰룩거렸다. 평소 입던 갑주 대신 회색빛 처음 보는 갑옷을 입고 낯선 말에 올라있던 그는 빗물에 젖은 은빛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일그러든 표정을 얼른 감추었다. 그의 표정을 못 본 척 주페가 명령을 계속했다.
“보병대 각진은 전통적인 방어태세로 적 장창보병의 돌격을 최대한 저지하기만 해라. 밀어붙일 필요는 없으니 위치만 사수해라. 기병대 쪽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대한 상태를 유지해라.”
“하지만 상대가 동부기병과 북부기병들이온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무어라 말하려던 주페는 적진과 아군진영 중간의 언덕으로 달려 나가는 한 무장의 모습에 조금은 침통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 어 저건 아침에 없어진 제 갑주하고 말.......”
당황한 마누엘 경이 지금 입고 있는 회색빛 갑옷을 바라보며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은빛 갑주와 주작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저 무장은 틀림없는 마누엘 델루지 장군의 모습이었다. 화를 버럭 내려는 마누엘을 가로막은 건 주페였다.
“놔둬라. 내가 시켰으니.”
“예에?”
남-서부 연합군 지휘관들의 아연 질색하는 얼굴이 일제히 이 뻔뻔하기까지 한 태자에게 쏠렸다.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주페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백만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여야 한다면 선택은 하나뿐이지. 목적이 옳다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 거다.”
창을 굳게 쥔 주페는 그 광경을 제대로 보려는 듯 앞으로 성큼 나섰다.
두 부대 사이로 뛰어오른 그 정체불명의 무장은 두 군대의 중앙에 있는 높은 언덕에 뛰어올라 쩌렁쩌렁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남부제후군 사령관이며 연합군 보병사령관인 마누엘 델루지 장군이다! 너희 겁쟁이 북부와 동부 놈들 중에 감히 나와 싸울 놈이 있으면 튀어나오도록 해라! 격이 맞는 놈만 받아준다!”
자신들의 사령관인 마누엘이 용감하게 일기투를 신청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남부 보병들이 평원이 떠나갈 듯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 들어 첫 일기투가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지난 패전으로 어딘지 시무룩해있던 남-서부 병사들의 분위기가 일제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사령관 주페 태자가 ‘가짜’ 일기투를 내보냈다는 것을 깨달은 마누엘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달간, 동부의 양민학살을 금지시키려는 주페와, 학살도 나름대로 전략이라며 버티는 마누엘 사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일로 남부에 잔뜩 감정이 상해있던 주페가 주도한 이번 사건은 마누엘에게 제대로 된 골탕을 먹이는 것이기도 했다.
그 때, 상대방인 북부보병대 쪽에서 갑자기 땅을 울릴 듯 거대한 함성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놈 참으로 방자한 놈이구나.”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오르마즈의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오르마즈가 상대로 나오자 주페는 조금 긴장한 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저, 행여 지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게. 오늘이 저자의 제삿날이 될 테니.”
주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혹스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누엘은 GOE 기병대 사령관인 하메스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고위급 X가 일개 시민에게 지기야 하겠는가?”
“지난번 내 손에 팔이 잘리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니.”
자신감에 비웃음까지 보인 오르마즈는 마누엘, 아니 마누엘의 갑주를 입고 있는 하메스타를 향해 창을 겨누며 절영에게 힘껏 박차를 가했다. 양쪽의 건장한 말이 주인을 싣고 상대를 향해 무섭게 돌진해 들어갔다.
“잘 걸렸다! 이놈!”
돌격해오는 오르마즈의 창을 힘껏 쳐낸 GOE사령관 하메스타는 곧바로 창을 올려쳐 오르마즈의 턱을 가격했다. 미처 예상도 못했던 엄청난 충격에 오르마즈는 하마터면 절영의 등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투구의 단단한 치크피스가 갈가리 찢겨 피와 함께 공중으로 솟구쳤다.
“네놈! 도대체 누구냐!”
급히 뒤로 물러난 오르마즈가 피로 물든 턱을 감싸쥐며 소리를 질렀다. 마누엘과는 첫 대결이 아닌 만큼 오르마즈는 그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쪽에 거의 팔뚝 길이만한 거대한 날이 붙은 검고 묵직한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오르마즈에게 다시 돌진해오는 저 정체불명의 무사는 틀림없이 마누엘 델루지 장군이 아니었다.
