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73 회: 혈맥 제1부가 끝났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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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0년, ‘두 번째 대멸망’으로 혼돈에 빠졌던 콜로니를 바로잡고자 시조 타리프 카파키는 그 오만한 사교에 대항한 길고도 힘든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기원 52년, 그의 증손녀 ‘은빛 오팔’ 오르마즈가 사교를 무너뜨리니 이는 가문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용맹함과 그레이오팔의 신성함이었으며,
기원 417년의 오늘, 오르마즈의 손녀이며 조카, 그리고 카파키 가의 중시조이신 세나우스 4세 ‘핏빛 오팔’ 카렐 대제께서 혼돈의 제국을 칼로써 제압하시니 이 역시 조상의 진한 피와 그레이오팔의 은총이었으니.
그레이오팔, 이 신성한 눈동자에 대한 경외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 축복받은 눈동자를 간직했던 모두가 그 빼어남이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범접치 못할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선택받은 신성한 혈통, 카파키 가의 일원이었으며, 이제 제국의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리쿠 가와 만나 그 완벽함을 이루었도다.
카파키 가 종손
남극성당 수찬, 태자 주페 카파키 리쿠,
파예드 아카데미 수찬, 군(君) 마리안 카파키 리쿠
- 매년 5월 11일, 재건일 기념행사 中 카파키 가에 대한 추도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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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417년 5월 11일의 하늘은 황궁을 뒤흔든 그 엄청난 소요사태를 비웃듯 구름 하나 없는 맑고 청명한 모습이었다.
“피바람 몰아치기는 딱 좋은 곳이군.”
황도의 동문 앞, 거대한 누대에 선 총리대신 페로 자이센은 드넓은 황무지가 펼쳐져 있는 성벽 바깥쪽을 내려다보며 평소의 그 냉소적인 말투 그대로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렸다. 세나우스 2세 시절, 황궁 방어목적을 위해 모든 주택을 강제철거하고 깨끗하게 소개된 이후로 성벽 앞 500스타디아에 달하는 영역은 이렇게 민간인이 거주할 수 없는 제한구역으로 묶어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이곳 황도에서 도망치는 수천의 거대한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저렇게 다 내보내도 되는 겁니까?”
함께 있던 시로의 질문에 페로가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나갈 놈들은 다 나가라고 해. 저네들이 대신 싸워줄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남을 놈들은 또 남을 테니까. 아샤 연대는?”
“지시하신대로 내부 치안유지중입니다. 그리고 대관식 준비도 그네들이 하고 있습니다.”
페로는 등 뒤로 보이는 드높은 황궁을 문득 돌아보았다. 카렐의 명에 의해 오늘부터 ‘아케메니안 궁’으로 불릴 저곳도 대관식을 대비해 한참 단장중에 있었다.
즉위를 선언한 직후, 결국 자리에 쓰러진 카렐은 상황을 직접 수습할 형편이 되지 못했고, 그 책임은 이제 고스란히 페로의 몫이었다. 그에게는 황도, 아니 새 황제가 즉위하는 오늘부터 아케메니안 시로 불릴 이곳을 오늘 저녁까지 정상화시키라는, 조금은 무리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유학자들과 이곳에 와 있는 다른 도시 시민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도시 성문을 완전개방했고, 슈로 기사단, 아샤 연대에는 도시에 치안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쓰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 성문을 개방한 덕에 나갈 수 있게 된 사람 중에는 외지인들 말고도 곧 닥칠 전쟁을 피해 조금 더 안전한 인근 도시로 떠나는 피난행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황도가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다른 도시권역과 통하는 6곳의 도로는 이미 폐쇄되었고, 교량과 터널까지도 전사단 기동병력들에 의해 모두 폐쇄된 상태였다. 1, 3번 도시, 타르서스, 트라이앵글 지역의 격벽식 방어체계도 이미 작동된 상태였고, 일체의 항공운송 수단은 최소한 해당 권역 안에서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고철덩이에 불과했으니 도로가 폐쇄되었다면 딱히 도망갈 곳도 마땅치 않은 셈이었다.
