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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67화 (366/1,132)

< -- 367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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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거울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렐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지난번 화상을 입으면서 짧게 깎았던 머리는 어깨까지 자라 있었고, 화상으로 물크러들었던 얼굴과 목도 그럭저럭 나아져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깨와 다리에 남아있는 큰 화상과 탈란의 투창에 찢겼던 허벅지 상처는 아직 완전치 못했다.

“이제 충분히 당당하십니다. 그 격에 맞으실 만큼.”

아메스가 카렐의 옆에 조용히 다가와 서며 말했다. 재생시술중인 왼손을 붕대 속에 감춘 아메스는 그의 허리를 한 번 꼭 안고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엔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카렐에게 주사를 놓아 준 모렌 박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알았네.”

“행여 작은 부상이라도 입으면 생명이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 부상을 연이어 당하셨습니다. 이젠 정말 한계까지 다다랐습니다. 절대 앞에 나서지 마시고 작은 상처라도 입지 않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코리온의 처형이 있기 전날인 10일 밤, 페로 관의 서쪽 안채에는 비장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를 대강 처치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카렐은 킵이 내민 무기를 받아들며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불편한 걸음으로 바닥을 디디며, 카렐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마루에서 먼저 기다리던 페로가 카렐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판이 자리에 꿇어앉으며 힘 있게 말했다. 서쪽 안채의 이 크지 않은 마당에는 100명 정도의, 특별히 추려 뽑은 작은 체구의 가디언들이 눈동자를 빛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이번 한 번의 사활을 건 선제공격을 위해 나누어준 특별한 복장이 한 벌씩 들려있었다.

“너희는 선발대일 뿐이다.”

페로가 자신의 가디언들을 돌아보며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일, 기원 417년 5월 11일을 후세 사람들은 제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날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 시작을 끊는 임무를 맡았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동료들과 전사단, 그리고 많은 세력들이 뒤를 따를 것이다.”

페로가 카렐에게 자리를 내주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내 시작부터 끝까지, 너희들을 직접 이끌고 지킬 것이니 내가 죽지 않을 것을 믿는다면 너희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카렐의 가라앉은 듯 침착한 한마디에 그들이 일제히 한 팔을 치켜들며 복종을 맹세했다. 마당에 내려 선 카렐은 한때 자신의 휘하에 있던 그들 100여명의 페로가디언들을 하나하나 품에 꽉 안아주었다. 조용하고도 엄숙한 이 출정식을 바라보며 페로가 긴장된 가슴을 가다듬었다.

그의 정치생명과 휘하의 그 많은 가디언들, 그리고 카렐의 목숨이 이제 내일 하루에 모두 결정될 터였다. 그동안 쌓아 온 그 모든 것이.

사형수의 특식을 거부하고 평소처럼 간단한 죽으로 이른 아침식사를 마친 코리온은 전날 경비병이 구해다준 두툼한 전쟁사 서적을 읽고 있었다.

“시끄러워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군.”

코리온이 천장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전날 밤, 지하 2층의 사형수 감방으로 옮겨진 그는 오늘 함께 처형될 50여명의 잡범들 한쪽의 자그만 독방에 갇혀있었다. 황궁 앞 광장에는 간만에 벌어지는 ‘큰 처형’을 구경하기 위한 구경꾼들이 어젯밤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느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전의 큰 처형들을 되짚어보면 오늘도 최소한 10만은 넘게 모일 터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 장사진을 치고 있으니 지하 2층의 감방이 쿵쿵 울려대고 있는 것도 이상한일은 아니었다.

코리온의 작은 탁자 위에는 그간 들여온 몇권의 책들과 머리빗, 붓과 종이 몇 장, 직접 종이를 겹겹이 붙여서 만든 자그만 책갈피까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부탁하신 옷입니다. 두겐이라는 분께서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경비병이 그의 앞에 검은 무명포와 용무늬 자주빛 머플러, 그리고 속에 받쳐입을 셔츠와 바지 등을 내려놓았다.

“자네 줄 물건은 탁자 위에 잘 싸 두었으니 가져가게나. 내 자그만 서화 하나를 넣어두었네. 가까운 유학자에게 물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려줄걸세.”

태연한 얼굴의 코리온이 읽고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경비병은 조금 쭈삣거리며 탁자 위의 잘 묶어놓은 꾸러미를 챙겨들었다.

