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1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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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에서의 패전으로 다시 요동으로 밀려난 북-동부연합군은 패전의 책임을 놓고 갑작스럽게 대두된 내분으로 또 한 번 홍역을 앓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어달라는 오르마즈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이탈해버린 기병사령관 샤자한의 행동을 놓고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북부와, ‘보병대의 지원군이 너무 늦은 때문이다’라며 반격해온 동부 사이에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감정싸움으로 두 지역 간의 골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요동으로 재침공해온 주페의 남-서부 연합군에 대항해 오르마즈의 부장 바스토프가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GOE 부대에 이어 새로 합성된 X-6세대들로 새로 구성된 2천여의 특수 보병대인 ‘가디언’ 부대까지 주페 휘하에 합류하면서 요동에서의 전황 역시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 전쟁에 가장 억울하게 휩쓸려 들어갔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가 된 동부가 황실에 먼저 ‘항복협상’을 제안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려 4천만이 넘는 막대한 인명손실에, 국토까지 황폐해져 회복불능의 지경까지 빠진 동부가 독자적으로 ‘항복협상’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아직까지는 나름대로 건재하던 북부에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협상을 놓고 의견대립이 벌어지면서 그나마 더 상해버린 양측의 감정은 결국 동부의 독자항복이라는 최악의 선택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더더욱 큰 문제는 그 항복이 북부 몰래 비밀리에 행해졌다는 것과, 영문도 모른 채 요동에 머물고 있던 북부연합군 지휘부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겠다는 암약이 포함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동맹군’인 암바카이 슈트란의 저녁초대를 받고 찾아갔던 북부 지휘부가 동부의 항복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건 만찬장소인 슈트란 가 별장이 이미 5백에 달하는 남-서부제후군과 근위대 가디언부대에 완전히 포위당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배신 사실에 뒤늦게 격노한 북부 근위중랑장 토로 로버넬은 별장의 동부병사들 50여명을 모조리 베어버렸지만 어차피 일은 벌어진 후였다. 망연한 표정의 종장 빌루이 카파키 옆에 꿇어앉은 로버넬 중랑장은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과 함께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놈은 어떡할까요?”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질질 끌고 온 건 영문도 모르고 오르마즈를 따라 이곳까지 온 부관 마에두였다. 고향 동부의 배신을 이제야 알게 된 그의 얼굴도 이미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떡하긴 어떡하나! 그냥 쳐 죽여 버려!”
언뜻 보기에도 전형적인 동부인인 마에두의 모습에 다시 발끈한 로버넬 중랑장이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희 동부를 제발 용서, 아니.......제발 이해해주십시오. 절 죽여 화가 풀리신다면 백번이라도 죽겠습니다. 제발, 동부 사람이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어 주시고 제발 절 죽여주십시오.”
엉망이 된 얼굴을 오르마즈의 발치에 기대며 마에두가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오르마즈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에두 부관은 그냥 기둥에 묶어 놔.”
“예? 이놈은 동부.......”
“이제와 동부 사람 하나를 더 죽인들 무슨 소용인가.”
“제발, 장군님, 절 죽여주십시오, 제가 이대로 어찌.......”
“묶어놓으라니까!”
오르마즈의 신경질 섞인 큰 목소리가 쩌렁 하며 별장 안을 울렸다. 오르마즈의 명령에 토로 로버넬 중랑장은 죽여 달라며 울부짖는 마에두를 연회장 한쪽 구석에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크지 않은 별장 연회장 안에는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마치 배경처럼 계속 울려 퍼졌다.
마에두를 묶어놓고 돌아온 로버넬 중랑장이 허리의 도끼를 쥐어 보이며 말했다.
“200기의 근위병들을 데려왔으니 앞장서 길을 뚫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그사이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나와 할아버님이 함께 도망칠 수는 없네. 로버넬 중랑장.”
깊은 한숨을 내쉰 오르마즈는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견고한 적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서부 장갑보병들과 남부 중장기병대,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들이 모여 만든 견고한 포위망은 기병 2백으로 뚫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직접 선 주페는 한참 전부터 계속 항복을 권유하면서 무어라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주페 태자가 저곳에 직접 나와 있네. 그게 가능하리라 보이는가.”
“하오나 사령관님! 두 분 모두 북부의 기둥이시니.......”
오르마즈는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할아버지 빌루이 카파키 공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군인이나 정치가라기보다는 성공한 사업가가 더 어울렸을 이 노인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힘겨운 눈물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적들이 내가 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오늘 참석자 명단을 넘겼다고 합니다.”
