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9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
.
.
단상을 여전히 지키고 서 있던 릴라크는 뒤에서 풍겨온 지독한 노린내에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흉악범 20명을 화형시키는 이 기분 나쁜 자리에 마치 얼굴마담처럼 자신의 모습을 들이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물론 더 불쾌한 일이었지만.
“나라면 이런 황궁에 안 산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릴라크는 자신보다 얼굴이 더 노래져 있는 수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저 유약해 보이는 청년이 잠시 전 단상 밑으로 잠시 ‘피해있던’ 것을 잘 알고있었다. 물론, 구경꾼들은 뭐 볼일이라도 보러 다녀온 줄로 알았겠지만 릴라크는 그가 그자리에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불꽃 속에서 미친 듯 발버둥치는 산 사람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놈이 더 이상하겠지만.
“빨리 치워.”
베흔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노예들이 단상의 화형대와 재들, 남은 유해들을 허둥지둥 치워내고 청소를 했다.
“포고령 원문 제1편 제2장의 역모죄로 태형과 책형을 선고받은 죄수 코리온 세닉 리쿠에 대한 형을 집행하겠다!”
셈의 큰 고함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열린 철창 안에서 검은 무명포와 보랏빛 머플러를 두른 코리온의 모습이 결국 나타나자 단하에 있던 2만이 넘는 유학자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곡을 하기 시작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의 코리온은 먼저 죽어가는 죄수들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 길지않은 시간동안 이미 탈진해버린 기색이 역력했다. 두 명의 병사들에게 팔을 붙들려 단 위로 올라오던 그는 다리의 힘이 빠졌는지 잠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유학자들의 통곡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코리온의 시선은 단 한쪽에 서 있던 릴라크와 잠시 마주쳤다. 이곳에 잡혀있는 동안 자라난 길지 않은 수염 때문인지 그의 날카로운 얼굴이 더욱더 강인해보였다.
“내 팔자야.”
비틀거리며 서 있는 코리온의 목젖이 파르르 떨리고 있음을 깨달은 릴라크는 차마 그를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은사를 청한다면 참수형으로 감해줄 것이라는 수우 전하의 말씀이 있었다!”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의 고함소리에 코리온이 맥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학자가 어찌 불의에 굴복하는 선례를 만든다는 말인가.”
거친 숨을 몰아쉰 코리온이 수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저놈 눈 가려!”
깜짝 놀란 베흔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급한 대로 더러운 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리려던 근위대 병사의 손을 릴라크가 거칠게 움켜잡았다. 단검을 뽑아 자신의 흰 비단 망토자락을 잘라낸 릴라크는 떨고 있는 코리온의 눈에 정성스럽게 감아주었다. 그는 이런 자신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리아노 부인---자신의 이모이기도 한---에게 한 번 씨익 웃어보였을 따름이었다.
“태형을 집행하겠다! 죄인의 상의를 벗겨!”
코리온에게 다가선 근위대 병사는 여느 유학자들에게 그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무명포와 머플러에서 오는 무서운 권위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용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대제학급 유학자를 이렇게 공개처형하는 건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코리온은 결국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학장님!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단하에 꿇어앉아 통곡하던 두겐 경이 바닥에 거칠게 머리를 찧어댔다. 마지막으로 셔츠까지 벗은 그의 어깨에는 그 신분과 어울리지 않음직한 참혹한 채찍자국들이 이미 가득 널려있었다. 코리온이 형틀에 묶이고 있는 동안, 그의 옷들은 밑에서 기다리던 두겐의 손에 전달되었다. 유학자들의 광기어린 통곡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릴라크는 내심 은근히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베흔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은사는 없다! 집행해라!”
제롬이 대신 던진 긴 채찍을 받아든 황궁 노예는 형틀에 묶인 코리온을 향해 있는힘껏 내질렀다.
“악!”
몇 방울의 피가 튀어 오르면서 코리온이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코리온의 눈가리개 밑으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목소리는 바로 옆에 선 릴라크 정도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곧......따라갑니다......”
참혹한 매질이 계속되면서 그의 등이 끔찍하리만큼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코리온은 이미 그 흉악한 근위대의 고문도 이겨냈던 사람답게 단 한 번도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거친 피눈물이 어느새 그의 목을 지나 솜털 하나 없는 가슴까지 흘러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바닥은 그의 붉은 피로 흥건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 개 씩 그의 등에 찢긴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제롬의 흐뭇함과 유학자들의 통곡소리는 커져만 갔다.
“50대! 끝났습니다!”
지친 노예가 채찍을 놓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의 죽을 지경에 가까운 태형을 당한 코리온은 고개도 가눌 수조차 없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형틀에 가까스로 기대 서 있었다. 그의 손과 허리를 묶은 고리를 끌러내자 결국 코리온은 바닥에 피를 뿌리며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유학자들이 갑자기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심상치 않은걸.......‘
얼굴을 찡그린 릴라크가 단상의 제롬과 수우, 베흔을 한 번 씩 바라보았다. 코리온이 순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면 그는 지금 크게 성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단하에서 이곳을 올려보는 유학자들의 절망어린 시선은 코리온의 태형과 함께 어느새 적개심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쓰러져있는 코리온에게 달려든 의사들이 그의 등에 난 상처를 급히 지혈하고 약물을 투여했다. 물론, 이 ‘흉악범’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닌, 책형에서 더 오랜 고통을 맛보라는 의미였다. 급히 당상으로 뛰쳐 올라간 릴라크가 베흔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은사를 내려서라도 빨리 끝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차후에 큰 정치적 부담이 되실 듯 하니.......”
