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65화 (364/1,132)

< -- 365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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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입니다.”

지하 11층의 어두컴컴한 감방에 갇혀있던 코리온은 식사를 들고온 근위대 병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리 예습을 철저히 받고 왔는지 그 병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코리온의 시선에 재빨리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늘은 유제품으로 특별히 준비했답니다.”

“고맙다.”

사실 이 감방 안에서의 대우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의 식성에 맞춰 채식으로만 차려진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제대로 차려 들어오고 있었고, 특별히 못된 구석 없어 보이는 저 경비병은 빨래, 청소 같은 잡일은 물론이고 매일 그가 목욕할 수 있도록 욕실을 비워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수염을 깎아주겠다며 면도기까지 가져왔지만 무슨 이유엔지 지금껏 코리온은 면도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저어,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요.......”

문 앞을 지키는 가디언들의 눈치를 힐끔 살핀 경비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여기 나가실 때에 입고계신 옷하고 물건들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나갈 때’라며 꽤나 완곡한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결국은 죽을 때 남는 물건들을 달라는 뜻이었다. 사형수의 유품이 별난 수집가들의 손에 비싸게 거래되거나 민간의 미신 섞인 비방에 사용된다는 것을 머리에 떠올린 코리온은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사형수들 역시 죽을 때까지 자신을 정성껏 돌보아준 간수나 경비병에게 기념할 물건 하나 정도씩을 남겨주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어쨌든 코리온 정도의 ‘어마어마한 중죄인’의 소지품이면 꽤 가치 있는 수집품이 될 터였다.

“내 다른 유품들은 가져갈 사람이 있으니......잠잘 때 입는 원피스를 주마.”

코리온은 한쪽 구석에 개어져있는 허름한 원피스를 가리켰다. 경비병은 그 정도면 대만족인지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건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

“그게요, 학장님이 신선같이 사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음탕한 짓도 평생 안하고 살아오셨고......그래서 바람둥이들 바로잡는 비방에 쓴다고......”

“푸훗,”

순간 기가 막혀진 코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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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의 코리온이 알고 있는 건 지금 있는 곳이 북부 바하칼리라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이 매일 해야 할 일이었다.

10년 전 가출 이후, 전쟁으로 시끌시끌하던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실 그는 크게 배를 곯거나 위험을 겪은 일은 없었다. 그는 어느 상황이든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했고, 유난히 큰 키과 어른스러운 말투는 그의 나이를 몇 살 정도 올려서 말하고 일거리를 구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일자리다운 일자리는 동부 탈라스에서 양몰이와 젖짜기를 거드는 인부로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 매일 받았던 2골드의 품삯이면 16살 소년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적지는 않은 돈이었다.

무슨 일이건 빨리 배우는 그는 같은 또래 소년들이 며칠은 걸려야 익숙해진다는 젖 짜는 일도 몇 시간 만에 손에 익혔고, 심지어 외부인들을 골탕먹이는 유목민 방언도 단 열흘만에 비슷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유목민 소년보다도 말을 잘 타는데다가 나이답지 않은 큰 키에 힘도 셌고, 예쁘장한 외모로 그곳 소녀부터 아줌마까지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젖을 짜고 버는 돈에, 고용주 사모님이 묘한 웃음과 함께 종종 찔러주던 적지 않은 용돈 정도면 매일 먹을 호밀떡과 치즈를 사기에 충분했고, 휴일마다 시내에 나가 나름대로 기분도 낼 수 있을 정도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직전 있던 곳도 시장이었다.

새로 들어왔다는 한 무리의 건장한 말들을 넋을 놓고 쳐다보던 그는 무언가 아찔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고, 그리고 정신을 차린 곳은 탈라스에서 진절머리 나도록 본 그 환한 태양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이 황량한 북부의 컴플렉스였다.

수십 개의 자동화된 매춘용 방들이 만들어져있는 제일 안쪽, 수금함도 없는 ‘특별실’이 그의 방이었고 주인에게 특별한 거금을 지불한 돈 많은 여자들 혹은 드물게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지난 3년간 이어져 온 그의 매일 일과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고 경비원들과 ‘용역’들에게 미친 듯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건 몽둥이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주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햇빛도 들지 않는 화려한 침실 안에서 이렇게 반 쯤 시든 화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방을 지키던 용역 녀석은 종종 그에게 ‘넌 팔자 좋은 놈이야’라고 놀리곤 했다. 사실 그는 다른 매춘부들처럼 밖에 나가 필사적으로 호객할 필요도 없었고, ‘단골’ 손님들은 그와의 잠자리를 위해 며칠을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많은 손님을 강제로 받게 하기 위해 포주가 그에게 주는 약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그는 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 기계적으로 관계를 가졌고, 손님들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래도 여자들은 그의 아름다움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에, 앵무새처럼 외워서 속삭이는 그 맑은 목소리에 열광했고, 기꺼이 단골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신음소리와 교성을 내지르는 그 많은 여자들을 보면서 수컷으로서의 본능 그 이상 아무 것도 느낀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포주는 꽤나 기분 좋은 듯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 네 덕에 이 짓도 그만 접을 수 있겠다.”