로버넬 중랑장은 기둥에 묶여 울고 있는 마에두를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오르마즈는 벽에 이마를 기대며 다시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면돌파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이쪽 정보를 다 쥐고 있을 저 용의주도한 적들을 기만하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하나같이 망연한 얼굴로 이 연회장에 서 있는 북부 근위병들의 모습을 빙 둘러보았다. 제대로 된 갑주나 무장도 없이 군복과 칼만 가지고 온 그들은 고작해야 방금 죽인 동부 병사들에게서 빼앗거나 이곳 별장 구석구석을 뒤쳐 찾아낸 창을 궁색하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운명이 정해졌음을 눈치 챈 그들은 곧이어 다가올 적들의 공격에 이미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내가 외모가 비슷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쓴웃음을 지은 오르마즈는 입고 있던 검은 군복을 벗기 시작했다. 아직 성치 않은 그의 어깨와 가슴, 얼굴에는 지난번 하메스타와의 대결에서 얻은 큰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할아버님께선 여기 주둔중인 우리 군대와 제후들을 데리고 빨리 퇴각해 북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군대와 최고지도자마저 잃는다면 우리 북부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항복할 때 하더라도 우리의 힘은 남겨두어야 합니다.”
오르마즈는 할아버지 빌루이 공에게 자신의 검은 망토와 군복, 무기까지 불쑥 내밀었다.
“이걸 입고 절영을 타십시오. 할아버님. 절영이라면 일단 돌파만 되면 다른 말이 따라붙지 못할 것입니다. 로버넬 중랑장, 자네는 할아버님을 모시고 근위병과 함께 나가게. 주페 태자가 지금 노리는 건 내가 아니고 할아버님일거야. 내가 할아버님을 가장해 뒷산으로 도망치면 나를 우선해 쫓을 테니 그 때 돌파해 달아나게. 내가 주페 태자와 적병들을 최대한 붙들고 있을 테니.”
할아버지가 입고 있던 푸른 비단포와 검은 머플러, 두건을 거의 빼앗듯이 벗겨낸 오르마즈는 그것들을 급히 자신의 몸에 걸치며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요동의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지어진 이 별장 뒤편으로는 제법 가파른 언덕이 자리잡고 서 있었다. 오르마즈에게 로버넬 중랑장이 애타게 말했다.
“장군님! 그러시면 차라리 제가......”
“어차피 자넨 외모가 너무 달라서 안 돼. 내 할아버님의 개인경호원 20명을 데리고 도보로 저 언덕으로 가겠네. 로버넬 중랑장, 할아버님을 부탁하네.”
멍한 표정의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절을 올린 오르마즈는 경호원들을 데리고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명령을 받은 토로 로버넬 장군 역시 머뭇거리는 빌루이 공을 거의 억지로 끌고나가기 시작했다. 별장에 홀로 남겨진 마에두의 제발 죽여 달라는 울음소리만이 그들의 뒤에서 허망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별장을 막 나서던 오르마즈는 벽에 걸려있던 짤막한 와키자시 앞에 문득 멈춰 섰다. 칼을 끌러 손끝으로 날을 확인해본 오르마즈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 칼을 품 속에 깊이 감추었다.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부장의 보고에 한숨을 내쉰 주페는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상대가 최고제후인 것을 생각해 명색이 태자이며 사령관인 자신이 몸소 나와 투항을 권고했지만 저 고집 센 북부 녀석들은 30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적들입니다!”
막 공격을 명하려던 주페는 별장 밖으로 나와 정면에 일렬로 말에 오르는 북부 근위병들의 모습에 탄식을 내뱉었다.
2백기의 북부 근위병들 중앙에 선 오르마즈의 명마 절영과 그 위에 앉은 큰 키의 사람은 그들 중에서도 높이에서 단연 두드러지고 있었다. 검은 망토 사이로 희미하나마 보이는 다갈색 머리칼과 흰 피부, 크고 날씬한 체형은 언뜻 보기에 틀림없는 오르마즈의 모습이었다.
별장 주변을 두리번거린 주페가 낮게 물었다.
“빌루이 공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안보입니다.”
“언덕 쪽을 살펴라, 손녀를 이용해 관심을 정면으로 돌려놓고 뒤로 도망을 시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마라.”
잔뜩 의심어린 표정의 주페는 별장 뒤 언덕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그쪽을 맡고 있는 소대장에게서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언덕 뒤편으로 야음을 틈타 달아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행색으로 보아 빌루이 공으로 보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말에 박차를 가한 주페가 오십여 호위기병들과 함께 주변을 빙 돌아 별장 뒤 언덕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빌루이 공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알았나!”
주페가 언덕을 향해 움직이기가 무섭게 별장 정면에 도열해 있던 2백여 근위병들 역시 포위부대를 향해 매섭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목표는 빌루이 공이다! 저쪽은 시간만 끌어! 위험하니 내가 올 때까지 오르마즈에겐 함부로 덤비지 마라! 알았나!”
