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77화 (376/1,132)

< -- 377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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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사상 최초로 야간에 열리게 된 대관식이었지만 준비의 주체가 허영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페로였던 만큼 그 화려함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녁 9시에 열릴 대관식을 위해 30분 전부터 쏘아댄 폭죽과 요란한 불꽃놀이 덕에 새 황제가 누가 되던 별 관심도 없는 대다수의 1번 도시 시민들조차 그 소음에 하던 일을 모두 집어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시성벽 부근 어딘가에서 이곳을 감시하고 있을 근위대 정찰병들에게는 ‘고이 돌려보내줄 테니 와서 공짜 저녁식사나 함께 하고 가라’며 익살맞은 플랭카드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몇 차례의 대관식들과는 달리 ‘진정한’ 제위의 향방조차 제대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분확보를 위해 여는 대관식이니만큼 시민들도 틀림없이 그때만큼 열광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열광은 고사하고 많은 사람들은 괜히 대관식 주변에 어슬렁거렸다가 나중에 근위대가 다시 돌아온 후에 보복당하는 게 아니냐며 황궁 주변에 얼씬하는 것조차 꺼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큰 탈 없이 이 사태가 지나가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물론 대관식 장소인 아스트라이아 홀에는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귀족이나 제후들, 그들의 지지자들이나 모일 테고, 시민들의 환호가 있건 없건 어차피 주인공들의 기분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도 대관식 1시간 전, 페로에 의해 카렐이 남부혈통인 오넬론이 아닌, 서부 혈통인 주페 태자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전격 공포되면서 황궁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유전자 결함을 염려한 황제가 미리 형의 것과 세포를 바꿔치기하는 너그러운 포용력을 발휘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이 사실에 대한 각 지역 제후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학장의 공개지지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카렐에게 조금은 반신반의하던 서부출신들이 가장 열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카렐의 면복 고름을 직접 매주며 세네피스 황후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간 시선을 애써 감추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12개의 문양이 새겨진 남색빛의 화려한 대례복을 차려입은 카렐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공식적인 ‘황태후’가 될 세네피스 황후 역시 대례복인 적의와 용무늬 머플러를 두른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카렐의 워낙 큰 체구 때문인지 그의 모습이 묘하게 작아보였다.

“한쪽 손이 없으니 이거 옷맵시가 영......”

수다를 떨며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메스는 세네피스 황후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세네피스 황후와 마찬가지로 황후의 대례복인 적의를 입고 있던 아메스는 왼쪽 손목이 아직 없는 탓에 소맷자락이 보기 싫게 축 늘어져 있었다.

“하여간, 나중에 동부에 이 복수도 꼭 하고 말 거라고요. 일생에 딱 한 번 맞는 즉위식에 꼴이 이게 뭐람.”

카렐은 입을 삐죽거리는 아메스의 손목을 붙들어주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대례식 치를 때는 어차피 성한 손으로 나올 수 있을 테니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요.”

카렐은 새 손의 형태만 겨우 잡혀가는 그의 손목 끝을 조심스럽게 들쳐보며 말했다.

전사단 심복들이 모여 있던 건너편 방이 시끌시끌해진 건 그때였다. 카이두 경의 그 유난히 굵고 큰 웃음소리가 꽤나 소란스럽게 들리는 것을 보아 무슨 일인지는 뻔했다.

사실 대관식이야 언제 있어도 있을 것이었지만, 전사단의 심복들을 가장 기절초풍하게 만든 건 카렐이 베아트릭스에게 황빈의 대례복을 입고 자신과 함께 입장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그가 황빈 후보로 전격 발표되면서 동생들인 달리나 루코프가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 덕에 슬레이프니르 부대원들이 7시부터 도시 사방에서 말을 타고 괴성을 지르며 폭죽을 터뜨려 한바탕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대례복 차림이 어색한지 계속 얼굴을 붉히고 있던 베아트릭스를 내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우베가 자이납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것 봐, 옷이 날개라니까.”

