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89화 (388/1,132)

< -- 389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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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지역 서북쪽의 성지인 ‘13선지자의 묘’가 위치한 2번 도시는 황제가 만일 주궁을 빼앗겼더라도 여유 있게 피신할 수 있도록 1번 도시에서 지상으로는 그 서쪽 반대방향에, 대양인 ‘마이뉴의 바다’를 건너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요충지였고 프라임지역 제3의 도시였다.

온난한 해류가 지나가는 해안가 좁은 반도에 위치한 이 도시는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도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아케메니안의 주궁과는 달리 1년 내내 큰 변화 없는 온화한 날씨를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 위치한 ‘사오시안트 별궁’은 자신과 황실의 안전에 관해서라면 거의 강박관념까지 가지고 있던 세나우스 2세의 집권 말기에 지어진 곳인 만큼, 궁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요새라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일단 이곳의 동, 서, 남쪽은 까마득하게 높은 해안가 수직 절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2번 도시에서 이어진 유일한 통로인 북쪽의 좁은 진입로는 그 폭이 기껏해야 50스타디아 정도에 불과해서 몇천 정도의 정예병들만 동원해도 백만 대군으로도 뚫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이곳의 규모나 시설 역시 그 훨씬 이전에 지어진 타르서스의 별궁에 못지않아서, 40층 높이의 넓적하고 위압적인 성을 중심으로 방어설비가 밀집한 3중의 요새방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비록 건물 자체의 높이는 타르서스 별궁보다 낮았지만 그 연면적은 2배가 넘었고 황궁과도 4개의 별관을 뺀다면 큰 차이가 없는 정도였다.

서부냄새가 물씬 풍기는 타르서스 별궁과는 달리 남부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세나우스 2세의 허영심에 걸맞게 내부의 화려함 역시 본궁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황궁에서 퇴각한 근위대와 남부 세력의 새로운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417년 5월 14일, 창건 이래 가장 요란스런 하루를 맞은 이곳 대강당을 꽉 채운 남, 서, 동부제후들은 이 ‘두 번째의 대관식’ 이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잔뜩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나우스 4세 수우 플레렌 델루지 폐하께서 드십니다!”

베흔이 강당 뒤쪽의 큰 문을 열어젖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2천여 명의 근위대원들이 홀 주변을 삼엄하게 에워싼 가운데 황제의 면복과 면류관을 갖춘 화려한 모습의 수우가 베흔과 형 제롬의 인도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수우의 황비로 예정된 구르베스가 아버지 샤자한 공과 함께 들어왔고, 황빈으로 예정되어있는 동부 3제후 플로브 하크로딘 경의 손녀딸, 남부 3제후 카산드라 호지 부인의 손녀딸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휴우.”

단 밑에서 숨을 한 번 가다듬은 수우는 단상을 잠시 올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머리에 쓴 면류관과 몸에 걸친 면목이 너무도 무겁다고 느꼈다.

“뭐 하는 거냐.”

제롬이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형의 재촉에 말없이 한숨을 내쉰 수우는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랐다. 남, 동부 두 지역의 최고제후와 서부의 실권자 칼림 경, 황실의 실질적 권력인 황실 근위대, 그리고 부총리와 내각의 기존 5대신 중 4명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그 세력은 어느 모로 보아도 카렐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령의 지방관료 역시 프라임 지역 10곳 중 3번 도시만을 제외한 9명의 시장---물론 1번 도시는 사실상 도시를 잃으면서 이름만 남았지만---과 수에니, 남극 지사까지 기존 세력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번 대관식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하지만 관료와 제후의 이런 호화진영과는 달리 가장 큰 문제는 이번 대관식의 ‘주체’에 있었다.

“휴우......”

