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80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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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에게 가 보라는 카렐의 명령에 짐짓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척 하던 우베는 황후 침실 쪽을 홱 돌아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어휴, 저 천하의 철딱서니 없는 것 같으니,”
카렐이 올라간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우베가 허둥지둥 황후 침실로 다시 돌아가 문 앞을 지키던 시녀에게 짜증을 부렸다.
“빨리, 급한 일이니까 빨리 깨워드려야 된단 말이야,”
시녀는 ‘황제도 깨우지 않은’ 아메스를 당장 불러내라며 법석을 떠는 우베의 모습에 잠시 기가막혀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알현실에 가 계세요.”
알현실로 달려가 손톱을 깨물어대고 있던 우베는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아메스의 모습에 혀를 찼다.
“지금 여기가 ㅤㅋㅞㄹ크 게릴라캠프인줄 알아요?”
“갑자기 뭔 소리야. 잘 자는 사람 깨워놓고.”
짜증을 부린 아메스가 잠이 잔뜩 들은 눈을 비비며 대꾸했다. 술 한 잔을 걸친 듯 검붉어진 데데한 얼굴에 흰 가운만 대강 두르고 있는 모습은 누가보기에도 ‘황후’라기에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여긴 황궁이라고요! 아씨는 이제 내명부 수장이구요!”
“알아, 안다니까. 페로 관에서 온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계속 술을 권해서 나도 죽을 지경이었다고. 어휴, 골치야. 근데 웬일이냐니까.”
아메스가 술기운 때문인지 깨질듯이 아픈 머리를 싸쥐며 물었다.
“어휴, 전하, 아니 폐하께서 그냥 돌아가신 게 차라리 다행이네요. 이 꼴 안보고.”
“뭐, 뭐라고?”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아메스가 비단포 띠를 급히 다시 두르며 물었다.
“정말, 평소엔 똑소리나는 분이 왜 가끔씩 이렇게 생각없이 구시냐고요, 오늘이 황궁에서 처음 보내시는 날인데, 폐하께서 황후가 될 아씨한테 와 주무시지 그럼 누구한테 가시겠어요! 여기서 첫날인데!
“세상에, 그 망할 놈의 술 같으니, 제기랄, 이걸 어째, 이걸,”
정신이 든 아메스가 급히 거울 앞으로 달려가 허둥지둥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당장 폐하께 연락드리고 위층에 직접 올라가시라고요. 내려오시기만 기다리다가 늦어서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라고 둘러대시면 될 거 아니에요. 몸단장하고......”
뭐라 말하던 우베는 가지고 있던 할룩스가 울리자 급히 손에 움켜쥐었다. 그곳에서 들어온 시종장의 보고에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던 우베는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겠다며 침실로 돌아가던 아메스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방금 네페티 부인께서 전하 밤참거리 가지고 들어가셨다니까. 한발 늦었네요.”
“모렌 박사한테 물어봤더니 지금은 이게 제일 좋다는 거에요.......어휴, 존대말 쓰려니 되게 어렵네.”
네페티 부인이 결국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이제 습관을 제대로 들여야죠.”
네페티 부인이 내민 접시 안에는 선지와 생간 잘 썬 것이 포도주스와 함께 들어있었다.
“주스엔 잘 주무실 수 있게 붉은 포도주 조금 섞었고.......”
안 그래도 출출하던 카렐은 네페티 부인이 챙겨온 가벼운 밤참거리와 포도주스를 입에 넣으며 웃음을 지었다.
“이거 드시고 바로 주무세요. 전 방에 돌아갈 테니까. 의사가 한동안 몸보양에만 신경 쓰시라 했으니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푹 쉬세요.”
네페티 부인이 침대에 앉아있던 카렐의 등 뒤에 베개를 잘 대주며 말했다.
“오늘은 아메스하고 보내세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무조건 가시던지, 불러올려서 함께 보내세요. 그리고 내일 제게 오시면 됩니다.”
미련없이 몸을 일으킨 부인은 누워있는 카렐의 가슴에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십여명의 시녀들을 거느리고 황제 침실을 나선 네페티 부인의 입가에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는 149층으로 내려가 아메스에게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150층으로 올라가 보라는 말을 전할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쯤 카렐은 아메스를 반겨주기는 고사하고 고주망태가 되어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 뻔했다. 사실 그가 주스에 섞어놓은 것도 그냥 포도주가 아닌 독한 리커였다.