“근데, 그게 무슨 뜻이게요? 플라칼 단장님이 평소엔 별 볼일 없다는 뜻이에요?”

“하여간, 말꼬리 잡기는......”

“그건 그렇고, 솔하고 플라칼 단장님하고 뭐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네요.”

자이납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거구의 네피와, 그보다 한술 더 뜨는 카이두 경까지, 이 거친 사내 둘이 나란히 서서 낄낄거리며 자신의 딸과 외손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문을 확 열어젖힌 볼토 트라우제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전하, 아니, 폐하께서 지금 나가십니다.”

단상에 서 있던 루토는 2천여명의 내빈들로 가득 찬 이곳 아스트라이아 홀을 쩌렁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외쳤다.

“리 리쿠의 후손이시며, 대태자 주페 세호 리쿠와 황후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의 딸이신 카렐 카파키 리쿠님께서 드십니다!”

몇몇 사람들이 ‘태자와 황후의 딸’이라는 조금은 황당한 조합에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주변의 눈치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기립!”

홀의 뒷문이 활짝 열리면서 예복을 차려입은 아메샤 스펜타 병사 2백여명이 양쪽에서 달려나와 제단까지의 길 양쪽에 정연하게 늘어섰다. 그와 동시에 길게 늘어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내빈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성전의 혈통을 맞이하옵니다!”

아메샤 스펜타 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경의 고함소리에 그들 ‘아메샤’들이 들고 온 창으로 바닥을 쿵쿵 내려치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으로 울리는 그 힘찬 진동은 새 황제의 등장을 재촉하듯 홀 전체를 뒤흔들었다.

“후우,”

큰 숨을 한 번 내쉰 카렐이 큰 문을 두 팔로 힘껏 밀어 열어젖혔다. 그리고 카펫이 깔린 중앙의 행진로를 따라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앞뒤로 긴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양 어깨에는 용이 새겨진 긴 남색빛 비단곤복, 허리에는 붉은빛의 화려한 상(裳)을 앞뒤로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그 크고 다부진 체격과 어우러져 지켜보는 사람들을 그 존재만으로도 완전히 압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두의 카렐 바로 뒤에는 총리대신이며 미래의 국구인 페로 대공이 대례복을 입은 딸 아메스와 나란히 걸어 나아갔다.

그 뒤를 이어 이모인 사우드 부인과 나란히 선 네페티 부인이 사람들의 눈을 냉담하게 무시한 채 앞장서는 카렐만을 올려보며 걷고 있었다. 서부 특유의 화려한 자수가 놓인 남색 원피스에 유난히 많은 장신구를 걸친 그는 얼굴을 반쯤 가린 히잡 사이로 하얀 얼굴과 물빛처럼 파란 눈동자,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칼을 살짝 드러내놓고 있었다.

비록 체구도 작고 황후도 아니었지만, 그의 눈부시기까지 한 자태는 함께 행진하는 4명의 비빈 후보들 중 누가 보기에도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입이 째지기 일보직전의 외할아버지, 아버지를 동반한 1황빈 베아트릭스와 2황빈 솔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문득 멈춰선 카렐은 20척 정도 높이에 만들어진 단상과 옥좌를 한 번 올려보았다. 그곳에는 하심과 두겐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서 있는 코리온의 모습도 보였다. 바로 오늘 아침, 형장에서 어렵게 목숨을 건진 그도 길었던 수염을 모두 깎아내고 평소같은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예법에 따른다면 남극성당 대제학에게서 옥으로 만든 황제의 패를 넘겨받는 것이 상례였지만 새로운 황태후이며 대제학인 어머니 세네피스 황후는 옥좌 뒤쪽의 황태후 자리를 지켰고, 오늘은 그 동격인 코리온이 그 일을 대신 맡고 있었다.

제발 꼼짝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부득불 주관을 하겠다며 억지로 나서는 그를 몇 번이나 말렸지만 자신 못지않은 저 고집쟁이를 천하의 카렐도 결국 꺾을 수는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단상에 오른 카렐은 힘겹게 서 있던 코리온의 앞에 천천히 다가갔다.

