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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62화 (361/1,132)

< -- 362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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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이끌고 북극을 직접 찾아온 카렐의 모습에 툰드라에서 살아돌아온 아메샤 스펜타 장병들과 가디언들이 큰 함성으로 답례하고 있었다. 두 손을 치켜들며 크게 박수를 쳐 보인 카렐은 그들의 군기가 마음에 드는지 입가가득 미소를 지었다. 어떤 병사들은 한때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오르마즈와 거의 쌍둥이처럼 꼭 빼닮은 그 모습에 놀라 ‘오르마즈’라는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북극 해안가의 숙영지에 다시 집결한 그들은 하급지휘관인 가디언들의 지휘하에 정연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피해가 어느 정도지?”

카렐의 질문에 케레사스 경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크샤트라 연대에서 501명 전사, 아르마이티 연대에서 544명 전사, 아메리타트 연대에서 647명 전사입니다. 경미한 부상자 3천명은 지금 영내에서 치료 중에 있고 1천1백명의 중상자들은 말씀하신대로 타르서스와 3번 도시의 의료시설로 옮겼습니다. 전사자 시신은 수습 중에 있습니다.”

“1천7백이나 죽다니......”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아 돌아온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케레사스 경이 말을 이었다.

“원리주의 지도자이신 리쿠 학장님께서 태자전하를 지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부에 거주하고 있는 나머지 민병대 출신, 그 후손들과 전역병들이 개별적으로 복귀가능성을 타진해오고 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그들을 다시 받아들여 전력보강을 꾀하고 싶습니다.”

“알겠네. 내 그대들에 대한 증강 지원방안을 최대한 강구해 보지.”

제국에서도 가장 종교적인 이들 민병대 출신들의 성향에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코리온의 지지가 여기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었다.

“북극지역을 이제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카렐이 지도를 가리키며 케레사스 경과, 휘하 연대장들에게 말했다.

“ㅤㅋㅞㄹ크와 트라이앵글, 타르서스에 이어서 북극까지 차지했으니 공권력 출입이 금지된 남극만 제외하면 이제 근위대가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건 프라임 지역과 수에니 반도뿐이네. 이제 위아래에서 조여들 수 있게 되었으니 중간에 낀 근위대도 꽤나 난감할 게야. 그리고......”

카렐이 말꼬리를 흐리자 제네르 역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렐의 시선이 줄곧 지도의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카렐의 다음번 목표는 확실했다.

동부제후들의 배신으로 탈라스에서 몰락 직전까지 갔던 카렐이 황제령에서 북극을 손에 넣고 재기했다는 소식은 눈 깜짝할 새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지난번 카렐을 배신했던 샤자한 공 일가였다.

“황제령의 각 지역들은 제후지역의 행성계 하나에 맞먹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싸쥔 샤자한 공이 함께 있던 손자 보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탈라스의 병영에 줄곧 머무르다가 오랜만에 종가에 돌아온 그는 아직까지도 동부와 서부 사이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저울질중인 남부와 근위대의 어정쩡한 태도에 잔뜩 불만이 쌓여있던 차였다. 하필 이런 와중에 들어온 달갑지 않은 소식에 그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학장 그놈 사형 집행일은 발표 났냐?”

“근위대는 아무래도 사형선고만 내려놓고 시간을 끌려는 속셈 같습니다.”

“그놈을 어떡해서든 죽여서 서부를 근위대와 완전히 떼어놔야 돼. 아니면 우리가 근위대에 버림받게 된다. 원리주의 유학자 놈들이 더 날뛰어대야 우리에겐 유리해. 서부제후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까.”

“그랬다가 샤드니 녀석이 카렐에게 붙으면요?”

“그러지는 못할걸. 뭔지 몰라도 샤드니 그놈 근위대장한테 코가 단단히 꿰여있는 것 같더군.”

샤자한 공이 어깨를 으쓱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보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다히르 숙부는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유배조치 했으니......이번일 끝날 때까지 그대로 놔둬야지.”

“듣자하니......황궁에서 ‘연락관’으로 다히르 숙부하고 네자드 형님을 파견해 달라 했다면서요?”

“큭,”

샤자한 공이 갑자기 잔뜩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말이 좋아 연락관이지 인질로 보내라는 거지 뭐겠냐?”

“어차피 유배조치 해두실 거면 그네들 요구대로 해주고 챙길 건 챙기는 게 좋지 않습니까?”

샤자한 공이 이 속 보이는 장손자를 살짝 째려보았다. 그간 장남인 아르군 계보는 군무와 외교에, 차남인 다히르 계보는 가문의 내치를 장악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번에 다히르 경이 실각하면서 그 계보의 가문 사람들 역시 대부분 요직에서 밀려나고 보벤을 정점으로 하는 아르군 계보가 내치까지 장악했지만 이 야심만만한 장손자는 이 기회에 아예 다히르 경의 세력 자체를 말려 죽이려 드는 것이 확실했다.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다. 지금 카렐 그놈한테 잡혀있는 네 여동생 이바카를 생각해. 지난번에 잘린 손목 돌아온 것도 못 봤냐?”