물론 황도 밖에도 1번 도시권역에 속하는 많은 소도시들과 마을들이 있기는 했지만 괜히 자리 잘못 잡았다가 곧 반격해 올 30만이 넘는 남-동부연합군의 행군로와 운없이 만나기라도 한다면 무슨 흉한 꼴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것 외에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서, 이곳의 일반 관료들에게도 ‘평소처럼 일하라’는 훈령이 전달되었고, 시장이나 다른 공공시설들도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열고 있으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있었다.
사실 페로의 관심은 오늘 저녁 9시, 황실 대강당 아스트라이아 홀에서 열릴 예정인 세나우스 4세, 카렐 황제의 대관식에 더 쏠려있었다. 황궁을 접수하고 겨우 10시간 만에 급히 열리는 대관식이니만큼 사람들은 선대 세나우스 3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날림 대관식‘이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의 용의주도함에 그들의 걱정 정도는 쉽사리 기우가 되어버렸다.
북부와 서부, 동부의 카렐을 지지하는 제후들은 코리온의 처형이 있을 무렵인, 오늘 아침에 이미 각자의 영지에서 황제령을 향해 길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보벤의 뒤를 이어 페로의 수석 보좌관이 된 볼토 트라우제는 황실에서 처음 맡은 ‘황제 대관식 준비’라는 엄청난 임무를 상인출신다운 기민함으로 거뜬히 해치워 놓은 상태였다.
그는 대관식 일정이 공식 발표되기가 무섭게 이미 만들어두었던 황제와 황실 가족들의 대례복은 물론이었고 아스트라이아 홀 치장과 대관식 스텝들의 복장과 각종 준비물들까지, 이미 몇 달간 준비한 듯 즉시 일반에 공개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조만간 평민출신 황실대신 한 명 나오겠군.’하는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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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58년, 카파키 가 종장 부자의 끔찍한 처형과 오르마즈의 태형을 끝으로 2차 혼란기를 마무리한 남부와 서부에게 이제 남은 일은 고대하던 계급제를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몇몇 세부사항에 관한 황제와의 의견조정을 위해 2년을 넘게 질질 끌고 난 후, 기원 161년 5월 11일, 역사적인 ‘윰 포고령 2차 추가령’---보통 사람들에겐 ‘계급제 선언’으로 더 유명한---이 발표되었다.
모든 제국민을 노예, 평민과 귀족으로 나누고 귀족의 특권과 세습을 규정한 이 포고령은 발표와 동시에 제국 전역에서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덧붙여 귀족들 중에서도 최고의 특권계급인 ‘상급귀족’의 자격요건을 각 지역 최고제후부터 5제후, 그리고 중앙귀족 중 19개 가문 직계들과 그 정식배우자로 규정하고, 순계 상급귀족 혈통에만 세습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계급제는 그 큰 틀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특권과 권위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상급귀족과 황족들에게는 신분에 맞는 유전자표식인 상급귀족문 혹은 황족문을 각자의 귀 밑에 새기는 것을 규정했다.
이런 신분표식이 옛날 ‘침묵의 자매들’ 교단에서 성직자들이 각자 받드는 신을 표시하기 위해 썼던 유전자표식의 잔재라는, 일부 나이 많은 유학자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허영심에 들뜬 상급귀족들은 그런 표식이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잔혹한 무리의 폐습인지 아닌지에는 그다지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 ‘계급제선언’의 내용은 승전의 사실상 주역인 황제에 의해 꽤 많은 조항이 수정되면서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제가 손댄 첫번째는 ‘자신 후대의 황제’에게 있어서 황후 또는 황후위의 자격을 ‘결혼경험 및 자녀가 없는 자’로 못박은 것이었다. 이복자녀 혹은 이종자녀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후계권의 문제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그럴싸한 핑계가 붙어있었지만 실제로는 바니샤드 공의 불륜사건으로 학을 뗀 황제가 비슷한 사건의 재발여지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라는 뒷말이 황실에서는 공공연히 오갔다.