“제국의 새 황제 폐하께 이 옥패를 바치옵니다. 제국 모든 유학자를 대표해 파예드의 학장이며 대군인 소인 코리온 세닉 리쿠가 즉위를 하례드리옵니다.”

양옆에서 부축을 받은 코리온이 자리에 꿇어앉으며 옥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에 뒤따라 단상에 모여있던 각 지역 제후들이 그를 따라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맙소. 코리온 리쿠 학장.”

옥패를 받아들며 한손으로 코리온을 일으켜 준 카렐은 그를 품에 힘있게 끌어안았다. 원래 식순에도 없던 그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이 조금 놀랐지만 가장 기겁을 한 건 아직까지 코리온과의 앙금이 남아있는 세네피스 황후였다. 코리온 역시 마찬가지로 놀랐지만 곧 다정하게 그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카렐이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여주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죠.”

뒤로 물러난 코리온이 레곤 대공주가 앉았어야 할 황족 대표석에 자리를 잡는 모습에 세네피스 황후가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감기를 핑계로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레곤 대공주는 사실 위층의 관람석에 멀쩡히 앉아 대관식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쪽에 함부로 얼굴을 들이밀어 남부연합군 기병사령관으로 있는 남편과 남부에 있는 자식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보니 궁색하나마 장남 코리온에게 종친회장 자리에 대신 앉으라는 정도로 성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뒤로 돌아선 카렐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거대한 아스트라이아 홀이 떠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카렐 카파키 리쿠는 제니안의 지도자셨던 리 리쿠와 앞서가신 세 분의 선대황제폐하의 뜻을 받들어 제국의 네번째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짐은 제국에 존재하는 오직 한 명의 절대자로서 모든 인민에게 무조건적인 복종과 하늘같은 존경을 명하는 바이다!”

“세나우스 4세 폐하께 복종과 존경을 바칠 것임을 엄숙히 선서하옵니다!”

카렐의 말이 끝나자마자 당하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당상에 있던 황실 내명부 지명자들과 두 태후들까지, 모든 사람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홀 안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옥좌에 오른 카렐은 당하의 사람들을 한번씩 죽 내려다보고는 우베가 올린 큰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짐을 받들어 제국을 이끌 대신들을 호명하겠다!”

당하의 술렁임이 가라앉자 카렐이 그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두루마리를 읽었다.

“1품직인 제국 총리대신은 곧 국구가 될 페로 슈트란 자이센 대공이 계속 맡을 것이다. 2품직으로 문반을 총괄하는 부총리는 구완 슈벨 경이 맡을 것이다. 3품 문반은 다음과 같다. 내무대신은 현 타르서스 지방장관인 압둘 모투바 경이 맡을 것이며, 재무대신은 현 전사단 재무관인 이브라힘 가우라 경이, 공부대신은 중부 콜로니 아카데미 학장인 쿠로사키 미카 경. 법무대신은 전 서부 최고제후였던 두겐 플레렌 경, 이부대신은 볼토 트라우제를 임명한다.”

총리와 내무, 이부대신은 페로의 사람들이, 부총리와 재무, 공부대신은 전사단 사람들이 차지했으니 적당한 균형을 이룬 셈이었다. 그리고 평민 출신인 볼토 트라우제와 서출의 하급귀족인 이브라힘 경이 등용된 것 역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서부 출신으로 법무대신에 전격 등용된 두겐에게 쏠리고 있었다. 샤드니의 손에 최고제후에서 밀려난 이후, 줄곧 칩거해온 그는 이제 황실로 무대를 옮겨 다시 재기한 셈이었다.

“이럴 때 보면 역시 개혁파의 친정이 원리주의가 맞긴 맞나봐.”

두겐을 등용한 카렐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네르가 옆에 앉은 우베에게 피식 웃어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원리주의자가 장관에 오른 게 뭐가 좋다고.......”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 알아?”

