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78화 (377/1,132)

< -- 378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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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을 마치고 150층의 침실로 올라온 카렐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수우와 베흔이 온통 엉망진창을 해놓고 떠났던 이곳도 이젠 좀 정리가 되어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사람들 다 숙소로 돌아갔겠지?”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던 카렐이 따라 들어온 우베와 카토, 루토에게 물었다.

“예. 페로 대공과 샤드니 공께선 방금 트라이앵글로 돌아가셨고 리쿠 학장님은 143층의 의무실에 하심 예킨터스 교수님, 라스와 함께 계십니다. 가디언 10명이 지금 특별경호하고 있습니다. 대공주저하도 남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카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녀들과 남편이 사실상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서 대공주의 처신도 꽤나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각료로 선임되신 분들께는 일단 영빈관에 숙소를 모두 배정해드렸습니다. 제후분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남으신 분들께도 영빈관을 제공해드렸습니다.”

“4명은.......모두 각자 숙소에 있겠지?”

우베는 카렐이 말한 그 4명이 누군지를 바로 이해했다.

“예. 모두 시녀를 배정받고 그곳에서 쉬고 계십니다.......아참, 베아트릭스 플라칼 대장군님은 부하들을 놔두고 혼자 편하게 계실 수 없다고 성 밖의 주둔지로 돌아가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피식 웃음지은 카렐은 멀리 황궁 도성 밖을 내다보았다.

서쪽으로는 황제령 최대의 강인 욱리하가, 남쪽으로는 그 지류인 관산수가 각각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이 황궁은 거대한 두 강의 결절점상에 위치한 덕에, 평지와 마주한 동쪽과 북쪽이 아니고서는 공성전 자체가 꽤나 어려운 천혜의 요새지였다.

“제네르 하크로딘 상장군님과 시로 대장님은 101층 근위대 자리에 만들어진 임시 지휘부에 계시고 네피 대장님은 다룬, 페다이와 함께 성벽에 나가 계십니다. 모렌 박사님은 유전자은행 직원들하고 복직기념 술잔치 벌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알았다.”

“ㅤㅋㅞㄹ크에서 지원 병력으로 올 중장보병과 경보병 각각 1만씩, 가디언 1천 명은 아침 7시 정도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황성의 성벽은 내일부터 통제에 들어갑니다.”

루토의 보고에 카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1번 도시권역은 1천만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는 황제령 최대의 도시였지만 대부분 인근에 점점이 흩어진 거주지나 단지들에 살고 있었고, 정작 성벽 내의 인구는 20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그들 중 상당수가 곧 벌어질 근위대와의 싸움을 피해 인근 거주지로 대피하면서 성 내에 남아있는 실제 인구는 4분의 1이나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네들 오거든 아메샤 스펜타에서 3천정도 차출해 황궁을 지키게 해. 가디언들은 모두 요인경호와 중요시설 경비로 돌리고.”

면복을 벗은 카렐은 황룡이 수놓인 검은빛 비단포와 두 개의 긴 깃털이 달린 조우관을 머리에 눌러쓰고 조금 불편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럼 손님 만나러 가야겠군.”

“황상께서 드십니다.”

우베의 목소리에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3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중앙에 서 있던 ‘아스탈’은 큰 키, 갈색빛 피부에 긴 반백의 머리칼을 얼굴에 늘어뜨린 단정한 비단포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열에는 이 남자를 그대로 빼닮은 미모의 여인이 서 있었다. 검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이 매혹적인 미모의 여인을 본 카렐은 그를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되짚어 봐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남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은 바하칼리와 쿠트라스 상공조합의 운영을 맡고 있는 아스탈 레즐린이라 하옵고 이쪽은 제 딸이며 조합 지배인을 맡고 있는 밀리타입니다. 반대편은 저희 조합의 운영위원인 쿠마르 우펠루입니다.”

“레즐린? 서부 7제후가 출신인가?”

외할머니인 아지드 레즐린 부인을 떠올린 카렐이 대뜸 물었다. 그의 질문에 아스탈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먼 친척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만 소인은 기원전부터 북부 쿠트라스에서 살아온 평민 상공업자일 따름이옵니다. 폐하.”

아스탈의 대답에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외모는 북부사람이라기보다는 서부사람의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검은 눈이었나?’

우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스트라이아 홀에서 언뜻 무지개빛으로 빛나던 그 밀리타라는 여인의 눈동자는 이곳 실내에서 다시 쳐다보니 검은색이었다. 그것도 어색할 정도로 짙은 색의 틀림없는 까만 눈동자였다.

카렐이 그제야 밀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 딸이 정말 미인이군. 혹시 나와 전에 본 일이 있었던가?”

이번엔 아버지 대신 밀리타가 대답했다.

“소인 전문 경영인이며 상급 법률사로 줄곧 북부에서만 살아왔사옵니다. 소인 같은 것이 어찌 폐하의 아름다운 용안을 뵌 일이 있었겠사옵니까. 소인은......”

뭐라 더 말하려는 딸을 아스탈이 재빨리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소인에게 이 아이 말고 아들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이 밀리타와 너무도 닮아 잠시 혼동하셨던 모양이시옵니다.”

“아들?”

“이라즈 노에누스라고 지금 황실 예술원에서 미술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사옵니다. 학계에서 명성이 높은 아이이니 폐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렐도 미술사학자인 이라즈 노에누스라는 이름은 들은 일이 있지만 생김새에 관해서는 사실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어쨌든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번 자네 조합에서 보내준 군수품이 정말 큰 힘이 되었네. 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할지 모르겠군.”

