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88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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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밑에서 노예문을 지우는 라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유전자제제를 투여해도 기왕 나타나있는 노예문은 없어지지 않는 덕에 이렇게 노예문을 태워 없애는 고통스런 단계가 필요했지만 황제의 특명으로 ‘면천’을 받은 상황에 그런 잠깐의 고통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라쿠니어스 세닉. 서부 아켐 3번 행성, 발 가 영지에 등록된 평민. 면천된 노예라서 마지막 주인의 성이 주어지는데 황족 성을 받을 수는 없고, 대신 학장님 아버님 성을 받은 거야. 대대손손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이니까 잘 알아둬.”
하심이 라스에게 새 신분증을 내밀었다. 어엿한 ‘서부 시민’이 된 라스는 새 신분증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병상에 말없이 누워있던 코리온은 너무도 좋아하는 라스의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곧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심이 다시 물었다.
“계속 학장님 몸종 하기로 했다며?”
“예.”
라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학교 교무과에 네 신분을 학장실에 소속된 ‘직원’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1년에 1천5백 골드정도 봉급도 나올 거다. 많지는 않지만 어차피 학교에서 먹고 잘 테니 별로 쓸 일도 없겠지. 그래도 집도 마련하고 결혼이라도 하면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할 테니.”
“지금 이대로도 좋아요.”
라스가 또다시 그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황상께서 드십니다.”
밖에서 들려온 우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하심이 급히 옆으로 비켜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우베와 함께 병실에 들어온 카렐은 목 아래에 반창고를 붙인 라스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노예문을 지웠구나.”
“예. 그렇습니다.”
바닥에 엎드려있던 라스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별 생각 없이 머리 옆을 더듬던 카렐은 머리에 쓴 조우관의 깃털이 뒤로 벌렁 누워있는 모습에 대뜸 문을 돌아보았다. 문 높이만으로 치면 큰 키의 카렐이 드나들기에도 크게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양쪽 관자놀이에 꽂은 이 깃털은 드나들 때마다 이렇게 병실 문틀에 매번 걸리곤 했다.
“하여간 큰 키도 문제로군. 명색이 황제가 여기 올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하겠남?”
깃털을 다시 세우며 투덜거리는 카렐의 모습에 그 뻣뻣한 코리온도 잠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하심이 라스를 데리고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자 카렐은 누워있던 코리온을 직접 일으켜 병상에 앉혀 주었다.
“예상대로, 플레렌 가와 세호 가, 이스마엘 가에서 야만족 용병 모집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요. 아무래도 놈들이 탈라스를 조만간 재침공할 것 같소.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것이지만.......영 골치군요. 그쪽에 있는 제르베 경이나 나람 부인이나 카이두 경 모두 나름대로 쓸 만한 무장들이기는 하지만 그 모두를 강력하게 이끌 수 있는 정치력이나 식견을 지닌 전략가가 없어서 문제요.”
카렐의 넋두리에 코리온이 입가 가득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지는 대로 소인을 탈라스에 칙사로 보내주십시오. 그들 야만족의 침공은 단순히 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옵니다. 소인 수베르는 물론이고 아라무트와 탈라스까지 어린 시절 떠돌며 체득한 것이 있어 나름대로 재산을 삼고 있습니다.”
“직접 가겠단 말이요? 그다지 좋은 기억이 남은 곳도 아니지 않소?”
다른 곳도 아닌, 탈라스의 그 바위사막에 직접 가겠다는 말에 카렐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코리온은 평소처럼 너무도 차분한 태도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지하12층인들 다시 못 가겠습니까.”
문득 고개를 치켜든 코리온이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침소에서의 내명부 비빈이 아니고서는 감히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법도를 내놓고 어긴 코리온도,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까지 짓는 카렐도 이 상황이 너무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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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코리온을 파예드 아카데미 사장지학 학부과정에 추천 입학시킨 주페는 사실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약물중독에서 이제야 막 벗어난 이 20살 청년은 원래 성격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갇혀 지내던 중에 비뚤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걸핏하면 나타나는 그 지독한 공격성을 웬만한 교수들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번은 사장지학 학부과정에서 40여년간 잘 쓰여 온 교재를 교수 회의실에 들고 와서는 83군데의 논리적 오류를 찾아냈다며 교재를 바꾸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멱살잡혀 끌려나오기도 했고, 유곽에 드나든 죄로 징계위원회에 넘겨진 박사과정 생도를 참수해야 한다며 대자보를 붙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남극성당을 때려쳤던 옛날 버릇 역시 그대로 남아서 ‘이놈의 학교’도 도저히 못 다니겠다며 자퇴서를 쓰던 것을 억지로 뜯어말린 일은 이제 헤아리기도 골아플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성적이라고 제대로 나올 턱이 없어서, 추천입학생으로서 첫 학기 성적 평균이 상등급에 들지 못하면 퇴학당한다는 규정으로 하마터면 학교에서 쫓겨날 뻔 하기도 했다.