제네르가 여전히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방법만 틀리다뿐이지 원리주의나 개혁파나 강력한 통치를 원하기는 매한가지란 말이야. 지금같은 상황에서 법무대신은 어차피 정적을 처단하는 악역이고, 명분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손을 더럽힐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계산에 빠른 인물보다는 저렇게 단순명료한 인물이 제격이지. 게다가 학장의 처형 때문에 잔뜩 독기도 올라 있을 테니 더할 나위가 없지.”

“그럼 전하께서 앞으로 잔인해지실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마도.”

제네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문관의 발표가 끝나고 카렐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무반의 수장인 2품 병부대신 겸 상장군은 현 슈로 기사단장인 제네르 하크로딘 경을 임명한다.”

제네르의 지명에 사람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그다지 놀라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전사단 내에서 죽은 토로 경의 위치를 대신할만한 인물은 제네르밖에 없었다. 가난한 말몰이꾼 출신의 이 유학자는 이제 부총리와 동격의 제국 수뇌부에 당당히 뛰어올라 있었다.

“3품 무반대신인 대장군에는 아메샤 스펜타 사령관인 케레사스 솔로스 경과 가디언 네피, 가디언 시로, 가디언 조페, 베아트릭스 플라칼 경을 임명한다.”

병부는 지금까지 전사단의 구성대로 제네르를 시작으로 새 황제의 수족같은 심복들이 줄줄이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관직’이라는 것이 생기자 이래저래 기분이 좋아진 네피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공식적인 취임을 끝낸 세나우스 4세 카렐 황제에게는 이제 식순에 따라 각 지역 제후들과 귀족들의 충성 서약과 하례를 받는 지겹고도 긴 일이 남아있었다.

“이들이 누구였지?”

북부 인사들의 하례를 받던 카렐은 낯선 세 사람이 올라오는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백의 머리칼을 지닌 웬 남자와 큰 키에 약간 마른 여자, 그리고 자그만 체구의 한 사람이 카렐에게 황금으로 만든 용의 신상을 바치고는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우베가 참석자 명단을 급히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아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깜박 잊었군요. 바하칼리와 쿠트라스에서 온 상공조합 사람들입니다. 지난번 전사단에 군마와 수송선을 쾌척해준 사람들입니다.”

“그게 이들이었나? 그런데.......상인이라고?”

말없이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은 흠잡을 데 없는 몸가짐과 웬만한 제후들을 능가하는 위엄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물론 상인이라고 위엄이 없으라는 법은 없겠지만 자유분방하고 조금은 가벼운 모습의 보통 상공인들과 비교해보면 조금은 특이하기도 했다.

“소인 바하칼리와 쿠트라스의 상공조합을 맡고 있는 아스탈 레즐린이라 하옵니다.”

중간에 앉아있던 반백의 남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남자의 엷은 회색빛 눈동자가 홀의 밝은 조명 아래서 광채를 뿜었다.

“레즐린? 레즐린이라고 그랬나?”

카렐은 한쪽에 서 있는 어머니,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황태후를 문득 돌아보았다. ‘레즐린’이라는 성에, 어머니와 같은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라면 고아 출신으로 알려진 외할머니, 아지드 레즐린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스탈이라는 자에게 막 말을 걸려던 카렐은 아직 단하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일단 생각을 접고 우베에게 일렀다.

“내 저들을 독대하고 싶으니, 끝나고 나거든 대전에 잠깐 데려오게나.”

“알겠습니다. 폐하.”

우베가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저 여자 때문이십니까? 따로 언질이라도 줄까요?”

“여자라니?”

카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우베가 눈을 비비며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스탈’에게만 정신을 쏟았던 카렐은 우베가 왜 뜬금없이 여자 이야기를 꺼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의 유별난 미모에만 온통 정신이 쏠려있던 우베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생김새만은 모두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나?”

우베는 유난히 휘황한 색색의 불빛이 반짝이는 홀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가늘게 뜬 여자의 두 눈 사이에서 반짝이던 무지개빛 광채가 어쩌면 조명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일단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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