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83화 (382/1,132)

< -- 383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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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가!”

발끈한 발리는 말 뒤로 숨어버린, 아니 옆으로 미끄러져버린 보벤 대신 말의 목을 힘껏 찔렀다. 막 가속하려던 차에 창에 목이 관통당한 말은 공중을 한 바퀴 빙 구르고는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으익!”

넘어지는 말 안장에서 거칠게 튕겨나간 보벤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말과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등자가 문제였다. 등자에 낀 오른쪽 발을 미처 끄집어내지 못한 보벤은 바닥에 쓰러지는 육중한 말의 몸체에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대장님을 구해!”

보벤의 근위기병들이 쓰러진 대장의 주변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귀찮은 것들이!”

거구의 발리가 그들 동부 근위기병들을 육중한 창으로 후려쳐 떨어뜨리는 동안, 다른 동부기병들이 말에 깔려 신음하던 보벤을 힘겹게 끄집어냈다.

“중앙으로! 중앙으로 옮겨드려!”

보벤의 부장이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사령관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동부기병들을 무섭게 뒤흔들었다. 남부제후군과 합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퇴각하던 동부기병들은 보벤을 추스르기 위해 일단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서부 낙타병부대와 슈로 기사단이 다시 쫓아옵니다!”

“적이 퇴각속도를 늦췄다! 기사단 1, 3연대는 남쪽! 2, 4연대는 북쪽을 치고 낙타병은 중앙을 돌파한다! 슬레이프니르는 서쪽에서에서 엄호사격!”

기사단 선두에서 돌진하던 제네르가 각 부대에 바로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명령에 동맹군 기병들은 퇴각속도를 늦춘 동부기병을 재빨리 포위하고 기다렸다는 듯 덮쳐왔다. 무적을 자랑하던 동부기병들도 같은 전법을 구사하는 동맹군 기병과 육중한 서부 낙타병부대의 연합공격에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저 한심한 새끼, 호랑이 부대에 고양이 지휘관이구나.”

외곽에 적당히 떨어져 남 일 구경하듯 전황을 살피던 릴라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달랑 50명 남은 그의 기병들로 저 난리통에 끼어들어 2만에 가까운 적 기병들과 싸움을 벌일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개인적인 공명심에 몇 안 남은 부하들까지 저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대담한, 아니 멍청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쯧쯧, 다히르 경만 나왔어도 저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전공에 미쳤군.”

아버지 샤자한 공에게 유배조치당했다는 그를 떠올리며 릴라크는 한가롭게 물이나 들이켰다.

1만기나 되는 어마어마한 기병을 이끄는 대장이 저렇게 적 앞에 몸을 내놓았던 것부터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대규모 기병을 맡은 저 젊은 무장이 의욕이 앞섰는지 중장기병 선두에 멋대로 튀어나온 대가였다. 실력이나 대단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면서.

“저흰 뭘 하지요?”

부장의 질문에 릴라크가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됐어. 어차피 이기기는 글렀어. 적은 초장부터 사생결단하고 나왔는데 선발대가 절단나지나 않으면 우리 입장에선 그럭저럭 선방한 거야. 근위대들이나 와서 도와주면 모를까 이기는 건 이미 틀렸어. 뭐, 싸우고 싶은 놈은 안 말릴 테니까 가 봐. 난 착한 남편하고 젖먹이 자식새끼 얼굴 생각나서라도 여기 그냥 있을 테니까.”

괴상한 대장만큼이나 괴상한 부하들이 릴라크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군’들이 짓밟혀 죽어가는 와중이었지만 가문도 다른 카산드라 경의 남부연합군에게 그들은 아직 ‘전우’라는 느낌은 갖고 있지 못했다. 물론 바로 지난달까지도 적군으로 싸웠던 동부기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냉소적으로 키득거리던 릴라크는 물 한 모금을 더 들이키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내가 벌써 늙었나.’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똑똑 두드리며 동부기병들과 한참 전투중인 카렐의 동맹군 기병대를 쳐다보았다.

‘왜 저네들하고는 싸우기가 싫을까?’

남부-동부기병들을 완전히 와해시킨 그들은 카산드라 경의 보병대까지 몰려가 사방에서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되어가는 꼴을 보아 잠시 후면 어제 탈라스에서 케세크 경의 남부보병대가 동맹군 기병대에 포위 전멸당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듯싶었다.