결과야 어쨌든 네페티 자신은 황후가 될 아메스에게 괜히 책잡힐 짓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황제 곁에서 잘 자려무나. 자이센 가 꼬마야.”
부인의 입가에 낮은 혼잣말이 맴돌았다. 자신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강한 소유욕과 숨겨진 적개심을 깨달은 네페티 부인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위는 양보했지만.......사람을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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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 잠들었던 네페티는 방 안에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소리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을 뜨고 한참 후에야 그것에 1급 보안경보라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소스라치게 놀란 네페티는 옆에 걸려있던 무명포와 머플러를 허둥지둥 걸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1급 보안경보라면 한두명이 아닌,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이 있음을 뜻하는 신호였다.
“행정소, 행정소......”
1급 보안경보시 행동요령을 급히 머릿속에 떠올린 네페티는 어느새 감기기운도 모두 잊은 채 이 찬 공기 속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 호수변에서 가장 가까운 ‘대피 포스트’는 섬 너머에 있는 행정소 건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섬’을 가로질러 행정소와 통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는, 제일 짧은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호수변의 몇 개 있는 초소들도 모두 텅텅 비어있었고 자신을 지켜줘야 할 경비병 역시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로서는 달리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들려온 거친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란 네페티가 큰 소리로 물었다.
“겨, 경비병이야?”
하지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 그 모습은 경갑옷에 칼을 차고 있어야 할 종가 경비병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물에 젖은 평상복 차림의 두 명의 괴한은 손에 칼을 들고 네페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헉!”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준 네페티는 섬을 향해 결사적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가족과 경비병들이 있는 ‘섬’까지만 가면 일단 안전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다행히 광택이 없는 그의 검은색 무명포는 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훌륭한 위장복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뒤를 쫓던 괴한들은 네페티의 흔적을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엄마.......오빠.......”
공포에 질린 네페티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섬을 향해 내달려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훤한 불이 켜져 있는 섬이 그의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선 듯 안도감을 느꼈다.
“어머니! 오라버니!”
큰 소리를 지르며 섬의 정자 앞에 막 뛰어든 네페티와, 이곳의 시체를 정리하고 있던 50여명의 폭도들, 그리고 투모카프 자이센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어, 엄마.......”
네페티의 핏발선 푸른 눈동자는 이미 숨이 거의 끊어진 채로 수십의 괴한들에게 둘러싸여 번갈아 능욕당하고 있는 어머니 마하 부인과, 주변에 흩어진 가족들의 처참한 시체를 본능적으로 훑었다. 네페티의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옅은 금발머리, 푸른 눈동자, 자그만 키를 확인한 투모카프의 표정이 순간 조금씩 일그러졌다.
“설마.......”
투모카프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이미 의식을 거의 잃은 마하 부인을 휙 돌아보았다.
“엄마.......”
벌벌 떨며 뒷걸음치던 네페티의 뒷덜미를 누군가가 덥석 움켜쥐었다. 놀라 뒤로 휙 돌아선 네페티는 자신의 팔을 붙든 괴한의 팔뚝을 이로 꽉 물어버렸다.
“아욱!”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괴한을 뒤로하고 네페티가 호수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년 잡아! 당장!”
도끼를 움켜쥔 투모카프가 정신없이 도망치는 저 조그만 여자의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눈앞을 가로막는 괴한들을 피해가며 결사적으로 도망치는 네페티의 눈앞에는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듯 차가운 호수물이 펼쳐져 있었다. 뒤를 휙 돌아본 네페티는 온통 피로 뒤덮힌 어머니 마하 부인의 얼굴과 아직까지 희미한 빛이 남아있는 그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네페티는 살을 에는 이 차가운 물 속에 서슴없이 뛰쳐들었다.
“당장 쫓아가!”
호수를 정신없이 헤엄쳐 도망치는 네페티를 가리키며 투모카프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이곳을 통해 침투하느라 몸이 바싹 얼어붙어 있던 부하들은 물 속에 들어가 채 몇 초를 더 버티지 못하고 덜덜 떨며 기어나왔다.