옥패를 들고 서 있는 남극성당 부제학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우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리온과 세네피스 황후, 제네르까지 3학파의 수장을 모두 손아귀에 움켜쥐면서 유학자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치른 카렐의 대관식에 비해 수우의 대관식은 어딘지 허전했다. 물론 기존 고위관료들을 거의 빼놓고 치렀던 카렐의 대관식 역시 그렇게 보면 포고령에 제대로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사실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껏 황제들 중 그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켜 대관식을 치른 예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만.

“새 황제께 이 옥패를 바치옵니다. 즉위를 하례드리옵니다.”

부제학이 자리에 꿇어앉으며 수우에게 옥패를 바쳤다. 바로 어제, 분노한 세네피스 카파키 대제학으로부터 ‘강의제외’ 명령을 받은 이 중도파 유학자는 ‘차기 대제학’이라는 떡고물이 아니었다면 다른 유학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굳이 이 자리에 설 필요도 없었다.

물론 원리주의와 개혁파가 완전히 카렐에게 붙었다면 중도파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옷을 갈아입어온 그들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분열되어 그중 많은 다수가 수우 편에 섰다는 것이 그나마 이쪽에는 다행이었다.

옥패를 받아든 수우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저 많은 제후들과 고관대작들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제국민이면 그 누구든 서고 싶어할 이 절정의 순간에 수우는 이상하게도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수우 플레렌 델루지는 제니안 지도자 리 리쿠와 앞서가신 세 분의 선대황제폐하의 뜻을 받들어 제국의 네 번째 황제가 되었다. 짐은 곧 제국이니, 제국의 모든 인민은 짐에게 복종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수우의 어딘지 자신 없는 외침에 답하여 당하에 도열한 수천의 사람들이 외치는 큰 함성소리가 강당 안을 뒤흔들었다.

“세나우스 4세 수우 황제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입술을 살짝 깨문 수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도,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5월 14일, 이날은 제국사상 초유의 ‘2황제 시대’가 개막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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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렌 종가를 차지했던 제수스 자이센의 폭도들은 베흔과 미리 약속한대로, 그 일대를 무려 4일간 맘껏 약탈한 후에야 제 발로 물러났다. 그리고 근위대 지부에서 보호를 받던 네페티도 난장판이 다 되어버린 집으로 그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종가의 학살극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네페티가 가족의 장례식 이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직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북부에 있는 약혼자 오르마즈에게 냉큼 찾아간 것이었다. 내심 그가 자신을 ‘생명의 은인’ 그 이상으로 여겨주기를 바랐던 베흔이었지만 여자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페티가 북부에 가 있는 동안, 내내 서부를 떠나지 않은 베흔은 오르마즈의 품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애써 달래는 그 미녀의 모습만 상상하며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사실 네페티가 북부에 찾아간 건 단순히 기댈 사람을 찾기 위함만은 아니었지만, 아직 베흔의 눈에는 저 어린 아가씨가 마냥 순하고 멍청하기만 한 부잣집 영애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착각은 신임 서부 최고제후로서의 즉위식을 막 마친 저 21살의 나이어린 아가씨가 처음으로 주재한 가문 원로회의 석상에서 확인되었다.

“일단 가문의 상황이 이러하니 서부가 정상화될 때까지 학교를 얼마간 휴학할까 합니다.”

그 자그만 몸에 안 어울릴 정도로 큰 종장석에 자리잡고 앉은 ‘네페티 공’이 플레렌 가 원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수스 자이센의 무리가 당장 이곳에서 달아났으나 사막의 모처에 은둔해 있고, 3번 행성의 세호 가 영지 쪽으로 도리어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니 우리 가문의 제후군만으로는 감당하기에 어려울 것입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상위 5개 가문 제후들을 모두 불러모아 토벌을 위한 연합군을 조직해야겠습니다.”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나온 연합군 결성안에 원로들이 살짝 얼굴들을 찡그렸다. 사실 그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건 연합군 결성에 반대해서는 아니었다.

“제법인걸.”

네페티의 숙부인 칼림 플레렌 경은 옆에 앉은 다른 원로의 귀엣말에 입만 삐죽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마오빠 찾으면서 울고 짜고나 있을 줄로 알았더니, 저 노트에 적어온 것 좀 봐.”

