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94화 (393/1,132)

< -- 394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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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출신들에게 보병의 투창공격은 사실 그다지 낯선 건 아니었다. 하지만 4천의, 아니 후방에서 계속 몰려들고 있는 녀석들까지 합치면 족히 1만은 될 보병들이 기병의 전유물이라 알고 있던 사이클롭스까지 어깨에 두르고 일제히 쏘아 올리는 수천발의 강력한 투창은 베아트릭스에게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궁기병대! 목표를 바꾼다! 투창병들을 공격해! 저놈들을 더 상륙시키면 안 된다!”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명령에 즉시 방향을 돌린 슬레이프니르의 궁기병들이 강을 건너오는 적 투창병들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4천여 남부 투창병들이 질세라 일제히 엄호사격을 가해왔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투창에 명중당한 수십의 경기병과 기사단원들이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지거나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이 정도 거리에선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전투불능상태로 만들기는 충분합니다!”

달리가 방패에 박힌 투창을 잘라내며 악을 썼다. 베아트릭스가 궁기병들에게 팔을 저으며 악을 썼다.

“정지! 더 접근하면 위험하다! 8백은 투창병을 공격하고 나머지는 강을 건너고 있는 놈들을 저지해! 슈로 기사단! 적 기병을 추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 알았나! 적이 거짓 퇴각해서 투창병의 유효사거리 이내로 끌어들이려 할지 모른다! 아직 녀석들 위력을 모르니 함부로 접근하지 마!”

“제기랄.”

당황하고 있는 베아트릭스와 마찬가지로, 상대인 마누엘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맘먹고 보낸 지원군들마저 적 기병 매복군에 저지당하면서 이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먼저 출발했던 5백의 기병들은 적 장창병들에게 포위당해 이미 가망이 없는 궤멸상태였다. 패닉 상태에 빠진 그들 중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위험한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일부는 창병들에게 의미없는 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마누엘은 결국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포기해. 물로 뛰어들어서라도 알아서 빠져나오라고 하고 지원군도 퇴각시켜.”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투창병 놈들 제법인데요?”

케세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강을 건너간 남부중장기병들을 당장이라도 궤멸시킬 듯 몰려오던 2천의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 기병들은 어느새 5천이 넘어간 투창병들의 일제사격에 주춤한 모습이었다.

“뭐 그렇긴 하군. 어쨌든 저놈들도 다 퇴각시켜. 저놈들 건널 동안 기병들보고 지켜주라고 해.”

마누엘이 못내 인정하기 싫은지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투창병단이 어느새 기병을 동원해서라도 지켜주어야 할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퇴각! 퇴각! 1열부터 순서대로 물러난다!”

마누엘로부터 퇴각명령을 받은 투창병단 장교들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하지만 그새 대오를 정비한 슬레이프니르 궁기병들이 3팀으로 나뉘어 쉴 틈 없이 쏟아 붓는 사격에 그들도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중장기병들이 적을 저지하는 동안 최대한 빨리 퇴각해! 부상병이나 시체를 남겨선 안 된다! 장비까지 모두 거둬서 물러나!”

예르마크 경의 휘하에서 치밀하게 훈련받은 그들 투창병들은 각 열을 이룬 대대 단위로 전혀 흐트러짐 없이 순서를 바꿔가며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1열에 궁기병들을, 2열에 중장기병들을 서둘러 정렬시킨 베아트릭스는 적들이 물러나는 모습에 또다시 당황했다. 딴에는 세심하게 준비한 이런 대규모 기습에서 기껏 기병 5백을 잡은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실태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저 투창병단이었다.

“적 기병은 포기한다! 약간의 피해를 입더라도 적의 투창병부대를 무너뜨려야 된다! 돌격!”

자리드를 뽑아든 베아트릭스가 직접 선두에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 나갔다.

“기사단! 적 기병들을 돌파해서 투창병들을 잡으란 말이다!”

악을 쓰는 베아트릭스의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저렇게 제대로 훈련받은 부대라면 다음번 전투에서는 틀림없이 이쪽에 큰 골칫거리가 될 터였다.