제네르의 슈로 기사단과 하지즈 장군의 서부 낙타병부대가 동부와 남부 기병들을 짓밟는 동안, 베아트릭스가 이끄는 7천의 슬레이프니르는 4만의 남부 보병대를 새카맣게 에워싸고 집중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기병대의 측면 엄호를 잃은 보병들에게는 장거리에서 사격을 퍼붓는 이들 발빠른 경기병들에게 제대로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쉴 틈도 없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투창에 남부 보병들은 큰 사각방패로 사방을 가린 채 느릿느릿 걸어 기병들에게 접근해가는 나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일초라도 빨리 나아가 기병들과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굼벵이처럼 전진했다가는 도대체 언제 기병들의 전장에 도착할 수 있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중무장한 중장보병들은 경보병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루코프의 경창기병 2천은 남부보병대 선봉에서 접근해오던 경보병 1만의 텅 빈 측면으로 기세등등하게 돌격했다. 비록 중장기병은 아니었지만 짧은 창과 가벼운 갑주로 무장한 경보병들을 맘껏 짓밟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적 참모장 카산드라 호지 경은 보병대 진형 중앙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보급병으로부터 새 투창 두 꾸러미를 건네받은 베아트릭스는 부장 갈라크의 보고에 대뜸 입을 씰룩거렸다. 말에 싣고 온 퀴버 두 통을 다 비울 정도로 사격을 퍼부었지만 역시 견고함으로 유명한 남부 중장보병답게 꿋꿋하게 진형을 지키며 기병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쉴새없는 사격으로 적의 진격속도를 많이 늦추기는 했지만 경기병은 뒤이은 중장기병이나 보병의 돌격이 없이는 그 자체로 ‘결정적인 타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저 노련한 백전노장이 위험한 일선에 섣불리 머리를 내밀 것 같지도 않았다.

“별 수 없지. 기사단에 시간 벌어 주고 놈들 사역병 잡아 죽인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놈들 군수품은 남김없이 다 태우는 거 잊지 마라.”

동부기병들과 격렬한 혼전을 벌이고 있는 기사단을 힐끔 돌아본 베아트릭스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 입가를 씰룩거리고는 다시 투창을 뽑아들었다. 비록 군데군데 무너지기는 했지만 보벤이 데려온 1만의 동부기병들은 기사단과 낙타병부대의 거듭된 공세에도 여전히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부기병이나 기사단이나 개개의 기량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제 1대1 난전이 되었으니 지휘관의 기량이야 그다지 중요한 상황이 아니고.”

“보벤 그 놈을 잡으란 말이다!”

창을 번쩍 치켜든 제네르가 적 기병들 중앙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그때, 북쪽의 서부 낙타병부대 쪽에서 와아 하는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걸려들었다!”

동부기병들 중 한 무리를 떼어내는 데 성공한 서부 낙타병부대장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백여기의 낙타병들을 직접 거느리고 그 중심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갔다. 3제후 하크로딘 가를 나타내는 전갈 문장 장군기(旗)를 둘러싼 60기 정도의 그 동부 중장기병들은 맞받아 돌진해야할지, 도주해야 할지도 판단내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잠시 우왕좌왕거렸다. 이 순간, ‘장군’이라는 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돌격! 나를 따르라!”

머뭇거리는 지휘관을 결국 보다 못한 부장이 장군기를 든 기수에게 따라오라 손짓을 하며 그들 낙타병을 향해 창을 세우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기병들 역시 자신들의 장군이 직접 앞장서는 것으로 알았는지 큰 함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돌격진형을 만들며 나아갔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돌격하는 그들 뒤에 남은 십여기의 기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약간 다른 모양의 갑주를 걸친 자가 있었다.

언제 풀어버렸는지, 입고 있던 초록색 망토까지 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젠장! 저, 저놈들이 감히 명령도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고 있던 그 ‘장군’은 부장과 휘하 기병들이 적과 맞싸우기 위해 용맹하게 돌진한 틈을 놓치지 않고 휙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돌격하는 부하들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던 그 ‘장군’은 서부 제일의 무장으로 손꼽히던 아쉬드 하지즈 장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돌격하던 하지즈 장군은 뒤따르는 낙타병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깃발 든 무리는 내보내줘라.”

“예에?”

낙타병들은 순간 의아해했지만 그의 명령대로 썰물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장군기를 앞세우고 자신들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해 온 부장과 그의 기병 50여명에게 즉시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즈 장군은 그들을 무시한 채 계속 돌격해가고 있었다.