“정체를 밝히란 말이다!”
하메스타가 내리찍은 창을 가까스로 막아낸 오르마즈는 어깨에 가해지는 끔찍한 충격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네놈 X로구나!”
하메스타가 바로 되돌려 친 뒤쪽 작은 창날에 오르마즈의 날갯죽지가 명중하면서 한 무더기의 피가 다시 벌컥 솟구쳐 올랐다. 오르마즈의 등 갑주가 찢겨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창의 양끝을 모두 사용하는 이런 위력적인 공격은 오르마즈도 난생 처음보는 것이었다.
“이 비겁한 놈!”
속아 넘어간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오르마즈가 고함을 질렀지만 숨 쉴 틈도 없이 계속 몰아붙이는 적의 기세에 그는 정신조차 차릴 여유가 없었다. 미리 알았다면 준비라도 했겠지만 처음에 당한 얼굴과 어깨의 부상으로 그는 이미 저항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하메스타가 한 바퀴 돌린 창을 오르마즈를 향해 두 번째로 내리찍었다. 가까스로 창을 들어 막았지만 이번의 오르마즈는 그다지 운이 좋지를 못했다.
“아악!”
막으려던 창 중간이 볼썽사납게 동강나면서 그대로 내리쳐온 창날은 오르마즈의 왼쪽 견갑까지 박살냈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천하무적으로 알았던 오르마즈를 철저하게 유린하는 그 모습에 남부보병들이 마치 축제라도 만난 듯 엄청난 환호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왼쪽 어깨를 잔뜩 움츠린 오르마즈는 급한 대로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지만 저 위력적인 창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가랑비 속에서의 이 처절한 혈투는 점점 오르마즈에게 불리하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네놈, X가 갑주를 입었구나!”
성전 이전부터 이들 X들과 함께해온 오르마즈는 이들의 강점과 약점, 특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갑주를 입는다면 그 특유의 행동예측력과 예민한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도 물론이었다. 지금 이놈도 투구 속에 끼고 있는 스캐너 화면을 답답해하며 둔해져버린 다른 감각을 탓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빗물이 고인 더러운 진흙구덩이를 발견한 오르마즈가 갑자기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올 테면 와봐라!”
오르마즈가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한 하메스타는 급히 말에 박차를 가해 그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격렬히 쫓던 하메스타 역시 자신과 오르마즈---제국 제일의 명마라는 절영에 타고 있는---와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에 무언가 의심을 품을 만큼의 여유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몸을 바싹 낮춘 오르마즈는 말 등에 실려 있던 긴 역삼각형 방패를 집어 들고는 그 위아래를 뒤집어 진흙구덩이의 땅에 대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아나는 적의 해괴한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는 하메스타가 채 눈치를 채기도 전에, 방패로 훑어낸 진흙무더기를 쫓아오는 하메스타의 얼굴을 향해 힘껏 흩뿌렸다.
“앗!”
깜짝 놀란 하메스타가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들었지만 날아오는 진흙무더기에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투구에 온통 진흙을 뒤집어쓴 하메스타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창을 무작정 휘두르기 시작했다.
“걸렸다!”
말을 휙 돌린 오르마즈가 카타나를 치켜들고는 허우적거리는 하메스타를 향해 즉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메스타가 한손으로 사이트의 진흙을 급히 닦아냈을 때는 그의 X로서의 예민한 감각기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까지 이미 오르마즈가 다가와 있었다.
“이놈!”
오르마즈가 힘껏 올려친 카타나에 어깨와 목이 갈려나간 하메스타의 몸통은 말 뒤를 한 바퀴 굴러 안장에서 나동그라져 흙바닥에 처박혔다. 얼굴에 피와 진흙을 동시에 뒤집어쓴 오르마즈는 칼을 번쩍 치켜들며 악을 쓰듯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조금은 떳떳치 못한 이 승리에 환호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북부연합군 병사들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오르마즈는 쓰러진 하메스타의 시체에서 투구를 벗겨 공중에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있던 GOE사령관 하메스타의 모습에 오르마즈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놈들아! 이게 마누엘 델루지 사령관이냐? X에게 갑주를 입혀서 날 죽이려 했느냐! 어떡하냐! 나 오르마즈는 X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게 GOE사령관이건 뭐건 말이다! 보았느냐! 비겁자 마누엘 놈은 어딨느냐! 당장 내 눈앞에 나오지 못할까!”