“넌 네 스스로의 분노를 통제하는 것부터 좀 배워야겠구나.”
학교 주변 유곽과 유흥가를 모두 없애야 한다며 기름통과 불을 들고 난동을 피우다가 또다시 학생감옥에 갇혔던 이 골칫덩이 조카를 학장에게 애원하다시피 해 가까스로 빼내온 주페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옥에서 굶어 배고플 테니 식기 전에 빨리 먹어라.”
초췌해진 몰골의 조카에게 따뜻한 옥수수죽과 빵, 치즈를 내밀며 주페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죄인처럼 말없이 숟가락을 집어든 코리온의 그 고운 얼굴에는 치안대와 몸싸움을 하다가 다친 것인지 군데군데 상처가 널려있었다.
아켐 4번 행성의 남극 부근 호수가의 조용한 식당에 코리온을 데려온 주페는 잔뜩 풀 죽은 얼굴로 마지못해 옥수수죽에 수저를 가져가는 조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등을 따뜻하게 짚어준 주페가 차분하게 말했다.
“네 뜻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서슴없이 행동에 옮겨야 하겠지.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과도 이렇게밖에는 못나오는구나.”
“하지만......”
“옳은 뜻은 경전을 읽어 누구든 쉽게 알 수 있으나 이를 진정으로 깨닫고 옳은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이란다. 너는 세상을 알고는 있으나 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구나.”
코리온의 고운 손등을 쓰다듬어주는 주페의 손은 전장에서 남은 흔적인지 3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갈라지고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었다. 옥수수죽을 떠먹으며 코리온은 한참동안 별 말이 없었다.
분위기를 돌려볼 말을 찾던 주페의 시선이 이 키 큰 조카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잠시 훑었다.
“그런데.......머리는 왜 안 깎고 있는 거냐?”
고개를 갸우뚱거린 주페가 코리온의 어깨까지 내려온 길고 검은 머리칼을 가리키며 물었다.
“6달 전에 긴 머리가 더 어울리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코리온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주페가 고개를 또다시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랬던가? 후훗, 내가 발현자 맞는 거냐? 왜 내가 한 말도 기억 못 하고 있는 거지?”
주페의 실망스러운 반응에 코리온이 울상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5월 31일에요, 대강당에서 파티 할 때요, 그때 소주 한 잔 하시다가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제 얼굴이 갸름하니 앳돼보여서 머리 기르면 정말 잘 어울리겠다고......”
“아아, 그땐......”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주페가 얼른 조카의 눈치를 보았다. 눈앞의 조카에게는 퍽이나 미안한 노릇이지만, 그건 코리온이 아니고 함께 있던 다른 여교수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주페는 저렇게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코리온에게 사실대로 말해줄 정도로 모진 성격은 되지 못했다.
“으, 응, 그래, 내가 정신이 없어 깜박 했구나. 그래서 기르고 있는 거냐? 내 예상했던 대로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머릿결도 곱고......”
주페의 어거지 찬사에 코리온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그의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주페가 새삼스레 웃음을 지었다. 그의 지금까지 저지른 그 많은 기행들도 결국은 스스로에게 너무도 솔직한 성격 때문임을 주페는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주페가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같은 발현자인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그런 안 좋은 일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뒤늦은 죄책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그의 이런 천진난만함은 최소한 옛날의 기억들이 그의 본성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학교에서 다른 일 있으세요?”
기분이 한결 나아진 코리온이 빵을 씹으며 물었다. 저녁에 접어들면서 이 조용하고 잔잔한 호숫물 위로 붉은 노을이 조금씩 드리우고 있었다.
“글쎄다. 아직 따로 생각한 건 없는데.......”