“투창병들 도하 전에 기병들을 무너뜨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달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5백여 중장기병들이 투창병들이 도하하는 퇴로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포로라도 잡아! 녀석들의 장비라도 노획해야 된다!”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제자리에서 말을 빙 돌리며 악을 썼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시체와 부상자까지 남김없이 챙겨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기랄!”

이를 악문 베아트릭스의 눈에 적 투창병 후미에서 강물에 휩쓸려 대오에서 조금 떨어진 대여섯의 투창병들이 들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은 소대장급 사관인 대수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따라와!”

5명의 궁기병을 동반한 베아트릭스가 무작정 깊은 물에 뛰어들자 부하들이 순간 경악했다. 거의 말 어깨까지 차오는 깊은 물을 헤치며 그가 결사적으로 향하고 있는 건 그 낙오한 투창병들이었다.

“포로를 단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

물에 휩쓸려 퇴각행렬에서 낙오했던 투창병들은 뒤를 바싹 쫓아오는 적 궁기병, 그것도 망토를 두른 장군급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그들 투창병들이 뒤로 돌아서며 들고 있던 투창을 힘껏 쏘았지만 재빠르게 방향을 튼 베아트릭스를 맞출 수는 없었다. 대신 그를 따르던 궁기병 중 1명이 투창에 맞아 쓰러지는 말과 함께 물속으로 동댕이쳐졌다.

“이놈들!”

베아트릭스가 던진 경투창에 물을 가르고 도망치던 대수가 등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평소 그가 던지던 위력이라면 몸을 관통해 즉사시켰을 그 투창은 끝만 살짝 박혔을 뿐이었다. 베아트릭스가 사이클롭스를 일부러 반 바퀴 덜 당겨 던진 탓이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을 지켜!”

투창병들이 쓰러진 소대장을 어깨로 받치고는 거친 물살을 필사적으로 헤쳤다. 하지만 뒤를 쫓는 베아트릭스 또한 집요했다.

“본대에 지원사격을 요청해!”

도망치던 투창병들은 어느새 뒤를 바싹 쫓아온 베아트릭스와 그 휘하 기병들의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할룩스를 작동시켰다.

“동료들이 쫓기고 있다!”

강을 건너 퇴각하던 남부 투창병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동료들의 부름에 즉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자리잡은 1개 소대가 베아트릭스와 그의 기병들을 향해 돌아섰다.

“엄호사격!”

소대장의 외침과 동시에 40여개의 투창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장군님!”

부하의 고함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퍼뜩 차린 베아트릭스는 이미 정점에 올라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투창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급히 말을 돌리며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조금 늦은 후였다. 방패 옆을 스친 투창 한 발이 베아트릭스의 왼쪽 어깨 승모근을 깊숙이 꿰뚫었다.

“아윽!”

피가 솟는 어깨를 움켜쥔 베아트릭스가 움찔 했다. 궁기병의 자리드 같았다면 어깨를 갈갈이 찢으며 치명상을 입혔겠지만 근거리 사격임에도 다행히 위력은 강하지 않아 그냥 어깨를 관통해 있었다. 지독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베아트릭스는 칼을 뽑아들고 투창 꼬리를 잘라 내던졌다.

“뭐야!”

칼을 치켜든 적 장군이 바로 등 뒤까지 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 투창병들이 창을 치켜들며 돌아섰지만 바로 공중에서 내리꽂힌 칼날에 머리가 두 토막나고 말았다. 그의 뒤로 달려오는 4기나 되는 다른 적 기병들을 발견한 투창병들은 결국 쓰러진 소대장을 버려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잡았다!”

물로 급히 뛰어내린 베아트릭스는 등에 투창이 박힌 채 신음하고 있는 그 소대장의 목에 대뜸 칼을 들이대고는 따라온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이 놈 체포해! 무기와 장비 빠짐없이 챙기고!”

함께 온 근위 궁기병이 녀석을 체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베아트릭스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또 다른 묵직한 말굽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적장’을 발견한 남부 중장기병 십여기가 베아트릭스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빨리!”