순간 조용하던 북부보병대 쪽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솟구쳐 올랐다. 그 방법 여하를 떠나, 일기투로 일개 시민이 X를, 그것도 지휘관급을 꺾은 것은 누구도 상상못했던 일이었다.
“제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주페는 비틀거리며 다시 말로 돌아가는 오르마즈가 지금 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시고 뭐고, 이젠 따질 시간이 없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저자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전리품인 하메스타의 창을 질질 끌고 말로 돌아가던 오르마즈는 다리에서 힘이 풀린 듯 진흙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히얏!”
창을 번쩍 치켜든 주페는 쓰러진 오르마즈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기 시작했다.
“사령관님을 구해!”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에두 트라티누스 역시 쓰러진 오르마즈를 향해 적진에서 돌진해오는 주페와 적 근위기병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출혈로 기진맥진해 주저앉아버린 오르마즈의 귀에 말발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린 고개를 가까스로 가눈 오르마즈는 멀리서 달려오는 금빛 갑주 차림의 무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주, 주페......?”
절영의 고삐를 쥐고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던 오르마즈는 카타나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라 재촉하듯, 절영이 더러워진 주인의 얼굴을 계속 핥았지만 오르마즈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기 어려움을 깨달은 오르마즈는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네 이놈! 이제 끝이다!”
코앞까지 쳐온 주페의 창은 쓰러진 오르마즈의 얼굴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이런 비열한!”
오르마즈만을 바라보고 돌진하던 주페는 누군가가 무작정 집어던진 쇳덩이에 하마터면 어깨를 얻어맞을 뻔했다. 그의 방패를 때리고 옆으로 날아가 떨어진 건 웬 투구였다. 급한 나머지 투구라도 벗어 내던졌던 마에두는 주페가 움찔하는 새 사령관의 앞을 무작정 막아섰다.
“귀찮게 앞을 가로막다니!”
큰 포효와 함께 창을 치켜든 주페는 눈앞을 가로막는 적 근위기병에도 아랑곳없이 쓰러진 오르마즈에게 무작정 돌진했다. 그의 돌격을 막아보려던 북부 근위기병이 맞받아 창을 겨누었지만 몸을 반 바퀴 휙 돌리며 옆에서 찍어버리는 주페의 무시무시한 참격에 말 옆으로 볼썽사납게 미끄러졌다. 단 일격에 견갑과 어깨를 관통해 희생물의 목까지 뚫고 삐져나온 거대한 창날은 그 소름끼치는 위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맙소사!”
순간 얼어붙은 북부 근위기병들 대신 투구도 쓰지 않은 웬 동부 무장이 창을 들고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며 주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뭐 하나! 사령관님을 지키란 말이다!”
언뜻 보기에도 변변치 못한 창술로 무작정 덤벼드는 마에두의 모습에 주페는 순간 기가 찬 듯 창을 거두며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네깐 놈은 죽이기도 싫구나.”
주페가 후려친 주먹에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마에두는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진흙구덩이에 동댕이쳐졌다. 그런 그에 모습에 일제히 함성을 올린 십여명의 북부 근위기병들이 주페와 그를 따라온 남부 근위기병들에게 우루루 덤벼들었다. 오르마즈에게 다시 돌진하려던 주페는 귀찮을 정도로 덤벼드는 적 기병들에게 다시 앞을 가로막혀버렸다.
“사령관님, 사령관님,”
부서진 턱을 붙들고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마에두는 그때까지도 쓰러져 신음하던 오르마즈를 마구 흔들었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근위기병 두 명이 중상을 입은 오르마즈를 절영 위에 힘껏 올려 실었다. 주페의 무서운 용맹에 이미 열 명 가까운 근위기병들이 시체가 되어 이 더러운 진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빨리 사령부로 모셔! 빨리!”
근위기병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주페를 가로막고 있는 새, 오르마즈를 실은 절영은 급히 일선을 빠져나가 북부보병대 후방 사령부를 향해 달렸다. 말에서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던 오르마즈는 그때까지도 북부 근위기병과 격전을 벌이는 주페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어처구니없이 속은 억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수단조차 가리지 않는 냉혈한으로 자라난 젊은 태자의 실망스런 모습 때문인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제길!”