포주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코리온이 채 깨닫기도 전에, 용역은 그의 머리에 검은 자루를 씌웠고, 그는 그 뒤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난 지 2년 정도가 되어가는 어느 날, 급히 좀 와달라는 막내동생 레곤의 부탁에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을 골라 부랴부랴 황제령에 찾아온 주페는 자신을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듯 기쁘게 맞아주는 동생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잘 오셨어요, 오라버니.”

개척지 탐험가라는, 그다지 황손답지는 않은 별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 낙천적인 막내여동생은 남극성당에서 고거지학과 역사를 전공하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인 세나우스 2세를 꼭 빼닮은 성격에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탁월한 리더쉽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은 이녀석 특유의 그 낙천적인 성격도 가출해 행방불명된 맏아들 코리온의 이야기만 나오면 금방 우울함으로 돌변해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며칠 전인가, 죽은 줄로 알았던 그 골칫덩이 맏아들을 결국 찾아냈다고 알려온 레곤은 덩실덩실 춤을 추어도 부족할 이 시간에 웬일인지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 거냐?”

주페의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쉰 레곤은 오빠와 주치의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택 제일 안쪽의, 구석진 방 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레곤은 문을 두들기며 물었다.

“드, 들어가도 되니? 코리온?”

그 순간, 무언가 부딪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기겁을 한 레곤이 주페를 또 한 번 돌아보았다.

“내 직접 들어가 보지.”

레곤 대신 문을 천천히 열고 들어선 주페는 한쪽 구석에서 대뜸 날아온 필통을 한손으로 재빨리 받아버렸다. 필통이 날아온 그곳에는 아직 앳된 미소년, 아니 이젠 청년이라 불러도 됨직한 한 아이가 침대 위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 유난히 하얗고 깨끗한 피부, 균형잡힌 이목구비는 그 아버지인 예르마크 경을 꼭 빼닮은 잘생긴 모습이었다.

“네가 코리온이구나.......그새 정말 많이 자랐구나.”

주페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들은 척도 않은 코리온은 방 구석에 이마를 기대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탁한 두 눈은 무슨 이유엔지 끔찍할 정도로 충혈되어 있었고, 팔다리에는 군데군데 매를 맞은 것인지 자해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처자국이 온통 널려있었다. 주페가 얼핏 보기에도 이 아이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아이가 왜 이런 거지?”

주페의 질문에 주치의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단현상입니다.”

순간 깜짝 놀란 주페가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금단? 얘가 설마.......마약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주페의 질문에 레곤이 대신 대답했다.

“북부 바하칼리의 사창굴에서 2년이 넘게 혹사당했던 것 같아요.”

“사창굴?”

황당한 소식에 순간 경악한 주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시다시피 아이가 워낙 크고 잘생겨서......손님을 많이 받게 하려고 억지로 약을 먹였었나봐요.”

“혈액검사결과 다량의 환각제와 최음제가 검출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투여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심각한 약물중독상태입니다.”

무언가 중얼거리던 코리온은 이마로 벽을 연신 들이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침대의 담요든 벽이든 닥치는 대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하루에 2, 3명씩 손님을 받았다는데 저 몸이 온전히 배겨났겠냐구요......하는 짓까지 저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레곤이 눈물을 글썽이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한때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를 모으던 저 천재소년은 결국 스스로를 감당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모습이었다.

“금단현상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과 폭력적인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금단현상은 한달 정도 치료하면 많이 호전되겠지만......틈날 때마다 뭐라 중얼거리는데 저희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눈도 전혀 맞추려 하지 않고......혹시 정신착란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닌지 확인할래도 할 수가 없고......그래서 혹시 비슷하신 태자 저하께선 알아들으실까 싶어서......”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주페는 침대 구석에 쭈그려 앉은 코리온에게 바싹 다가가 앉았다. 그의 모습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코리온이 벽에 더 바싹 달라붙으며 계속 무어라 중얼거렸다.