“이젠 준비......하십시오. 이 상자에 남기실 물건들 넣어두시면 두겐이라는 분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눈이 휘둥그레진 코리온은 책의 마지막 보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을 모두 갈아입고 학모까지 단정하게 눌러쓴 그는 탁자 위의 소소한 물건들까지 꼼꼼히 모아 상자 안에 챙겨 넣었다.

“나갈 시간입니다!”

쿠베의 거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쾅쾅대며 울렸다. 봉인을 마친 상자를 경비병에게 넘겨준 코리온은 감방 문 앞에 섰다.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한 것인지 근위대 가디언들과 병사들이 나가는 길 양옆을 빽빽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파예드의 학장이며, 제국 유학자들의 지도자로 돌아간 그는 두 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그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형장으로 나아갔다.

황궁 앞 초승달모양 광장에는 거의 2층 높이의 계단모양 높은 단이 완성되어 있었다. 장갑을 차려입고 단 꼭대기 한쪽에 선 릴라크는 자신이 데려온 1백의 중장기병들이 단을 빙 둘러서있는 모양을 뭣 씹은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여간에, 팔자도 고약스럽긴,”

단 바로 밑에는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시위를 벌이던 2만이 넘는 유학자들이 제일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여전히 아우성을 쳐대고 있었다. 그도 명색이 유학자의 부인으로서 이런 광경이 보기에 썩 유쾌할 턱이 없었다. 죄다 고만고만한 이런저런 색깔의 무명포만 새벽부터 계속 보고 있다보니 이젠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건 물론이었고 가끔씩은 흰 무명포를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남편 루시도프의 얼굴과 헛갈리기까지 했다.

갑자기 터져 나오기 시작한 탄식소리에 릴라크는 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수백의 보병과 가디언들의 철통같은 경계를 받으며 몇 개의 철창이 안에서 밀려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주인공’인 코리온은 제일 끝의 철창에 갇혀있을 터였다.

잠시 후, 날카로운 톤의 나팔소리가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장태자위이신 수우 플레렌 델루지 전하께서 드십니다!”

가슴에 손을 가져간 릴라크가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대고 자리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물론 그의 입가에서는 이 행동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한마디가 빈정거리듯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제기랄,”

베흔과 형 제롬, 그리고 동부 참관인으로 함께 찾은 플로브 하크로딘 경을 동반하고 ‘개선로’를 따라 내려온 수우는 황제의 평복인 금빛 용포에 두 개의 긴 깃털이 달린 조우관을 쓰고 있었다. 복장에 따른 법도가 엄격한 제국에서 즉위식도 치르지 않은 지금의 수우가 입을 만한 복장은 절대 아니었다.

그의 등장에 유학자들이 큰 소리로 야유를 보내자 제롬이 대뜸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단 앞에 선 수우가 두 팔을 벌려보이며 더듬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오, 오늘은 제국 황실의 정통성을 부인하고.......선대황제 지명의 신성함을 거부한.......역적을 처단하는 역사적인 날이니......모두 기뻐할지어다!”

환호성과 야유소리가 뒤섞인, 꽤나 희한한 소란에 휩싸였던 광장은 첫 번째 철창에서 사형수 30여명이 끌려나오면서 다시 정적에 빠져들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그동안 처형을 미뤄두고 쌓아두었던 잡범 죄수들이었다. 오늘의 처형이 지금껏 있어온 다른 처형과 달리 ‘주연급’이 단 한명 뿐인지라 황제령과 남부에서 나온 그간의 잡범 사형수들까지 모두 모아 분위기를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황족이며 제국 최고의 유학자로 칭송받던 코리온을 이들 잡범들과 같은 수준으로 낮춰버린다는, 경멸적인 의미도 함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단 중앙에 거대한 돌 모루가 고정되면서 각자의 죄상이 불리운 이들 사형수들은 집행전문 황실 노예의 거대한 도끼날 밑에서 차례대로 목이 잘려나갔다. 크지않은 처형단 위는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이들 수십명의 끈적한 피로 범벅이 되면서 이곳 광장 일대에 마치 서곡과도 같은 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요동의 동부연합군은 30분 후 출범식을 가질 예정이라 합니다.”

자료를 가져온 라바니 경이 샤드니에게 보고를 올렸다. 키타이 사막의 기지 탈환을 위한 공격준비에 들어간 탈라스 이르티쉬 사막의 사령부에서는 이미 각종 자료들과 숙영지 조성에 썼던 막사, 보급품들을 수송선에 싣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알았소.”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샤드니는 하늘을 올려보며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라바니 경의 입가에는 ‘네놈은 기껏 한숨 쉬는 것밖에 못 하는구나’하는 경멸섞인 말이 맴돌고 있었다.