멀어져가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확인한 주페는 결국 그를 죽이기 위한 자신의 첫 번째 계획이 실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서부 연합군 우군 기병대로 급히 돌아온 주페는 그 즉시 일제돌격을 명령했다. 일기투로 흐뜨러져 버린 분위기를 붙들고 더 큰 혼란을 야기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맞은편에 대기하던 샤자한의 좌군 동부기병대 역시 이에 질세라 강력한 투창공격을 앞세우고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양측의 중군을 이룬 보병대 역시 상대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지만 양측의 선봉은 모두 기병대였다.
그날, 주페의 승부수는 남부 기사단이 투창공격을 이겨내고 막 난전을 개시하려는 그 찰나에 던져졌다. 100기 정도씩의 단위진형을 이룬 정체불명의 무서운 경장 창기병들이 금빛 갑주 차림의 주페를 앞세우고 남부 기병대 후미에서 불쑥 모습을 나타냈을 때만해도 이들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갑주도 입지 않은 이 고작 1천의 기병대는 웬만한 시민들로서는 감당조차 못할 길고 무거운 창으로 사방의 동부기병과 말들을 추수하듯 쓸어 넘기며 이미 난전이 벌어진 전장 중앙을 걷잡을 수없이 산산조각 내며 갈라냈다. 그리고 이들 하나하나가 조금 전 천하의 오르마즈조차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그 X임을 깨달은 순간, 4만의 기병대는 겨우 1천의 기병들 때문에 순식간에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겁내지 마라! 2명씩 짝을 이루어 공격해! 옆의 동료와 협공하면 이길 수 있단 말이다! 적의 숫자는 얼마 안된단 말이다!”
기병사령관 샤자한의 필사의 독려도 무색하게 중앙을 무력하게 돌파당해 버린 동부기병대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돌진해 들어온 서부 낙타병부대에 또다시 타격당하면서 손쓸 새도 없이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북부보병대는 이제야 남부보병들과의 격돌을 시작한 찰나였다. 바로 지난 영성자산 전투가 정반대로 재현되고 만 셈이었다.
“장군님, 나가시면 안 됩니다! 이 상태로는......”
후방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던 오르마즈는 좌군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닥치란 말이다,”
의무관을 억지로 밀어내고 갑주도 입지 않은 채 허둥지둥 말에 기어오른 오르마즈는 근위기병들만을 대동하고 급히 일선으로 달려 나갔다.
“보병예비대는 좌익의 기병대를 지원해라! 기병대가 무너지는 것을 어떡해서든 막아야 된다!“
오르마즈의 명령에 보병대 후미에 대기 중이던 1만의 북부장창보병 예비 병력이 좌익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잘 훈련된 보병의 기동력으로도 수십 스타디아 떨어진 반대편 좌군 전열까지의 이동은 잠깐 새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샤자한 슈트란 장군! 10분만 버티시오! 내 보병들이 측면를 막을 것이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어깨와 얼굴을 엄습하는 끔찍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오르마즈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진형이 갈가리 찢긴 채 일방적인 도륙을 당하고 있는 동부기병들은 거의 저항의지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샤자한 슈트란 장군은 어찌된 거야! 왜 답신이 돌아오지 않는 거냐?”
샤자한이 죽은 것이라 잠시 생각했던 오르마즈는 몇 명의 참모들만을 데리고 백마 조황비전을 급히 몰아 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나오고 있는 샤자한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지휘관이 도망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는 이곳에 있는 병사들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측면의 기병을 잃는다면 측면이 취약한 북부보병들의 운명도 말하나마나였다.
“이런......”
창백해진 오르마즈는 얼마 되지도 않는 X기병들에게 무참히 무너져버린 ‘바람의 군대’ 동부기병의 무력한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리고 자신의 부대는 설사 X들을 만나더라도 저렇게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을, 부하들보다 먼저 달아나버리는 샤자한의 뒤를 절대 밟지 않을 것임을 뼛속깊이 새기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퇴각! 퇴각!”
피를 토하듯 외치던 오르마즈는 결국 그 허약해진 몸에 울분을 이겨내지 못하며 정신을 잃고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기원 158년, 샤레이에서 있은 ‘루사의 결전’은 2차 혼란기의 개전 이래, ‘검은 사신’ 오르마즈가 처음으로 당한, 그리고 가장 처참한 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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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 이번 회는 왜이리 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