“탈라스의 유목민 방언이구나.”

주페의 물음에 코리온은 그제야 정신없이 놀리던 입술을 딱 멈추었다.

“네가 9살 때 지은 ‘세학론’을 유목민 방언으로 번역했구나.”

코리온의 핏발선 시선은 처음으로 자신의 저서를 알아주는 이 숙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뺨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오는 이 다정한 숙부의 손을 거칠게 쳐내버렸다.

“그 와중에도 네 정체성을 지키려고 일부러 암송하고 있던 거냐.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말이다.”

“......”

“그렇게 네 자아 속에 파묻혀가고 있었구나.”

순간 그 흐릿하던 코리온의 눈에서 잠시나마 빛이 번득였다.

“제......책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요......”

코리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끔찍하게 망가져있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맑은 음색에 주페는 물론이고 어머니인 레곤조차도 깜짝 놀랐다. 눈동자를 떨군 코리온이 계속 중얼거렸다.

“난 혼자예요......난 내 책속에 고립된 미친 소년일 뿐이죠......”

“전 10권, 1권 유학론부터 10권 치학론까지, 학문적 방법론을 제시한 저서 중에서 수학적 논리를 그렇게 깊게 파고들어간 책은 처음이더구나. 유학만 공부한 사람에게 불확정한 통계적 알고리즘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다. 다음엔 책을 조금 쉽게 쓰는 법을 배우면 될거다. 이젠 그 해설집을 한번 써보도록 해라. 내 도와주마.”

주페를 희미하게 바라보는 코리온의 탁한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 돌아온 그가 누군가와 눈을 맞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코리온의 뺨에 다시 손을 뻗은 주페는 이번에도 그의 형식적인 저항에 부딪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처음보다 훨씬 약해진 코리온의 저항을 어렵지 않게 옆으로 쳐낸 주페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조카의 흰 뺨을 살짝 짚으며 그 따뜻한 체온을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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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이십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샤드니는 원로회 방침을 일방통고를 해온 양아버지 칼림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냉랭한 표정의 칼림은 발끈하는 이 양아들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제위경쟁을 포기하게 될 바에는 이 기회에 탈라스를 차지하고 근위대에서 최대한의 실속을 챙겨내는 게 중요하다. 학장을 살려내라는 무리한 요구로 받을 수 있는 것들까지 모두 놓칠 수는 없으니.”

“그렇게는 못합니다!”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샤드니가 뒤로 휙 돌아섰다. 이르티쉬 사막으로 허둥지둥 퇴각해온 7만의 서부연합군 병력은 지난번 키타이에서의 패전 이후로 변변한 전투한번 치러보지 못한 채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근위대에서 겨우 풀려난 이후 이곳 막사에서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샤드니는 지난 며칠간 코리온의 석방을 조건으로 근위대와 계속해서 접촉을 시도해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샤드니와는 상종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사이 양아버지가 근위대와 멋대로 묵인의 합의를 해버렸다는 데 격노한 샤드니는 눈가에 잔뜩 고인 눈물을 억지로 닦아내며 칼림을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가문 원로회의에서 어젯밤,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2제후 세호 가와 5제후 이스마엘 가에서도 동의했고 4제후 알리 경은 여기 와 있으니 너하고 얘기가 끝나는 대로 말해줄 예정이다.”

“알리 경은 학장님의 강력한 지지자입니다.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근위대가 응하지 않으면 학장은 어차피 죽는 건데?”

샤드니가 이를 꽉 악물었다. 자신 역시 꼭두각시 최고제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샤드니는 최고제후가 되고 싶다는 말에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코리온의 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두겐을 몰아내고 성급하게 최고제후에 올랐던 지난 행동을 이제야 후회하고 있었다. 코리온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두겐이 권력에서 밀려났고, 명색이 최고제후인 그 역시 양아버지를 통하지 않으면 가문 내에 변변한 친위세력이 없으니 플레렌 가 수뇌부에서 이제 코리온의 편을 들어줄 인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처형 집행일은 다음달 11일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남부연합군이 황제령에 진입할거다. 이곳에 주둔한 동부와 카렐 놈의 병력도 모두 황제령으로 돌아갈 테니 넌 그 사이를 놓치지 말고 탈라스를 장악하도록 해라.”

칼림은 원로회의 합의문을 던지고는 그대로 휙 돌아나가 버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샤드니는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막사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학장님......”

잠시 소리 없이 흐느끼던 샤드니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언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묻는 샤드니의 귀에 부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령에서 카렐.......녀석의 연락입니다. 최고제후님과 담판지을 일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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