언덕에 가까이 다가간 주페는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100명의 근위병, 가디언들과 함께 언덕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 앞서 도망치고 있는 ‘빌루이 공’은 수명개조 당대의 노구 때문인지 연신 비틀거리며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투항하시오! 빌루이 공! 내 어머님께 최대한 자비를 부탁드리겠소! 제발, 투항하시오!”
푸른 비단포에 푸른 망토를 뒤집어쓰고 어두컴컴해진 언덕을 허우적거리며 달려 올라가던 오르마즈는 주페가 자신의 뒤로 바싹 따라붙어오는 것이 확인되자 로버넬 장군에게 즉시 돌파 명령을 내렸다.
“이크,”
짐짓 돌부리에 걸린 듯 앞으로 넘어졌던 오르마즈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몇십보 앞에서 이들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수십의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그 체형이나 무기를 든 자세로 보아 X 혹은 가디언들이 틀림없었다.
“이런,”
오르마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뒤로는 주페가 직접 이끄는 100명이 넘는 적 근위병들이, 앞에는 가디언들이 그를 좁혀오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어, 어떡할까요? 장군님?”
여기까지 오르마즈를 따라온 경호원들의 표정 또한 공포로 일그러들어 있었다. 주페를 따르는 2백여 남-서부 병사들, 가디언들이 언덕 한쪽에 갇혀버린 오르마즈와 20여명의 경호원들을 둥그렇게 에워싸며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너희들은 이제 투항하도록 해라. 주페 태자는 포로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니.....”
오르마즈가 자신을 둘러싼 경호원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투항하라는 말에 당황한 경호대장이 오르마즈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이제 너희 역할은 다했다. 지금부터는 걸리적거릴 뿐이니 빨리 투항하라는 말이다. 명령이다.”
오르마즈의 단호한 명령에 그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떨구며 한쪽으로 천천히 비켜서기 시작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병사들을 헤치며 나타난 주페는 쓰고 있던 금빛 투구를 벗어 보이며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항하지 않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빌루이 공. 절대 해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어머님께서도 틀림없이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어둠 속에 말없이 선 푸른 망토의 ‘빌루이 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주페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제가 어머님께 직접 은사를 간청드릴 것이오니 이젠......”
“황상께서 정말 그러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태자저하?”
젊은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주페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다.
“오르마즈 카파키?”
그제야 속았음을 깨달은 주페는 급히 언덕 밑을 돌아보았다. 로버넬 장군이 호위하는 검은 망토차림의 무사는 살아남은 북부 근위기병들은 필사적인 보호를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고 있었다.
“이런!”
품 속에서 와키자시와 단검을 뽑아든 오르마즈가 잠시 한눈을 판 주페에게 달려들며 공격을 개시한 건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뽑아든 주페의 시미터와 오르마즈의 칼이 부딪히며 찢는 듯한 울림이 언덕에 퍼져나갔다. 태자가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 깜짝 놀란 가디언들이 오르마즈에게 달려들려 하자 주페가 급히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끼어들지 마라! 둘 간의 대결이다!”
“제발, 절 무사답게 죽게 해 주십시오!”
오르마즈가 거칠게 올려친 칼에 큰 충격을 받은 주페가 몇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지금껏 웬만한 황실 검술교사들, 심지어 하급 가디언들조차도 손쉽게 꺾어버리던 주페였지만 지금의 이 상대는 그들과는 수준부터가 달랐다. 그것도 손에 익은 칼이 아닌, 짤막한 와키자시와 왼손의 단검만으로 갑주와 방패로까지 중무장한 주페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딜 감히 태자에게!”
기회를 엿보던 주페는 오르마즈의 칼날이 자신의 견갑 위를 힘없이 튕겨 나가버린 틈을 타 방패를 앞세우고 오르마즈를 힘껏 들이받아 버렸다.
“우욱!”
살을 가려주는 것이라고는 알량한 비단포 한 장이 고작인 오르마즈는 주페의 방패에 돋은 요철에 팔과 가슴을 얻어맞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살이 찢겼는지 그곳의 가슴과 팔꿈치에 붉은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빨리 투항하시오! 카파키 장군! 내 저항하는 자는 무조건 죽인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신감을 얻은 주페가 비틀거리는 오르마즈에게 거칠게 칼을 내리쳤지만 몸을 재빨리 돌려 피한 오르마즈는 주페의 옆구리를 향해 다시 칼을 내질렀다. 그 날카로운 공격에 순간 아찔함까지 느꼈던 주페는 상대의 찌르기 공격이 다행히 단단한 갑주 위를 긁고 지나가버리자 다시 칼을 힘껏 올려쳤다. 주페의 예리한 시미터 날은 거듭된 공격실패로 약점을 드러낸 오르마즈의 오른쪽 가슴을 가로질러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허, 헉.....”