“이바카는 어차피......”

더 말하려던 보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보벤의 유일한 여동생인 이바카는 얼마 전 죽은 아버지 아르군 경 바로 밑에서 제후군 기병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만큼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사실 같은 날 죽은 자신의 아들 오르도 때문에 경황이 없던 그 와중에도 그는 다음날부로 최측근을 후임 기병사령관으로 삼아 동생의 돌아올 구멍을 막아버리는 기민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넌 그 애 손목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기를 원했겠지만 내겐 다 똑같은 손자손녀다.”

손자의 속셈을 잘 아는 샤자한 공의 독설이 그의 지나친 욕심을 일단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 역시도 둘째아들 다히르 부자를 근위대에 대한 카드로 써먹을 수 있다면 언제든 써먹을 생각이었다. 샤자한 공은 머릿속이 조금 복잡한지 사랑채 밖으로 천천히 나섰다.

이 거대한 종가 한쪽에서 불쑥 솟아오른 언덕 위의 사랑채에서는 종가 구석구석이 모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작은 연못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안쪽 별당을 바라보던 보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막내고모님과 수우 그놈 상견례 날짜가 잡혔다면서요?”

보벤이 가리킨 그곳에는 샤자한 공의 딸 3명이 모여앉아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페로 경하고 실리페 베로 황후가 수우 녀석의 정실이 될 라이 공주를 안내놓고 있으니. 정실 약혼도 안했는데 제1소실 먼저 약혼한다는 게 좀 웃기기는 하군.”

샤자한 공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별당 부근에서 언니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막내딸 구르베스를 바라보며 그도 무언가 가슴 한쪽이 답답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수우 그놈이 사생활에 문제가 많다는 게 사실이냐?”

“까놓고 말해 변태죠.”

보벤 경이 대놓고 털어놓자 샤자한 공이 또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에게 쉽게 질려버리는 스타일이라니까......눈 딱 감고 하루이틀만 보내면 고모도 그냥 황비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아예 건드리지를 않을 테니.”

마치 남의 일처럼 너무 쉽게 말해버리는 장손자에게 샤자한 공이 또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동부 8제후 나라 가 출신의 첫 부인에게서 난 아르군과 다히르를 제외하고 나머지 7명의 자녀들은 지금의 정실인 서부 출신 둘째 부인에게서 난 자녀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반쪽 고모’인데다가 나이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막내고모에게 보벤 경이 그다지 친근감을 많이 느끼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서부 하급제후인 아야톨라 가 출신의 지금의 정실부인과 결혼했던 300년 전만 해도 계급제도 없었고, 서부와 동부가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다. 당시에도 마하 발 부인과 함께 서부, 아니 제국 2대 절색으로 손꼽히던 알리아 아야톨라 부인이 슈트란 가 차남 샤자한과 결혼하겠다고 나섰을 때만 해도 남자가 너무 처진다며 부인 주변에서 뜯어말리던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승계권도 없었던 샤자한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어쩌다보니 최고제후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제후가 사이에서 금실 좋은 부부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언뜻 행복해 보이는 알리야 부인도 서부를 원수 취급하는 남편과 서부의 친정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온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부인에게 항상 미안했던 샤자한은 다른 최고제후들은 수십 명씩 거느리고 있는 첩도 공식적으로는 단 4명밖에 두고 있지 않았고 서자 역시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2차 혼란기 전만 해도 모든 게 안 이랬지.......”

문득 옛 일을 떠올린 샤자한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후들이 원치 않는 원수가 되었고, 서로서로의 지역에 한을 품게 되었던 그 모든 발단은 2차 혼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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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남-서부 연합군의 손아귀를 벗어난 빌루이 카파키 공은 자칫 고립되어 전멸당할 뻔했던 17만의 북부연합군을 데리고 북부로 일단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부가 이미 항복했고, 근위대까지 이미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북부 단독의 항전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결국 황실과 항복협상을 시작한 빌루이 공은 표면적으로는 ‘무조건’ 항복을 했지만 그 뒤로는 ‘기존 제후가들의 기득권과 군사력은 보장해준다’는 이면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잔혹한 황제는 항복문서 서명을 위해 황궁을 찾은 북부와 동부제후들을 전격적으로 체포했고, ‘기득권과 군사력 보장은 가문에 한정된 것이지 너희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다’라는, 황제 멋대로의 해석에 그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네가 무슨 일이냐, 주페.”