“뭐, 뭐야!”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했던 그 동부기병들은 적들이 난데없이 길을 열어주자 도리어 당황한 듯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내버려둔 채 본진 쪽으로 혼자 도망치고 있는 자신들의 ‘장군’과, 그의 뒤를 쫓는 아쉬드 하지즈 장군을 잠시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한심한 새끼! 저 새끼만 잡아!”

극을 높이 치켜들고 몸을 바싹 곧추세운 하지즈 장군은 자신의 건장한 백마에 박차를 가하며 ‘장군’과, 그의 십여기의 기병들 뒤를 쫓았다.

“으, 으악!”

뒤를 쫓는 무장의 그 쩌렁쩌렁한 함성에 놀란 ‘장군’이 비명을 지르며 함께 도망치는 기병들에게 가서 뒤를 맡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동료들의 돌격에서도 눈치를 보며 빠졌던 겁쟁이들이 그 명령을 따를 리가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진 그들은 도리어 말에 더 박차를 가하며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장군’은 부하들에게도 조금씩 처지고 있었다.

“이놈! 무장의 수치구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고함소리에 뒤를 돌아보려던 ‘장군’은 바로 그의 목 옆까지 날아와 번쩍거리고 있는 시퍼런 도끼날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육중한 무기가 그의 갑주와 목 근육을 찢으며 살을 파고든 순간까지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를 울리며 그의 목을 내리찍은 하지즈 장군의 도끼날은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의 궤적을 남기고 공중을 붕 날았다.

“우라질, 이런 놈이 귀족이었다니.”

목이 거의 잘려나간 채 말에서 떨어진 시체를 툭툭 두드리며 하지즈 장군이 입을 씰룩거렸다. 말에서 얼른 뛰어내린 그의 부장이 도끼로 ‘장군’의 투구를 벗기고 목을 완전히 끊어내 하지즈 장군에게 바쳤다.

“이게 누구냐?”

하지즈 장군의 질문에 누군가가 대신 대답했다.

“잘루크 하크로딘. 3제후 하크로딘 가의 종손자군.”

하지즈 장군은 어느새 뒤따라온 상장군 제네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럴 줄 알았지. 이런 놈을 장군으로 다시 삼았다니.”

제네르는 지난 ‘루사의 회전’에서도 무능한 지휘로 자신에게 지휘권을 박탈당했던 그 한심한 청년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퉤 뱉었다. 어딘지 고소하기도 했지만, 같은 하크로딘 가 사람의 수급을 보는 것이 마음에 편치만도 않았다.

“정말 수고하셨소. 하크로딘 가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겠군.”

제네르가 짐짓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코리온의 처형장에서 종장 플로브 경이 카렐 손에 죽었고, 바로 오늘 그 후계자까지 죽었으니 이제 후계권을 놓고 그 가문이 시끄러운 소동에 휩싸일 것이 확실했다.

“상장군님, 근위대 수송선입니다! 지원군인 것 같습니다.”

스캐너를 살피던 발리가 제네르에게 큰 소리로 보고했다.

“슬슬 물러나야겠군. 부상병들을 남김없이 챙겨라. 행방불명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낙타병부대부터 퇴각한다.”

적 중장보병대와 근위대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제네르는 한참 승기가 올라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전군에 퇴각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가장 느린 낙타병 부대를 선두로 모든 기병들이 1번 도시권역으로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동부기병은 동부기병이군요.”

하지즈 장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때 원수같이 여겼던 제네르와 나란히 말을 달렸다.

“완전히 작살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남부기병들을 박살냈고, 보벤 놈에게 중상을 입혔고, 하크로딘 가 후계자의 수급을 얻었으니 이젠 된 것 아니겠나. 이렇게 겁을 주었으니 녀석들의 황궁진격도 적어도 며칠은 늦어지겠지.”

제네르는 별 불만 없는 듯 피식 웃음까지 지었다. 하지즈 장군은 웬만한 무장이라면 승전의 흥분에 휩쓸려 계속 공격을 명했을 그 타이밍에도 병사들에게 주저없이 퇴각을 명하는 이 냉철한 지휘관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보았다. 채 30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의 교전이었지만 적 선발대부터 그 기세를 죽인다는 목표 하나는 제대로 달성한 셈이었다.

나이만 분지 바로 바깥의 이 전장에는 말과 사람의 숱한 시체와 말에서 떨어져 신음하는 부상병들이 널려있었다. 35만 남-동부연합군의 첫 발자국은 이렇게 자신들의 피로 더러워진 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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