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8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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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부제후군의 기지였던 키타이에 주둔한 만 5천의 남부 중장보병대는 자신을 곧 공격해올 서부연합군을 기다리며(?) 재빨리 퇴각할 수송선 손보는 것과 보급품 챙기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서부 놈들 옵니다.”
도망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플라칼 가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은 부장의 보고에 스캐너를 얼른 살폈다.
“왜 2대 뿐이야?”
“선발대인가보죠.”
“진짜, 제대로 공격같이 좀 해달라니까,”
짜증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케세크 경이 전군에 즉시 비상경계령을 발동시켰다.
그가 슈카른 계곡에 주둔중인 동부연합군에게 지원요청을 한 건 각본을 완벽히 하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녀석들이 준비를 갖추고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못되어도 1시간은 걸릴 테고, 자신들은 그 중간에 적당한 시간을 잡아 내빼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케세크의 명령을 받은 1만5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이 급히 쏟아져 나오며 기지 앞에 대오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에너지장벽하고 자기와이어는 어쩔까요?”
“켜지 말고 그냥 놔둬. 시설물 안 건드리고 내주기로 했으니. 동부 놈들한테는 지난번에 부서졌다고 거짓말해뒀으니까 괜찮아.”
무성의하게 대꾸한 케세크 경은 서부연합군의 문장이 선명한 2대의 최신형 수송선이 에너지장벽 영역 바로 안으로 들어와 내려서는 모습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5열! 레기온대형 방진!”
잘 훈련된 남부 중장보병들은 사령관의 명령에 일제히 대오를 정비하며 기지 동쪽에 정열해 섰다. 물론 퇴각하는 데 쓸 수송선을 착륙시킬 5스타디아 정도의 적당한 여유공간을 기지와의 사이에 남겨둔 상태였다. 어차피 서부연합군과는 퇴각행렬은 절대 공격하지 않기로 밀약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정렬!”
이런 각본을 알 리 없는 병사들과 장교들은 그들은 곧 돌격해 올 서부연합군들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뽀얗게 내려앉은 사막의 모래먼지 속에서 이쪽을 향해 몰려오는 시커먼 그림자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엉?”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케세크 경이 스코프를 벗고 눈을 부벼댔다. 하지만 서부 수송선에서 내려서서 1만 5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을 향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몰려들고 있는 건 서부연합군이 틀림없이 아니었다.
“저게 뭐야!”
케세크 경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스캐너를 살핀 부장이 거의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주, 중군에 3열의 북부보병 5천입니다! 그리고 기병이.......1만5천.......”
머리털이 바싹 곤두서버린 케세크 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서부 수송선을 타고 온 건 서부연합군이 아니고 기르기트에 주둔하고 있던 카렐의 동맹군이었다.
“젠장! 속았다!”
선봉에서 달려온 무려 5천의 탈라스 궁기병대와 5천의 경기병대가 기병은커녕 경보병의 지원조차도 받지 못하는 이들 중장보병들의 머리위에 햇빛을 가리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투창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익으로는 2천의 트라티누스 가와 눌레딘 가 중장기병들의 매서운 돌격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측면에 중장기병 2천, 북측면에 유목민 중기병 3천입니다!”
지금껏 바위 같은 강력한 조직력으로 승부하던 이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숫자와 비슷한, 순수한 기병만의 바람 같은 돌격에 그들 역시 걷잡을 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때 동부연합군의 별칭이었던 ‘바람의 군대’라는 그 이름값이 손색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퇴각! 퇴각!”
케세크 경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계획되어있던 거짓 퇴각이 아닌, 최악의 발악으로서의 퇴각이었다.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이대로 포위당한다면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맹군 정규 중장기병대와 유목민 중기병대를 맡은 가말라 카잔 장군이 큰 소리로 지시했다.
“셀림의 중기병대는 무조건 돌진해 적 후방부터 차단해라! 녀석들의 퇴로를 막아!”
기동병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굼뜬 중장보병은 이들의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슈카른 계곡에 남아있는 동부 지원군이 오기 전에 이들을 끝장내버려야 했다.
“적이 퇴각하지 못하게 계숙 뿌려라! 시간 여유를 둬선 안된다!”
카이두와 탈란이 지휘하는 궁기병대와 경기병대가 퇴각하려는 남부보병의 머리위에 투창세례를 퍼부으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퇴각하는 남부 중장보병들이 퇴로를 먼저 확보하느냐, 기병들이 이들의 뒤를 먼저 틀어막느냐의 시간의 대결이었다.
“진입합니다!”
셀림의 사투리섞인 거친 목소리에 기병대 지휘관들이 순간 환호성을 올렸다. 마갑을 입히지 않아 보통의 중장기병보다 속도가 빠른 이들 중기병들은 그 속도를 최대한 활용하며 적 후방으로 바람같이 몰아쳤다, 남부제후군들이 퇴각용 수송선을 착륙시키기 위해 남겨두었던 그 공간을 이들이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퇴로를 봉쇄당한 남부 중장보병들은 최악의 지경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기병대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모래먼지 속에서 그들은 몇십보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뭐냐고!!”
퇴로의 맨 앞에서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온 케세크 경이 가슴을 두들기며 탄식을 뱉어냈다. 후위에 있다가 기지 안으로 탈출해 들어온 병력은 1천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머지 1만4천 보병들은 동부기병들에게 사방이 둘러싸인 채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면이 열립니다!”