오늘의 ‘특별한 행사’를 위해 시녀들에게 몸단장을 받던 황제는 느닷없이 알현을 청한 아들의 모습을 쌀쌀맞게 내려보았다. 머플러도 없는 검은 무명포 차림에 초췌해진 그의 모습은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실 제일의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 오늘 나의 곁에서 옹위하라지 않았냐. 몸단장은 않고 그 꼴이 무엇이더냐.”

“그 분을 사랑하기는 하셨습니까?”

주페의 느닷없는 물음에 움찔한 황제는 방에 있던 시녀들과 근위대원들을 살짝 둘러보았다.

“모두 나가 있거라.”

황제의 명에 그들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하나 둘씩 비웠다. 아들과 단둘이 남은 황제는 사뭇 굳은 얼굴로 한참만에 입술을 떼었다.

“묻고 싶은 게 무엇이냐.”

“그분을 사랑하셨냐고 여쭈었습니다. 제게......칼을 쥐고 미쳐 날뛰던 제게 싸움이라는 게 무언지 목숨으로 가르쳐주려 하신 그 분 말입니다.”

눈을 치켜뜬 황제는 검은 카펫 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잠시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지배자란 원래 감정에 충실할 수는 없는 법이지.”

냉담하게 돌아선 황제는 옆에 놓인 체리 한 알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주페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천천히 치켜들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황제는 아직 덜 매어진 옷고름을 손수 매며 아들의 매서운 눈빛을 넌지시 피해버렸다.

“아니, 이게 더 정확하겠군요, 제 아버지는 몇 명입니까? 여자 둘 사이에서 남자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살짝 눈을 흘겼다.

“설마, 제 악몽처럼, 그 수백이나 되는 어머니 하렘의 갖은 남자들을 모두 한데 섞어서 만들어낸 괴물은 아니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전 누굽니까.......”

일구러든 주페의 입가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고였다.

“추하구나. 주페.”

황제가 옆에 놓인 조우관을 직접 머리에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말씀해주십시오. 그분을 사랑하기는 하셨습니까? 제가 어머니와 누군가와의 사랑의 결실이기는 한 겁니까? 아니면 실험실에서 어머니 입맛에 맞게 짜깁기된 유전자들의 덩어리에 불과한 겁니까?”

아들의 계속된 물음에 황제가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울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라. 네게 두 번째 성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그 한 명 뿐이니까.”

“그분을 사랑하셨냐고 여쭈었습니다! 제 손에 잡혀 와서 오늘 첫 번째로 처형될 그 분 말입니다!”

격앙된 주페가 품속에서 꺼낸 유전자 분석표를 바닥에 동댕이치며 악을 쓰듯 어머니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아들을 무시하며 황제는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막 문을 열기 직전 그때까지도 엎드려 울고 있던 아들을 살짝 째려보았다.

“일어나라, 주페 카파키 리쿠 태자. 다음 황제로서 내 세심히 낳고 키워 온 네가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쓰겠느냐.”

주페의 표정이 순간 조금씩 일그러들어갔다. ‘후계자’라는 말에 아들이 만족해주기를 바랐던지, 황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문을 확 열어젖혔다. 밖에 미리 대기하던 황실 대신들과 종친들이 방 안으로 우루루 몰려들어왔다.

바로 그때,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칼을 뽑아드는 날카로운 울림이 이 방 안을 울렸다.

“뭐냐!”

기겁을 한 근위대원들이 급히 황제의 주변을 빙 에워쌌다. 놀란 종친들과 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가운데, 한 손에 칼을 뽑아든 주페가 살기어린 눈을 치켜뜨며 어머니 황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놀란 황제의 커진 눈이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뭐하는 짓이냐! 감히!”

“소자를 더 이상 패륜아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폐하. 밖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저들은.......제발.......”

“당장 태자를 제 방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뭐하나!”

분노한 황제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절망 섞인 표정을 지은 주페는 들고 있던 칼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있던 시미터---주페가 사령관 임명과 함께 황제에게서 하사받았던---가 기둥에 요란스럽게 부딪히며 사방으로 깨져 흩어져버렸다.

“태자인 저 주페 리쿠는 앞으로 다시는 무기를 잡지 않고, 권력도 가지지 않으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할 것임을......제국민과 황실 분들께 선서합니다.”

튀어오른 칼 조각에 베인 주페의 뺨과 손등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뒤를 이을 제국 최고의 무장으로 꼽히던 주페의 갑작스런 선언에 황실 사람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거칠게 동댕이친 주페는 자리에 털썩 꿇어앉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못난 놈.”

아들을 무섭게 노려본 황제는 그대로 휙 돌아서며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그리고 황제의 일그러든 입가에서는 낮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네 황제에 오를 날을 위해 외척을 없애고 길을 닦아놓는 것임을 몰랐더냐......”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방에 홀로 남은 주페의 후회에 찬 울음소리가 잠시 후 벌어질 참혹한 학살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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