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79화 (378/1,132)

< -- 379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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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몰래 북부의 카파키 가 종가에 다녀왔던 네페티는 그곳의 추운 날씨에 덜컥 독감이 걸려 온 덕에 그 사실이 그대로 들통이 나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숙하기로 소문났던 이 딸이 가족 몰래 약혼자와 밀월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에 어머니 마하 부인이나 오빠 브라코가 꽤나 기가막혀 했지만 어차피 결혼할 사람과 다녀온 것인지라 다행히 심하게 꾸짖지는 않았다.

“별 수 없지,”

이불을 코밑까지 뒤집어쓴 네페티가 코맹맹이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연신 콧물을 훌쩍거리면서도 오르마즈와 보냈던 이틀간의 즐거운 시간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뭐 그다지 아까울 것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도모르게 몸이 후끈 달아오른 그는 죄 없는 베개를 껴안고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지금쯤 다 모였을 텐데......”

고개를 조금 들어 바라본 인공호수 너머에서 밝은 불빛이 보였다. 오늘은 종장인 오빠 브라코가 가족들을 모두 모아 1달에 한 번씩 가족의 대소사를 상의하는 날이었다. 아마도 오늘은 20일 후에 있을 어머니 마하 부인의 결혼식 문제를 상의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독감에 걸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네페티는 오늘만은 도저히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종가의 안쪽, 큰 인공호수가에 위치한 네페티의 침실 별채는 이곳을 마련해준 오빠 브라코의 뜻대로 경치 좋고 낭만적이기는 했지만, 겨울에는 물 위를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창문도 함부로 열어놓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 덕택에 오늘도 이 독감 걸린 방주인을 위해 창문은 바람하나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꼭꼭 닫혀있었다.

절기상 겨울에 속하는 이곳 아켐 북극의 플레렌 가 종가도 이맘때는 오늘처럼 호숫물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쌀쌀한 날씨를 종종 보이곤 했다.

“잠도 안 오고,”

네페티가 짜증을 부리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옆에 오르마즈님이라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불을 꺼진 어두운 방의 이불 속에 몸을 파묻은 네페티는 이 방을 둘러싼 인공호수 속에서 하나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날카로운 눈이 이 불 꺼진 방 안의 사람의 존재를 재빨리 살피고 지나갔다는 사실까지도.

“꽤 정확하군.”

환한 불이 켜진 플레렌 가 종가를 올려보며 제수스 자이센은 베흔이 넘겨준 자료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베흔이 넘겨준 이 상세한 자료에는 각 초소들의 배치상황과 교대시각, 경비병들의 동선은 물론이었고 종가의 각종 방어체계와 출입구, 비상시 행동요령 같은 극비사항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수구 크기와 쓰레기 버리는 방법, 뇌물을 좋아하는 인물들의 명단까지도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200명이나 되는 투모카프 휘하의 정예병들이 인공호수의 배수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진입한 것도 베흔이 알려준 정보와 약간의 뇌물 덕택이었다.

“타격조 진입 완료.”

아들 투모카프의 보고에 제수스는 조금은 긴장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가 이번에 플레렌 종가까지 직접 이끌고 온 병력은 어중이떠중이 ‘노예폭동’ 무리와는 거리가 먼, 무려 5백여명이나 되는 코메트시절 자신 휘하의 기동부대원들이었다. 그 중 외곽의 종가 경비병과 싸우며 시간을 끌어줄 3백은 제수스 자신이, 내부를 휘저을 2백여 ‘타격조’는 아들 투모카프가 지휘하고 있었다. 제수스로부터 ‘면천’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약속받은 이 용사들의 사기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두 평민복장으로 위장한 이들 용사들은 소단위로 종가 주변에 흩어져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시한다.”

제수스의 지시와 동시에 종가 밖에 흩어져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종가를 향해 진입을 시작했다. 모든 것은 15분 내, 부근에 주둔한 제후군 1군단 파견병력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들이 이곳 종가로 몰려들어 빈틈이 생기면, 세호 가에서 탈취한 2대의 수송선에 나누어 타고 대기 중인 2만의 ‘노예폭도’들로 이곳 종가와 그 일대의 도시를 점거하고 일거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참이었다.

브라코와 그 일가족 41명은 헤네랄리페 중앙의 인공호수에 마치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있는 ‘섬’의 널찍한 정자에 둘러앉아 가문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던 중이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브라코에게 경비대장이 불쑥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어, 잠시.”