부장의 보고에 스코프를 작동시킨 케세크는 보병대 전방을 공격하던 적 경기병대가 갑자기 길을 열어주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자욱한 모래먼지 속에서 심장박동소리와 같은 정확한 템포로 울려 퍼져오는 그 규칙적인 진동소리는 케세크 경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일생일대 최악의 기억을 그대로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북부보병......입니다......”
모래먼지 속에서 나타난 검은 깃발이 그의 눈에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8열의 대오를 이룬 북부보병들의 손에는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긴 장창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긴 나팔소리와 함께 그 창은 뒤가 막혀버린 남부보병들의 심장을 향해 일제히 겨누어졌다. 기병들에게 완전포위당한 상태에서 피할 구멍 하나 없는 그 빽빽한 창끝을 코앞에 마주한 남부 보병들의 공포는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나마 진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는 건 이들이 그 유명한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이기 때문이었다.
“후위부대! 퇴로를 뚫어라! 빨리!”
입이 바싹바싹 마른 케세크 경이 악을 썼지만 현실성 없음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퇴각마저도 불가능해진 그로서는 슈카른 계곡에서 와 줄 동부연합군을 피 말리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1스타디아 정도까지 접근해온 북부보병들은 이미 눈앞의 먹잇감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던 4제후 나람 부인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이런 케세크 경의 기대마저도 산산조각내버렸다.
“돌격!”
중장기병대를 능가하는, 가공할 파괴력의 북부보병대의 일제돌격은 이미 ‘영성자산 전투’에서 증명된 바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같이 내리막길을 쳐내려오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맨몸으로 저 맹렬한 돌격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은 그때와 별반 다를 바도 없었다.
“남부 놈들이다!”
소름끼치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 북부보병들은 순식간에 쐐기꼴의 돌격진형을 만들며 빗발치는 투창 속에서 이미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남부보병대의 중앙과 거세게 충돌했다. 케세크 경은 순간 온몸이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마, 맙소사......”
2차 혼란기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직 젊은 케세크 경 부장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중앙부의 3열까지가 거의 동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중장보병대는 이미 두 토막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부대 단위에서는 무패를 자랑하던,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가 결국 무너져내리는 참혹한 순간이었다.
“남부 놈들이다! 동족을 죽인 남부 놈들이란 말이다!”
용병대장의 피맺힌 고함소리가 이미 눈에 불을 켜고 적을 도륙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를 메아리쳤다. 언제든 늘려 쓸 수 있는 장창을 등에 비스듬히 지고 손에는 도끼와 방패를 든 북부보병 후열병사들의 잔인한 도륙이 전열의 북부보병들에게 이미 한번 짓밟혀 쓰러진 남부병사들에게 가해졌다.
“무기를 버리면 살려준다! 대오를 빠져나와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어라! 태자전하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매서운 학살극의 와중에 기병들이 사방에서 외치고 다니는 함성소리가 남부보병들에게 실낱같은 살길과, 그때까지도 지켜오던 남부 중장보병으로서의 자존심을 맞바꾸라 유혹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보병들은 계속해 도끼에 머리가 깨어지고 창에 꿰어 죽어나갔다.
“안되겠다.”
대오가 완전히 무너진 중장보병들의 모습을 결국 눈앞에서 확인한 케세크 경은 눈물을 머금으며 뒤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전투 개시 후 채 30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제 상황을 수습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젠 집단투항 혹은 쐐기를 박는 학살극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단 가능한 부대만이라도 퇴각한다.”
자신을 따라온 1천여의 병사들과 함께 급히 수송선에 오른 케세크 경은 중장보병대를 두 토막낸 북부보병들 중 후열의 5백여명이 키타이 기지 안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에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들 중 적어도 1백명은 틀림없이 서부 엔지니어 녀석들---바로 이 키타이 기지를 세웠던---이었다. 북부보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듯 기지의 중요 시설들을 하나하나 점거해가기 시작했다.
“빨리 퇴각해라! 언제 자기와이어가 작동할지 몰라!”
파랗게 질린 케세크 경이 수송선 조종사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자기와이어를 이용해 서부를 곤경에 빠뜨렸던 남부가 이제 그 역공을 당하는 셈이었다. 이곳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케세크 자신도 적에게 포로로 잡혀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기지의 시설물들을 고스란히 넘겨준다는, 서부제후군과의 약속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두 물 건너간 일이었다.
진형이 무너진 채 뿔뿔이 흩어져버린 1만 4천의 보병들이 비명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케세크 경은 허둥지둥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가 이번 전쟁에서 중장보병대를 이끈 이래, 처음으로 당한 최악의 패배, 아니, 중장보병대의 전멸이라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도망치는 그의 등뒤로 북부보병들과 동맹군 기병들이 내지르는 의기양양한 승리의 함성이 사막을 뒤흔들었다.
키타이 기지의 주인이 또한번 바뀐 이 전투에서 무려 5천의 전사자와 9천여명의 포로가 나면서 주둔했던 남부보병대가 사실상 전멸했다는 소식은 비엔에서 출범식준비에 박차를 가하고있을 남부연합군 사령부에 카렐이 보내줄 첫 번째 ‘출범축하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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