깊은 부상을 입은 오르마즈는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페의 암갈색 눈동자를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차분하던 주페의 눈빛은 싸움이 계속되면서 점점 흥분과 적개심으로 달아올라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오르마즈가 잔뜩 쉬어버린 힘겨운 목소리로 마치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하.......싸움이란 말입니다......”
“빨리 투항하라니까! 카파키 장군!”
격노한 주페의 호통에 다시 칼을 치켜든 오르마즈는 이번엔 주페의 목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칼을 내질렀다. 단검으로는 주페의 시미터를 쳐내며 온 몸을 내던져 급소로 내지르는 그 예리하고 위력적인 찌르기 공격은 틀림없이 함께 죽자는, 거의 광기서린 짓이었다. 주페가 급히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이놈!”
오르마즈의 칼끝은 주페의 방패 위쪽을 세차게 긁으며 그의 목젖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이정도 위력의 공격이라면 주페의 목을 가린 경갑 정도는 그대로 찢어버리며 목숨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순간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른 주페는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어, 엉?”
바닥에 주저앉았던 주페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자신을 향해 칼을 내지르던 오르마즈의 턱이 맥없이 걸려있었다. 자신이 오르마즈보다 먼저 공격을 성공시켰음을 깨달은 주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주페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오던 오르마즈의 와키자시는 경갑에 약간의 흠집만을 낸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주페는 가슴에 기대앉은 오르마즈가 극심한 고통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 욱......”
주페의 견갑 위로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오르마즈는 그 회색빛 아름다운 눈동자를 조금 움직여 주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의 잘난 용맹도 결국 내 손에 끝나는 건가, 카파키 장군.”
격한 흥분, 그리고 부하들 앞에서 자신을 망신에 가깝게 몰아친 이 적장에 대한 분노는 이미 주페의 판단력을 완전히 빼앗아버린 후였다. 오른팔에 힘을 준 주페는 오르마즈의 옆구리를 꿰뚫고 있던 자신의 시미터를 힘껏 뽑아냈다. 순간, 어마어마한 출혈과 함께 오르마즈의 입에서 단말마의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페는 바닥에 꿇어앉아있던 오르마즈의 얼굴을 힘껏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려버렸다. 감히 태자인 자신을 죽이겠다며 대든 자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다. 주페와의 싸움에 지고 쓰러져 죽어가는 오르마즈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감히 태자를 공격한 발칙함에 대한 대가다!”
주페는 쓰러진 오르마즈를 미친 듯 걷어차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걷어차인 오르마즈는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씩씩대던 주페는 칼을 공중에 번쩍 치켜들며 큰 함성을 내질렀다.
“내가 이겼다! 그 잘났다는 오르마즈를 내가 꺾었단 말이다! 다들 보았나!”
제국 최고의 전사라 손꼽히던 오르마즈를 주페가 1대1 대결로 쓰러뜨리는 모습에 그를 따라온 근위병들이 놀라움과 감탄을 연발하며 큰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반응에 더욱 더 흥분에 빠져든 주페가 칼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며 다시 함성을 내질렀다. 최강의 적수를 쓰러뜨렸다는, 무사로서의 절정의 순간이 그에게 펼쳐지고 있었다.
“내 마지막 자비다.”
눈에 핏발이 선 주페가 쓰러진 오르마즈의 목을 향해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눈동자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던 오르마즈가 입가에 갑자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뒤로 꺾어 순순히 목을 드러냈다.
“엉?”
팔에 막 힘을 주려던 주페는 팔꿈치부분 갑주의 금빛 도장과 코팅이 잔뜩 벗겨져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칼날이 깊게 베어 들어갔어야 할 흠집이 거의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주페는 발치에 떨어져있는 오르마즈의 ‘와키자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순간 넋 나간 듯 자리에 도로 꿇어앉은 주페는 쥐고 있던 시미터를 천천히 떨구며 그 칼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뭉툭하게 다듬어져있는 칼끝에 주페의 눈동자가 멎었다.
“이건......가검(假劍)?”
입을 쩍 벌린 주페는 잠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오르마즈가 들고 싸웠던 칼은 날이 없는, 장식용 가검이었다. 어깨와 옆구리, 그리고 목까지, 무려 3번이나 되는 정격에도 오르마즈의 칼이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진 주페는 오르마즈의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자신의 칼과 손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분에 휩싸인 자신이 마구 칼을 휘둘러댔음을 깨달은 주페는 쥐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는 쓰러진 오르마즈를 와락 껴안았다.
“왜......왜 이런 거요! 왜 이런 바보짓을 했냐고!”
주페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마즈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조금씩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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