칼림은 짐짓 관심 없는 척, 네페티의 손에 들린 빽빽한 노트를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가 결국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둘 중의 하나겠군. 그간 발톱을 숨기고 있던 거던가, 아니면 그 잘난 약혼자의 지시를 받아온 것이던가.”

“솔직히 첫째는 아닐 것 같은데?”

동료의 말에 칼림이 처음으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네페티는 단호한 어조로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총 7만의 연합군을 결성하되, 우리 가문에서는 2만, 세호 가와 발 가에서는 1만5천, 샤디 가와 이스마엘 가에서 각각 1만씩의 병력을 차출해 그 사령관은 칼림 숙부께서 맡으시는 것으로 우리측 안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저는 군문에 아직 무지하니 그 외 세부사항들은 칼림 숙부께서 다른 가문과 상의해주시면 합니다.”

“알겠네.”

칼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네페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최고제후로서 이렇게 미혼으로 남아있는 건 현명치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제가 약혼자가 없던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어머님과 오라버니의 뜻대로 이미 정혼한 상대가 있으니 최대한 빨리 정식 혼례를 올리려 합니다.”

가문 원로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지난번 ‘종장의 여동생’으로서 오르마즈와 약혼을 했을 때만 해도 그들이 전혀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종장, 그것도 겨우 21살의 풋내기 최고제후가 그 막강한 오르마즈의 혼인한다는 건 가문 전체가 사실상 오르마즈의 손아귀에 쥐여진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원로회의 동의를 얻어 정식으로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종장이 결혼을 서두르겠다는데 이제와 딱히 반대를 할 명분이 없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칼림이 눈을 매섭게 부릅뜨며 말했다.

“종장 뜻은 알겠으나 지금 상중이니 상주인 종장은 3년간은 정실혼이 불가하네. 그러니 3년 후에......”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허나, 종장의 대가 끊길 수 있는 상황에서는 황상의 윤허를 얻어 상중에 혼인한 예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현재 사실상의 내전중이고, 저는 아직 미혼에 형제자녀조차 전혀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혼인해 가문을 안정시키는 것이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장 내일부로 황상께 제 혼례를 허락해주실 것을 청원할 예정입니다.”

네페티가 원로들을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마치 통고하듯 말했다. 그의 파란빛 눈동자는 회의 시작 이후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숙부 칼림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역시도 저 간사한 원로들, 특히 숙부 칼림이 이런 권력공백을 조용히 넘기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가문 내에 변변하게 기댈 세력도 없는 그였지만 최소한 스스로의 이런 한계를 알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했다. 그의 앞에는 저 탐욕스런 원로들에게서 자신의 종권을 지켜내야 할 무서운 권력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오르마즈와 하루빨리 정식 혼례를 올리고, 그를 이곳 아켐으로 불러들여 의지하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3년상을 끝내야만 했다. 3년, 눈앞의 저 탐욕스러운 원로들에게서 홀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3년은 그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제수스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베흔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아켐 사막의 이곳 폭도 근거지로 온 이후에도, 베흔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꼴 보기 싫은 놈 꼬투리 잡아서 두들겨 패 주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나.”

베흔은 아직 핏자국이 남아있는 신발 코를 내보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그래, 네놈답구나. 그게 누군데?”

“알 것 없어.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냥 북부 놈이라는 것만 알아 둬.”

“그건 그렇고, 네페티인가 그년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인사말을 끝낸 제수스가 대뜸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년, 내가 달아난 위치를 알려준 건 그년 때려잡아 달란 거였지 멋지게 구해오란 건 아니었을 텐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제수스의 추궁에 베흔이 궁색하나마 변명을 늘어놓았다.

“설마, 그 일 핑계 삼아서 계약위반을 하려는 더러운 수작은 아니었겠지? 다시 말하지만 그년 놓친 건 결국은 네놈 잘못이야.”