또한 6품 이상 관직은 귀족에게만 독점시키려던 서부의 초안은 평민의 관직진출을 막지 못한다는 방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고, 콜로니 아카데미 이상의 고등교육은 귀족만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하려던 초안 역시 남극성당과 파예드 아카데미 두 학교에 적용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사정이 그렇게 되다보니 ‘귀족’이라고 해봤자 자존심 빼면 남는 실속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물론 귀족만의 특권으로서 기병이 될 권리, 그리고 남극성당과 파예드 아카데미의 생도가 될 권리 등은 사실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학 전문교육기관인 이 두 학교 외에도 콜로니 아카데미에 유학과는 틀림없이 있었고, 그곳 출신들이 ‘생도’가 아닌 ‘교수’로 이 두 학교에 들어올 권리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귀족들에게는 평민보다 훨씬 높은 세율이 적용되면서 일부에서는 귀족 지위를 스스로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귀족만이 기병이 될 수 있다는 조항은 제국의 귀족의 인구가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 낮은 비율을 놓고 따져보면 거의 모든 젊은 귀족들이 전시에는 위험한 기병으로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후 귀족들의 사망률이 급상승한 것을 두고 평민들이 ‘자업자득’이라고 비웃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제 문제는 ‘노예’에 있었다.
상습전과자, 옛 ‘성전’에서 포로가 된 전범들 중 이후 다시 전과가 있는 자, 내놓을 재산은 전혀 없이 남의 땅에 소작만 하던 무산소작농민들, 배급에만 의존해 살 수 있는 극빈자들까지 포함된 이 ‘노예’는 제국민의 거의 2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지만 정작 황제의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초안 거의 그대로 통과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이들의 강력한 저항이 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황제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제의 기준에 따르자면 항상 일손이 부족하고 거래되는 돈이 항상 넘쳐나는 광공업지역 북부에서는 소수의 상습전과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나올 여지가 거의 없었다. 북부에는 농업을 할 만한 땅도 없을뿐더러 극소수의 특권계층을 제외하면 빤한 노동자들 뿐인지라 그 생활수준 역시 고만고만하게 평준화되어 적당히 평민 축에 들 사람들만이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평민천국’이 되어버린 북부만큼은 아니지만, 동부 역시 노예로 분류될 대상은 많지 않았다. 분류 자체가 불가능한 유목민들은 애당초 그냥 무조건 평민으로 치부되어버렸고, ‘땅만 넘쳐나는’ 이곳에는 빈농들은 사방에 넘쳐났지만 그렇다고 딱히 남 도움이 필요한 ‘극빈자’라고 할 정도의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황제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 두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대농장주와 소작농이라는 체계로 운영되어온 농업지역 남부에서는 전 인구의 30% 이상이 노예로 분류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옛 국제연합과 그 추종세력 가담자들, 그 후손들의 강제수용소가 위치했던 서부 역시 그만큼의 숫자가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승전지역인 남-서부의 그 많은 노예들이 사방에서 조직적인 저항을 시작하면서 2차 혼란기의 두 승자들은 자신이 터뜨렸던 샴페인병을 채 다 비우기도 전에 이제 내부의 새로운 적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예폭동은 승전 운운하며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그 발칙한 두 지역에게 황제가 미리 치밀하게 준비해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1차 노예폭동, 아니 3차 혼란기로 흔히 부르는 이 새로운 광풍이 이번엔 승전지역인 남부와 서부를 제물삼아 몰아칠 태세를 갖춰가고 있었다. 이 순간 조용히 웃고 있는 건 제후지역의 고난을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세나우스 2세, 유평황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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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고한대로 혈맥-The Iron Vein 제2부 그레이오팔; 그 저주받은 눈동자의 연재를 오늘부터 재개합니다. 2일주기 연재로 한번에 a4 5장(10k) 정도씩의 분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http://www.vein.pe.kr/ 게시판에서는 개인지 4차 출판 (7,8권)의 예약을 지난 1일부터 진행중에 있습니다.
첫날이니만큼 아낌없는 리플과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