물에 흠뻑 젖은 채 급히 말에 뛰어오르는 베아트릭스의 등 뒤로 또다시 수십 발의 투창이 솟아올랐다. 투창에 관통당하면서 왼팔을 잘 쓰지 못하는 베아트릭스는 평소보다 훨씬 둔한 몸놀림으로 가까스로 말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막 말을 돌리던 그의 등에 무언가 엄청난 충격이 내리꽂혔다.

“아악!”

베아트릭스가 반사적으로 말목을 껴안으며 거친 비명을 질렀다. 주인에게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말 치노는 본진을 향해 본능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또 날아옵니다!”

근위 궁기병들이 악을 썼다. 순간 치노의 어깨와 엉덩이에도 한 발씩의 투창이 다시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베아트릭스의 평생을 함께 해 온 이 준마는 잠시 움찔 했을 뿐 주인과 함께 계속 물을 가르며 달려 나갔다. 몸을 가려줄 마갑조차 없었지만 치노는 쏟아지는 투창비를 뚫고  강둑을 향해 필사의 걸음을 재촉했다.

“장군님을 지켜!”

근위병들이 강물을 헤치고 달아나는 베아트릭스의 뒤를 급히 막아섰다. 그의 부상에 놀란 슈로 기사단까지 건너편에서 몰려들면서 싸움이 막 커져가려는 찰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달은 중장기병들이 투창병들의 뒤를 쫓아 일제히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둑으로 빠져나온 치노의 몸에는 엉덩이와 어깨, 목에 3발의 투창이 꽂혀 있었다. 힘겹게 물 위로 기어오른 이 준마는 결국 앞발부터 꺾이며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장군님을 구해!”

베아트릭스를 따라온 기병들이 자칫 말에 깔릴 뻔했던 그를 재빨리 끄집어내 바닥에 옆으로 눕혔다. 말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에도 2발의 투창이 박혀 있었고, 방패에도 부러진 것까지 포함해 3발이나 되는 투창이 남아있었다.

“포, 포로는.......”

거친 숨을 내뱉은 베아트릭스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달리에게 힘겹게 물었다.

“무사히 데려왔습니다! 장비도 모두 노획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힘겹게 치켜들며 쓰러진 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치노?”

말의 상태를 확인한 근위기병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쏟아지는 투창비 속에서 주인을 이곳까지 구해 온 말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와 물로 흠뻑 젖은 말의 단단한 목을 멍한 얼굴로 껴안았던 베아트릭스는 결국 끓는 신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씨발, 기병 6백이 뭐야. 보병이 10만 가까운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가 소중한 기병을 4백이나 순식간에 날려버린 마누엘 경은 연신 욕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그나마 물로 뛰어들어 운 좋게 강을 건너오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던 것을 건져낸 놈들까지 다 따져 그 정도였다. 고작 1천에 불과하던 3군의 기병 전력이 그나마 또 절반으로 줄어버린 셈이었다.

부교 공사를 끝낸 3군은 원래 진로대로 이암성을 향해 남진을 서둘렀다. 이번 전투의 결과가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본대의 남진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저놈들이 생각 외로 쓸모 있는 게 드러났으니 아주 손해는 아니군요.”

케세크 경이 지휘부와 함께 전진하고 있는 투창병들을 가리키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경보병들 사이에서 풀죽어 행군하던 그들은 이제 델루지 가 중장보병들과 함께 지휘부를 빙 둘러 호위하고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배신자 베아트릭스 그년이 투창에 맞았다는데 정말 상이라도 주고싶더군요. 푸훗,”

“그건 그렇고, 저놈들 잘 써먹으면 이암성 공격이 생각보다 쉬워지겠군.”

그 난공불락의 철옹성 공략만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던 마누엘 경도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는지 그들 투창병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기껏 사관 하나가 포로로 잡힌 것을 가지고 저들이 왜 저렇게 ‘큰일’이라며 호들갑을 떠는지 알 수가 없었다. 투창병단장인 장군 녀석은 대수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엎드려 땅을 치기까지 했다.

“사령관 닮는다더니 저놈들도 이해할 수가 없어.”

마누엘이 풀죽은 얼굴로 지휘부를 따라오는 투창병단장을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적이 투창병단의 운영체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사관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심지어 장비까지 노획해간 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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