“뭔가?”

“경비병이 호수 쪽에서 침입자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경비대장은 호수 남쪽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브라코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호수 남쪽?......잠깐, 네페티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텐데......”

브라코의 목소리가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경비병이 달려간 그곳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깜짝 놀란 브라코는 허리에서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무예를 멀리하는 서부 귀족들의 전통 때문인지 종장을 따라 칼을 뽑아들며 일어난 집안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북쪽 행정소 쪽으로 모두 가십시오! 1분대! 주위를 살피고 2분대! 가족 분들을 호위해드려! 빨리!”

소스라치게 놀란 경비대장이 브라코를 비롯한 플레렌 가 사람들을 한쪽으로 거칠게 떠밀었다. 20여명의 경비병의 호위를 받으며 ‘섬’을 급히 빠져나가려던 이들의 앞을 검은 피부의 날렵하게 생긴 자가 도끼를 뽑아들며 대뜸 막아섰다.

“더 이상은 못 가.”

투모카프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차가운 호숫물로 흠뻑 젖어있는 그의 몸에서는 희미한 김까지 솟아오르고 있었다. 투모카프의 그 싸늘한 얼굴에 살기어린 미소가 번졌다.

“모두 죽여라. 금발머리 여자들만 빼고.”

투모카프의 목소리에 이곳 ‘섬’을 둘러싸고 물 속에서 대기 중이던 2백여명의 옛 코메트 정예요원들이 사방에서 이 귀족들을 향해 찢을 듯한 함성과 함께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브라코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곁에서 이들을 호위하고 있는 근위병은 고작 50여명에 불과했다. 종가 외곽을 경비하는 5백여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당장 이곳을 쳐오는 저 폭도들에게서 가족을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경비병!”

브라코가 투모카프의 살벌한 도끼를 칼로 힘껏 받아치며 악을 썼다. 2백여 폭도들과, 주군 가문의 사람들을 지키려는 50여 경비병간의 필사적인 격전이 벌어지면서 이 작은 섬은 비명소리와 혼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고제후님만이라도 밖으로 빼내! 빨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판단한 경비대장이 투모카프를 얼른 대신 막아서며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50명밖에 되지 않는 경비병들은 2백여 정예용사들의 압도적인 공격에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계속 쓰러져가고 있었다. 2백여 폭도들을 상대로 41명이나 되는 플레렌 가 가족들을 다 지켜내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브라코를 둘러싼 십여명의 경비병들은 가족들을 지키겠다며 악을 쓰는 브라코를 강제로 붙들고 바깥과 이어지는 작은 구름다리가 있는 북쪽으로 급히 향했다.

“뭐야! 이놈들아! 뭐하는 짓이야!”

“일단 나가십시오! 빨리요!”

자신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폭도들의 칼에 맞아 하나둘씩 참살당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브라코가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섬에서 빠져나가는 브라코를 뒤늦게 발견한 투모카프가 거친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씨발, 저놈 잡아! 어떤 새끼가 놓쳤어!”

브라코를 쫓아 막 달려가려던 투모카프는 무언가에 발이 걸리며 앞으로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어딜!”

배와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던 마하 부인이 아들을 쫓아가려는 투모카프의 발목을 결사적으로 껴안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빨리 도망가!”

“에이! 썅!”

마하 부인의 이마를 뒤꿈치로 힘껏 내리찍어 기절시켜버린 투모카프는 다리 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브라코를 맹렬히 쫓아 달려갔다.

십여명의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단 자리를 빠져나온 브라코는 이 섬과 본가 행정소를 연결하는 짤막한 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이런 그의 앞에 이미 다리를 봉쇄하고 있던 십여명의 폭도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젠장할!”

길이 막혀버리자 당황한 브라코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5명의 폭도들을 거느리고 어느새 뒤를 바싹 쫓아온 투모카프가 도끼를 번쩍 치켜들어 경비병 한 명의 머리를 두 토막내버렸다.

급한 대로 물로 뛰어들려던 브라코의 앞을 또 다른 폭도들이 막아섰다. 그들은 뭐라 말할 시간도 없이 브라코의 경비병들을 맹렬히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병사들과 함께 폭도들에 둘러싸인 브라코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죽여 버려!”

투모카프가 도끼를 쳐들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하나 둘씩 늘어나는 폭도들의 엄청난 숫자에 브라코의 호위병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쓰러져가고 있었다.