제수스 자이센이 흉터가 군데군데 남아있는 그 험악한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며 베흔을 노려보았다.

“하여간 사서 걱정은.......”

입을 삐죽거린 베흔은 제수스에게 큰 비단두루마리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잔뜩 의심어린 시선의 제수스는 두루마리 한쪽에 찍혀있는 금색 봉인에 제일 먼저 손을 가져갔다.

“엉?”

“황룡봉인. 황상께서 네게 내리시는 친서다. 절하고 받는 게 예의지만 오늘만은 봐주지. 나중에 귀족 행세하려면 이제 법도부터 공부해.”

제수스는 옆에 서 있던 아들 투모카프를 힐끔 돌아보았다. 호흡을 조심스레 가다듬고 봉인을 뜯은 그는 문서 중앙에 떡 하니 찍혀있는 붉은빛 옥새와 수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너 까막눈이었냐?”

베흔이 놀리듯 물었다.

“닥쳐. 내가 너희들 쓰는 고대어 따위를 알 게 뭐야.”

난데없이 짜증을 낸 제수스는 문서를 옆에 선 아들에게 휙 넘겨주었다.

“읽어봐라.”

아버지에게 문서를 넘겨받은 투모카프는 황제의 유난히 흘겨 쓴 정신없는 문장을 또렷한 발음으로 막힘없이 읽어내려갔다.

“무도한 국제연합을 과감히 떨치고 그를 쓰러뜨리는 데 큰 공훈을 세운 코메트의 제수스 자이센 중장과 그 부인, 아들 투모카프와 그 부인, 2명의 손자에게 황제령의 상급귀족 작위를 수여한다. 162년 1월 2일, 제국 황제 유평 이그나토 리쿠.”

“거 이유 한번 근사하게 붙이셨군.”

제수스가 동굴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옛 코메트 부대 관련자 중에서도 이후 교단을 버리고 제국 성립에 기여한 가문들---지금의 델루지 가나 호지 가, 황제령의 예리노프 가, 라자루스 가처럼---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수스는 그때 이미 포로 상태에 있었고, 제국 성립에는 종잇장 하나만큼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은 인물이었다.

베흔이 그의 앞에 한 꾸러미의 서류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코메트에서부터 따라온 네 직속부하 788명도 모두 면천될 거야. 어때? 약속은 확실히 지켰지? ‘자이센 가’의 역사적인 탄생이야.”

“역시 화통하신 양반이시군.”

껄껄대며 웃던 제수스가 두루마리에 입을 맞추며 아들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베흔이 한참 좋아라 하고 있는 제수스 부자에게 씨익 웃음을 지었다.

“우린 틀림없이 약속 지켰으니 이젠 두 번째 계약사항 지켜주면 좋겠어.”

“노예놈들 4만 해산시켜 달라는 거?”

베흔은 ‘부하들’에서 어느새 ‘노예 놈들’로 전락해버린 제수스의 불쌍한 4만여 추종자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황실에서 ‘노예처우개선’을 서부에 요구할 테니까 너도 나름대로 체면은 살 거야. 물론 그냥 ‘훈시’일 뿐이니 들을 놈은 없겠지만.”

“그깟 놈들 처우개선은 무슨.......”

‘상급귀족 작위증’를 손에 쥔 제수스는 자신이 바로 몇 분 전까지도 노예 신분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키득거리며 계속 막말을 뱉어댔다.

“그런 건 폐하께 맡겨두고, 넌 지시받은 일이나 해.”

베흔이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간다. 해산작업 끝나거든 연락해. 황상께 인사도 드려야 할 테고 할일이 많을 테니.”

짐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베흔은 동굴 문을 나서며 그 특유의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동굴 안에서는 유난히 시끄러운 제수스의 웃음소리가 요란스레 울려왔다. 동굴을 막 나선 베흔은 해가 지고 붉은 놀이 드리우는 지평선 너머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너희도 사냥개였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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