“저하고 같이 어디 좀 가실래요?”
코리온의 느닷없는 제안에 주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으익,”
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속도에 깜짝 놀란 주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어디서 무얼 주섬주섬 모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이 탈탈거리는 ‘비행체’는 안전장치는 고사하고 이런 야간비행을 위한 전자장비하나 갖춰져 있지 않았다.
넓적한 두 겹의 날개와 꽁무니에서 요란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잠자리 날개 같은 것 두 개, 그리고 날개 사이에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가까스로 쭈그리고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의 의자, 아니 그냥 널빤지가 고작이었다.
두 개의 막대기로 된 조종간을 쥐고 혼자 환호성을 지르던 코리온은 바람에 눈도 못 뜨고 있는 주페에게 요즘은 쓰이지도 않는 구형 스코프를 불쑥 내밀었다. 궁색하나마 그것이라도 눈에 낀 주페는 기계가 갑자기 계곡 밑으로 곤두박질치자 깜짝 놀라 온몸을 잔뜩 움츠렸다.
“푸하하하!”
난생처음 들어보는 조카의 큰 웃음소리에 주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너무도 행복해하고 있는 이 청년의 얼굴이 있었다. 계곡 밑으로 당장 추락할 듯 곤두박질치던 기계는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어 계곡의 상승기류를 타고 다시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기계가 정점을 찍고 빙 돌아 떨어지기 시작하자 코리온이 이번엔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주페는 머릿속까지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착륙시키라고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 혹은 너무도 즐거워하고 있는 이 조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보면 니 엄마 그대로 닮았구나.”
바닥 널빤지를 꽉 붙들고 식은땀을 흘리던 주페가 호통 대신 엉뚱한 말로 놀란 가슴을 달랬다.
“저요! 드릴 말씀 있는데요!”
요란스런 엔진 소음에 코리온이 한쪽 귀를 막으며 큰 소리로 주페에게 외쳤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리니까 그냥 말해.”
귀에 대고 악을 쓰며 외치는 목소리에 더 놀란 주페가 기겁을 하며 대꾸했다. 이 둘의 발밑으로 울창한 수풀이 당장이라도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숙부님이 제 곁에 계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또다시 솟구친 기계가 공중을 한 바퀴 팽그르 돌고 다시 떨어지자 이번에도 기겁을 한 주페가 깔고앉은 널빤지를 더 꽉 붙들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 그래.......다행이구나.”
코리온이 주페의 귀에 대고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제 곁에 계속 있어주실 거죠!”
“물론.......그러마.”
다시 평형을 찾은 기계가 앞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날기 시작했다. 바싹 붙어 앉아있던 둘의 옷자락이 바람에 요란스레 펄럭였다. 지독한 멀미와 현기증을 참다못한 주페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거 언제까지......”
파랗게 질린 주페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코리온이 대뜸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해주시면 내려드릴게요!”
“무슨 말?”
“다른 사람 말구요, 꼭 제 곁에만 있어주시겠다고 말해주세요!”
이미 창백해져있던 얼굴에서 그나마 핏기마저 싹 가셔버린 주페가 옆에 붙어 앉은 이 조카를 휙 돌아보았다. 옆으로 기운 이 ‘기계’가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었지만 주페는 그것도 모르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손에서 갑자기 힘이 풀리면서 주페는 하마터면 널빤지 옆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코리온이 얼른 팔을 뻗어 주페의 허리를 한손으로 꽉 붙들었다.
“말해주세요! 제 곁에만 있으시겠다고요!”
어느새 먼지로 더러워진 스코프 너머, 잔뜩 긴장한 듯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 조카의 갈색빛 맑은 눈동자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잠시 제자리를 계속 선회하던 기계는 다시 균형을 잡고 앞으로 똑바로 날아갔다. 주페는 도대체 무어라 대답을 해주어야 되는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점점 더 요란해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기계는 마치 폭주하듯 앞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었다. 코리온이 주페의 손을 꼭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요......”
희미한 한숨을 내쉰 주페는 코리온의 희고 고운 손을 조심스레 쥐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내 네 곁에만 있어주마. 네 곁에만.”
순간 날카로운 휘파람소리, 그리고 주페의 비명소리와 함께 이 탈탈거리는 비행체가 또 한 번 요란스레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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