“이 무엄한 놈들!”

악을 쓰며 휘두른 브라코의 시미터 날에 폭도 한 명의 목이 한참을 날아갔다. 그 순간, 뒤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브라코는 칼을 휘두르며 휙 돌아섰다.

“악!”

이마 중앙을 정확히 도끼로 가격당한 브라코는 순간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미간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피가 브라코의 선명한 푸른빛 눈동자를 천천히 덮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자신을 죽인, 이 큰 키의 사나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재수없게.”

그의 시선에 대뜸 얼굴을 찡그린 투모카프는 브라코의 이마에 깊이 박혀있는 도끼를 힘껏 뽑아내며 그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물에 반 쯤 걸쳐 쓰러진 그의 머리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맑고 투명한 호숫물을 타고 붉게 번져나갔다. 십여 년 전, 그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피 묻은 도끼를 털며 섬의 정자로 돌아온 투모카프 자이센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흩어져있는 처참한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부장에게 물었다.

“다 끝났나?”

“금발머리 어른은 3명밖에 안되는데요.”

“시체 수는?”

“경비병을 빼면 41구입니다.”

“뭐, 뭐라고? 이 새끼들이! 한 명도 놓치지 말랬잖나!”

기겁을 한 투모카프가 순간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명이 달아났다! 당장 찾아내! 빨리!”

투모카프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사람의 흔적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시체의 신원을 모두 확인해! 아버님께서 주변을 포위하고 있으니 주기장만 막으면 못 달아난다! 3, 4분대는 당장 다리를 건너가서 주기장을 공격하는 1분대를 지원해! 빨리!”

1백여명의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 주기장이 있는 북쪽의 행정소 쪽으로 달려가고 50여명이 섬에 남아 시체들을 한곳에 모으며 마지막 ‘정리’를 시작했다. 병사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던 경비병 두 명을 질질 끌고 다니며 쓰러진 시체들의 신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투모카프의 명령대로 부상만 입은 채 바닥에 동댕이쳐진 3명의 금발여인들은 가족들의 시체 중간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투모카프가 그들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 중 네페티 발 플레렌이 누구냐?”

얼굴과 배에 치명상을 입은 마하 부인을 포함한 그들 3명은 살아남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당장 실토하지 않으면 저승까지 쫓아가서라도 갈가리 찢어죽여줄 테다.”

도끼를 치켜든 투모카프의 살기어린 한마디에 마하 부인의 피로 물든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이들이 딸 네페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머릿속에 갖은 흉악한 경우가 다 스쳐지나갔다.

“당장 밝히지 않으면 그년이 당할 꼴을 너희 셋이 다 당하게 해 주마.”

투모카프는 마하 부인의 옆에 쓰러져있던 브라코 첫째 첩의 옷자락을 북 찢어내며 그의 젖가슴에 피로 물든 도끼날을 가져갔다. 마치 경기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던 그 첩이 거의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의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페티 아씨는 호숫가.......”

“나다.”

마하 부인이 얼굴을 가로질러 난 큰 칼자국을 더듬으며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내가 네페티 발 플레렌이라고!”

마하 부인이 칼에 찔린 배에서 오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모두 다 들으라는 듯 악을 쓰며 소리쳤다.

숨이 붙은 경비병을 억지로 끌고 온 투모카프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이년이 종장의 여동생 네페티라는 년 맞나?”

“예.......그, 그렇습니다.”

마하 부인의 눈빛을 확인한 경비병이 바들바들 떨며 어렵게 대답했다. 크지 않은 키에 옅은 금발머리,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는 투모카프가 확인했던 자료 속의 네페티와 별다를 바 없었다. 얼굴 역시 피로 범벅이 되어 잘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얼추 비슷했다.

“됐어, 나머지 다 죽여.”

경비병을 옆에 동댕이치며 투모카프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의 명령과 동시에 마하 부인의 양옆에서 신음하던 금발의 며느리와 손녀딸의 목에도 즉시 칼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 둘의 시체 중간에서 파랗게 질려있는 마하 부인을 내려다보며 투모카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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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 4차출판 예약마감이 내일(12월 23일)까지입니다. 잊고계시던 분들께서는 서둘러주세요.

예약기간 이후 주문에는 약간의 불이익(?)이 있습니다. ^^

http://vein.zio.to 혹은 http://vein.lil.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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