“그래봤자 서생들이야.”
베흔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울고불고 날뛰다가 저놈 죽고 나면 상소문이야 왕창 써 올리겠지. 내려가면 눈가리개는 풀러내.”
더 이상 뭐라 말할 수도 없어진 릴라크는 하는 수없이 자기 위치로 돌아오고 말았다.
릴라크 역시 입만 살아있는 저들 나약한 서생들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일이 터지면 상소나 퍼부어대고 당장 세상이 뒤집어질 듯 난리를 치다가 시간이 지나 다른 이슈라도 생기면 그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 저들이었다. 사실 그들에겐 이제 저항을 주도할만한 ‘기폭제’ 역할의 투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로 해석하면 ‘기폭제’만 있다면 폭풍의 핵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만.
릴라크는 쓰러져있던 코리온의 얼굴에서 자신이 매 주었던 흰 눈가리개를 조심스럽게 끌러주었다. 긴 눈썹을 치켜뜬 코리온의 지친 시선이 잠시 릴라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처절한 표정에서 릴라크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하고 말았다.
“죄수의 책형을 집행한다!”
지혈을 위해 등에 드레싱을 댄 코리온의 사지를 병사들이 일제히 붙들었다. 그리고 마치 짐짝처럼 그를 들어올린 병사들은 흐느적거리는 이 큰 키의 유학자를 미리 준비된 거대한 목판 위에 눕혔다. 한 뼘이 넘는 길이의 굵은 나무못 4개를 가져온 병사들이 그것들을 코리온의 머리맡에 늘어놓았다. 갑자기 온몸을 떨기 시작한 코리온이 자신을 올려보며 통곡하고 있는 단하의 유학자들을 애타게 내려보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사랑하되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 나의 사랑에 부족함이 없는지 살필 지어다. 행함이 있으되 얻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에 대한 나 자신을 반성하라. 내가 올바를 진데 천하가 모두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온 릴라크는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의사가 코리온의 몸에 못을 박을 곳을 표시하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병사 한 명이 뾰족하게 깎아 쇠징을 댄 나무못 끝을 어깨 한쪽에 대자 옆에 서 있던 거구의 노예가 큰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시초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시초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시초요, 옳고 그르게 여기는 마음은 지(智)의 시초이니.......”
눈을 감은 채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리던 코리온의 어깨를 향해 큰 망치가 내리꽂혔다. 순간, 코리온의 그 곱던 목소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악!”
“제기랄,”
눈을 감고 있던 릴라크가 움찔 하며 또다시 욕을 뱉어냈다. 어깨에 나무말뚝이 박힌 코리온이 미친 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4개나 되는 나무말뚝이 급소만을 피해 코리온의 양 어깨와 허벅지의 살에 차례대로 박히고 있었다. 단하의 유학자들 중 몇이 결국 까무러쳐 실려 나가기 시작했지만 이 참혹한 망치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단상의 수우는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발판까지 댄 거대한 나무판 위에는 이 불쌍한 유학자가 거친 신음을 토해내며 ‘박혀’ 있었다. 그 당당하던 코리온도 고통을 더 이상 이겨낼 수 없는지 계속 비명과 신음을 번갈아 토해내고 있었다.
“세워,”
입가에 연신 미소를 띠고 있던 제롬이 손짓을 보내자 20여명의 건장한 근위대 병사들이 양쪽에서 밧줄을 붙들고 사람 키의 3배는 됨직한 이 높은 목판을 천천히 세우기 시작했다.
바로 220년 전, 코리온이 받기로 예정되어있던 목판책형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코리온의 모습이 이곳에 운집한 10만명이 넘는 구경꾼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단하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당하고 있는 끔찍한 운명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구경꾼무리 한복판에 카렐과 함께 서 있던 자이납은 옆에 선 자신의 주군이 지금 인내의 한계까지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단히 움켜쥔 카렐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자이납은 그가 왜 아직까지 저 끔찍한 책형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심 유학자들이 스스로 동요해주기를 기다리던 카렐은 저 한심한 서생들이 기껏해야 통곡이나 해대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넘어서 이젠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고 있던 카렐은 또 한 번 들려온 코리온의 거친 신음소리에 결국 턱을 치켜들었다. 잠시 적개심으로까지 치달았던 유학자들의 분노는 다시 자포자기의 상태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 큰 키를 감추기 위해 쭈그리고 있던 카렐이 천천히 몸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전하. 왜 그러십니까,”
당황한 자이납이 급히 카렐의 손을 붙들었지만 카렐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까지 벗어 내리며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비켜라, 이 무능한 서생들아!”
카렐은 유학자들을 거칠게 헤치며 홀로 처형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카렐의 모습은 이 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확 들어왔다.
순간, 그의 모습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흩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