어제 도착한 4만의 추가병력 또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혼란사태를 막기 위해 오늘 코리온의 처형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는 병사들에게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조금씩 퍼져있는 건 사실이었다.

황제령에서야 지금 어떻게 돌아가든, 전투병 11만과 제국 제일의 엔지니어와 사역병부대 1만여를 포함해 총 12만의, 아니 종군 노예까지 포함하면 15만이 넘는 대군은 모든 출동준비를 거의 마쳐가고 있었다.

“이곳엔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마라.”

확인하듯 말한 샤드니는 제일 마지막으로 막사를 나서며 사령실이 있는 수송선에 휘하 지휘관들과 함께 올라탔다. 샤드니가 탄 수송선을 선두로, 11만의 대군을 태운 12대의 수송선이 황량한 탈라스의 누런 대지를 박차며 차례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샤드니의 조금은 허탈한 시선이 멀어져가는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수송선의 워프성능은?”

“88입니다.”

사르키스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라바니 경이 입을 열었다.

“워프라뇨? 키타이 사막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워프성능이 필요합니까?”

“다른 지역 수송선의 워프성능은?”

“동부는 70내외, 남부 것은 75정도입니다. 전사단은 이번에 북부에서 진수한 신형수송선을 대거 인수해서 우리와 비슷할 겁니다.”

“사령관님!”

라바니 경의 고함소리를 들은 척 만 척 한 샤드니가 인터폰을 작동시키며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황제령. 트라이앵글 지역에 상륙해 그곳에서 대기중인 코아 전사단 중장보병대, 발 가 병력과 합류한다.”

순간 경악한 라바니 경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뭡니까! 사령관님! 이게, 이건 항명.......”

“항명이라니? 서부 최고제후가 나 아니었나? 누가 누구에게 항명한다는 거지?”

눈을 부릅뜬 샤드니가 라바니 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함께 있던 하지즈 장군과 알리 샤디 경, 사르키스가 어느새 단호한 표정으로 샤드니의 뒤를 단단히 지키고 서 있었다.

샤드니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은 라바니 경이 호소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지금.......35만대군.......아니, 근위대까지 합치면 60만 대군과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카렐 그 망할 놈과 손잡고!”

“싫으면 서부로 돌아가게나. 나도 자넬 돌려보내는 걸 진지하게 고려중이었으니.”

샤드니의 손짓에 두 명의 근위병이 즉시 달려들어 라바니 경의 허리에서 무장을 벗겨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주지. 가디언 카렐, 아니 카렐 리쿠 군은 자네 아들인 주페 태자저하의 딸이라네. 자네에겐 손녀가 되겠군?”

“예에?”

순간 멍해져버린 라바니 경을 근위병들이 포박해 강제로 끌어내갔다. 다시 뒤로 돌아선 샤드니는 이 지긋지긋한 탈라스를 벗어나고 있는 12대의 서부 수송선단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 샤드니에게 개인적으로 연락 해 온 카렐의 첫마디는 ‘아버지의 일은 깨끗이 잊겠소.’였다. 코리온을 차지하기 위해 저지른 그 뼈저린 배신과,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걷잡을 수없이 불어나야만 했던 숱한 거짓말들, 악행을 카렐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언제든 떨쳐내야만 할 그 원죄를 뿌리부터 짚어낸 카렐은 주페의 딸로서, 그리고 친누나인 네페티 부인의 배우자로서 그 일에 관해 코리온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서건 샤드니를 철저히 보호해주겠다는 맹세를 해 주었던 터였다. 그리고 서부 최고제후를 누나 네페티에게 되돌려주고, 대신 황궁에서 많은 시간을 머무를 누나를 대리할 수 있는 서부 섭정공으로 임명해주는 것이 이번 담판에서 카렐이 그에게 제시한 조건이었다.

“발 가에서도 베나지 나하스 장군이 이끄는 3만의 병력이 방금 출발했다는 연락입니다.”

하지즈 장군의 보고에 샤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이단아 노릇을 해 오던 발 가까지 비로소 합류하면서 다시 한 덩어리가 된 서부는 이제 총 14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한때 그들의 지도자였던 주페의 딸, 카렐 카파키 리쿠를 지원할 준비를 마치고 황제령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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