“소인과 충성스런 북부 조합원들은 폐하께서 저 남부의 무리들과 당당히 맞서실 힘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이번 대관식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조합 예비기금 중 일부를 조합원 투표를 거쳐 모아왔으니 받아 사용해주십시오.”

아스탈이 큰 가방을 내밀며 열어보이자 우베는 하마터면 소리를 꽥 지를 뻔 했다. 그 안에는 1만 골드짜리 현금증서가 가득 들어있었다. 우베는 그 증서들을 재빨리 어림해보느라 잠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의 어림을 도우려는 듯 아스탈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정확히 2억 2천 3백만 골드입니다.”

내심 불안해진 카렐은 아스탈의 회색빛 묘한 눈빛을 힐끔 살폈다. 이권을 노린 기부라면 당연히 따라왔어야 할 기부자 명단이나 기부금 목록도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심지어 ‘단체 명의의 공식기부’이며 기부금에 대한 공시절차와 투표, 세금신고까지 마쳤다는 증서도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깨끗한 돈이었다.

카렐은 돈을 어림하는 척 하며 눈앞의 세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면서 시간을 끌었다. 카렐의 이 손짓은 ‘저들의 신원을 자세히 조사해 와라’라는 일종의 수신호였다. 카렐의 지시에 우베가 다른 연락을 받은 척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고맙게 받아쓰겠소.”

잠시 후, 결정을 내린 카렐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전사단 병력 증강에 가장 걸림돌이 되어 온 것이 다름아닌 돈 문제였다. 이정도 돈이면 적어도 4만이 넘는 보병을 무장시키고 1년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니 제국 여러 곳에서 쏟아지는 그 많은 지원자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뒷걸음쳐 나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카렐은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우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알아 봤나?”

“네. 특별하게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아스탈이라는 저 사람은.......기원전 37년생, 전형적인 평민 출신 기업인이고 전과도 없이 깨끗합니다. 성실하고 신용 있는 기업인으로 업계에서도 평판이 상당히 좋은 모양입니다.”

“가족상황은? 혹시 어머님의 레즐린 가와 관계가 있나?”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상 대대로 쿠트라스에서 살아온 평범한 의사 가문 사람입니다.”

“의사 가문? 그런데 웬 기업인?”

카렐이 돈가방을 가리키며 묻자 우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뭐 원래 엇나가는 자식도 한둘 나오기 마련 아닙니까. 그런데 자식들은 좀 다릅니다. 함께 온 딸 밀리타 레즐린은 어머니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아서 혼외자인 것 같은데, 북부 콜로니 아카데미 의학과를 졸업해서 한동안 유명한 정신과 의사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300년 무렵부터 법과 경영학을 다시 공부해서 지금은 아버지를 돕고 있습니다. 전력이 아주 대단한데요. 전문경영인 경력 말고도 노에누스 가에서 제후 재무장관까지 지낸 전력도 있습니다. 엄청 똑똑한 여자 같습니다.”

“아들은?”

“보니까 북부 3제후 노에누스 가의 상급귀족 여성에게 둘째 남편으로 장가를 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얻은 아들이 둘째 이라즈 노에누스입니다. 이 녀석은 어머니 덕택에 귀족 신분이군요. 원래는 북부 콜로니 아카데미 의학과에서 해부학을 공부했고 이후에 다시 미술을 공부해서 지금은 황실 예술원에서 미술사 교수 겸 현직 화가로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추장스러운 조우관과 머플러를 직접 벗어 팔에 걸었다. 거의 한계까지 왔는지 그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149층에 가야겠다.”

카렐이 황후전이 있는 149층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다리도 불편하니 웬만하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는 우베의 권고에도 ‘굳기 전에 좀 움직여줘야지.’라고 능청까지 떨며 아메스의 침실을 향했다.

자정이 넘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아메스의 처소 앞을 지키던 시녀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깨, 깨워드리겠습니다.”

“자고 있나?”

“계속 기다리다가 너무 피곤하셔서 방금 잠드셨으니......”

“됐네. 잠들었으면 어쩔 수 없지.......하긴, 미리 얘기도 않고 자정이 넘어 내려온 내가 주책이군.”

카렐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성치도 않은 몸으로 지금껏 바쁘게 돌아다닌 황제를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잠들어버린 아메스에게 내심 약간의 섭섭함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황후전 앞에서 돌아선 카렐은 이곳까지 따라온 우베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도 내려가 자게. 황궁에서 첫날인데 베이라가 날 무지하게 원망하고 있겠는걸.”

약혼녀를 핑계로 우베를 억지로 떠밀듯 보내버린 카렐은 몇 명의 시녀와 가디언들만을 데리고 다시 계단을 통해 150층에 올랐다.

150층 황제전에 돌아온 카렐에게 침실 앞을 지키던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황비전의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께서 폐하께 올릴 야식을 미리 준비해 두셨으니 잠시 이곳에 올라오셔도 되겠냐고 방금 연락해오셨습니다.”

“부인이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나?”

카렐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대관식에서 돌아오시자마자 황비전 시녀들에게 주의사항을 하달하시고 각 방과 내부시설, 보완점들을 확인하느라 바쁘셨다고 합니다. 1시간 전부터는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래.......그럼 지금 올라오라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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