“호수를 포위해! 저년을 반드시 잡아내란 말이다!”
“엄마, 엄마......”
본능적으로 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네페티의 눈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12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했던 그때의 어린 소녀는 21살이 된 지금, 가족의 몰살이라는 끔찍한 현실 앞에 또다시 동댕이쳐져 있었다.
찬물에 체온을 뺏기면서 독감으로 약해져있던 몸이 조금씩 기운을 잃어갔지만 강한 생존본능은 떨어진 체력마저도 극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가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손발이 이미 냉기로 차갑게 굳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죽을 수는 없어......”
호수변 모래 위에 도착한 네페티가 헛구역질을 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물에 젖은 무명포 위로 희미한 김이 솟고 있었다.
“여기가......”
네페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이 인공호수의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이 있는 자그만 배수시설 앞이었다. 족히 40척 정도의 높이는 됨직한 큰 수문 밑으로 물을 뽑아내는 배수로가 종가 담장 밖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배수로는 수문과 연결된 단단한 금속제 철문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일단 종가 밖으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한 네페티는 배수시설 작동장치에 무작정 달려들었다. 이곳 밖으로 달아나려면 어떡해서든 저 철문을 열어야 했다.
“저기다!”
호수를 빙 돌아 이곳까지 도착한 폭도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순간 당황한 네페티는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저런 작동 키들과, 밸브들 위에 무어라 쓰여 있었지만 판단력을 잃은 그의 머리로는 무어라 쓰여있는 것인지 읽을 수조차 없었다. 닥치는 대로 키들을 조작하던 그는 무언가 우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종 판넬 조금 옆에, 육중한 손잡이 한 개가 안전장치가 채워진 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안전장치를 풀어낸 네페티는 그 작은 몸의 체중을 최대한 실어 그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제발! 제발!”
두 다리를 버티고 결사적으로 잡아당긴 손잡이에서 울려온 끼이익 하는 귀를 찢는 소음은 지금의 네페티에게는 감미로운 음악소리보다 더 달콤했다. 이 거대한 수문이 이 자그만 아가씨의 필사적인 발악에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집 밖으로 통하는 배수로의 철문 역시 조금씩 열렸다.
“저기다! 빨리 잡아!”
어느새 몇 발짝 앞까지 다가온 폭도들의 모습에 혼비백산한 네페티는 손잡이를 내버려두고 수문 위로 급히 달아났다. 열린 수문을 통해 호수물이 마치 폭포처럼 맹렬한 기세로 40척 아래 배수로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 까마득한 높이에 아찔해진 네페티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십여명의 폭도들이 손에손에 무기를 들고 궁지에 몰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호, 진짜 죽여주는데, 저년은 내가 1번이야.”
히죽거리던 한 녀석이 네페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네페티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녀석의 손은 이미 그의 옷소매를 꽉 붙들고 있었다.
“헤헤, 가만히 있어. 네 어미같이 해 줄 테니까.”
낭떠러지 끝에서 버둥거리던 네페티는 까마득한 수문 밑을 또다시 내려다보았다.
“누구.......맘대로......”
달아날 길이 없음을 깨달은 순간, 입술을 굳게 깨문 네페티는 몸을 휙 돌리며 수문 밑,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 속으로 무작정 몸을 내던졌다.
“뭐야! 이 미친년!”
괴한이 비명을 지르며 네페티의 소매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지만 그 맹렬한 물줄기에 휩쓸린 이 아가씨의 체중을 받치기는 역부족이었다. 소매 찢어지는 듣기싫은 소리와 함께 검은 무명포 차림의 네페티는 물살에 휩쓸리며 수로 밑으로 내리꽂혔다.
“아, 아악!”
쏟아지는 물과 함께 배수로 바닥에 동댕이쳐진 네페티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지독한 통증이 그의 다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수로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나가던 네페티는 주변의 물이 붉게 변해가는 것을 눈치챘지만 물에 휩쓸려 호흡조차 곤란해진 지금으로서는 자신의 다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급류는 고통에 울부짖는 이 나이어린 아가씨를 실은 채 종가 밖으로 맹렬히 흘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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