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98화 (397/1,132)

< -- 398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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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동쪽시야보다는 서쪽시야가 훨씬 좋군.”

주류성 누대에 선 카렐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뻥 뚫린 산자락 아래, 멀리 사막 지역에 개미처럼 바글바글 모여 세워진 연합군 2군의 캠프가 보였다.

종친회를 끝내기가 무섭게 서둘러 길을 재촉한 그는 어젯밤 늦게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욱리하로 배를 타고 와서 다시 산꼭대기에 위치한 이곳까지 오느라 몇 시간을 말을 타거나 걸어가며 생고생을 해야 했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지내 온 사람답게 불평은 고사하고 도리어 놀러 나온 듯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병사들과 함께 밤을 지낸 카렐은 새벽부터 일어나 주변을 직접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번 도시 서쪽을 차지한 흥안령의 험준한 능선 중 거의 유일하게 대병력이 넘어갈 수 있는 지점을 방어하는 곳이 이곳 주류성이었다. 거대한 능선을 딱 가로막아 세워진 성이다보니 서쪽으로는 황량한 사막이, 동쪽으로는 멀리 욱리하와 하안의 비옥한 땅이 마치 대조적인 풍경화처럼 내려다보였다.

“이거 날씨가 보통이 아니군. 고도가 이 정도면 고산증도 있겠고.”

북쪽에서 몰아치는 얼음장같은 칼바람에 카렐이 황룡무늬 망토를 바싹 여미며 중얼거렸다.

“이젠 병사들도 거의 적응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폐하.”

이곳 수비대장을 맡은 사르키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지금 보이는 적군은 중장기병 2만입니다. 중앙에 보급부대와 지원대, 경호기병이 위치해있고 정찰대 보고에 따르자면 후미부대 역시 2만 정도의 기병으로 예르마크 세닉 경이 이끌고 있습니다.”

“선봉은 플라칼 가하고 호지 가 기병들이군. 역시 자네들에게 여길 맡기기를 잘했어. 손재주 좋은 서부 출신들답게 준비를 그새 말끔히 다 해 놓았군.”

망원경에서 눈을 뗀 카렐이 사르키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주류성은 적을 가장 먼저 맞이할 곳이었고, 험한 고지대에 자리잡은 거친 산악지형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카렐도 적응력 좋고 우수한 사역병단을 지닌 서부연합군에 수비를 맡겨놓은 터였다. 이곳엔 5천의 서부 장갑보병들과 5천의 경보병, 1천의 사역병과 5백의 서부 기병, 카렐이 보내 준 5백의 가디언들이 지난 몇십일간 적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어젯밤은 잘 주무셨는지.......”

사르키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이곳 성에 느닷없이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그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모습들이었다. 적 1군의 진군이 조금 늦어진 탓에 주류성 동쪽이 아직 열려 있기는 했지만 2,3일 후, 1군이 도착해 그곳마저 틀어막으면 곧 완전히 고립될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이런저런 예의에 위엄을 따지는 황제라면 함께 있어주는 것이 결코 달갑지만도 않은 일이었겠지만 이 황제는 조금 달랐다. 겨우 50명 정도의 호위가디언만을 데리고 한밤중에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병사들이 쓰는 막사에서 가디언과 함께 자고 일어나서는 병사들의 아침 조회에 깜짝출연한 것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난 역시 이런 데가 더 체질인가 봐. 황궁에서 자면 매일같이 허리가 뻐근하거든. 그런데 오늘은 날아갈 것 같은데?”

카렐이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뭐 근래 이상한 동향은 없었나?”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능선을 따라 분대단위 초소 50여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잘했네. 알아서 잘 했겠지.”

너무도 형식적인 질문만을 던진 카렐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사람마냥 주변 경치만 싱글벙글 둘러보고 있었다.

사르키스는 이 황제의 성격이 같은 발현자이면서도 그 사촌오빠 코리온의 꼼꼼함과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웬만한 보고에도 그의 대답은 ‘잘 해 놨겠지’하는 언뜻 무책임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는 업무보고를 받으면서도 서류들도 건성건성 살피는 듯 보였고, 한 번 넘어간 서류는 앞뒤를 대조해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필로 쓴 보고서에서 눈에 빤히 보이는 오탈자를 뒤늦게 발견하고 막 알려주려는 사르키스에게도 그는 ‘이런 거라도 가끔 있어야 안 졸고 보지.’라며 껄껄대기도 했다.

한번은 졸면서 쓴 기색이 역력한 개발새발 일지를 보며 ‘당장 고쳐 쓰겠습니다.’라고 허둥지둥 변명하던 사르키스에게 ‘발현자는 이런 것도 다 알아서 읽으니 그럴 시간에 고기 한 점 더 먹고 잠이나 한숨 더 자라‘며 능청스럽게 웃어대기도 했다.

물론 그 뒤의 현장 시찰에서 카렐이 마치 지나가듯 던진 이곳 날씨와 숙소 규모에 관한 질문들에는 보고서에 있던 내용들이 소수점 하나 틀리지 않고 들어가 사르키스를 내심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5월 한낮의 간만의 따스한 햇살이 주류성 수비병들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30 스타디아 정도의 고산지역인 덕에 날이 풀렸어야 할 이 시기에도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사르키스의 옆에는 발 가에서 온 베나지 나하스 장군이 잔뜩 굳어있는 사르키스보다는 훨씬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메디스 시에서 플레렌 가를 상대로 더 지독한 포위전도 겪어냈던 베나지는 이 정도는 걱정거리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주변을 새삼스레 둘러보았다.

“보시다시피 적 2군과 면한 서쪽은 접근성이 훨씬 좋습니다. 적들이 양면공격을 할지......”

베나지의 물음에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예르마크 경의 2군은 모두 기병이라 어차피 공성전은 못해. 행군의 효율성도 있고 서쪽 보급로도 확보해야 하고, 여기를 서쪽에서 차단해야 할 필요성도 있고 하니 따로 온 거지. 1군이 도착해 능선 반대편에서 공성전을 펼칠 동안 내내 견제만 하고 있을 거야.”

성을 빙 돌아 동쪽 능선 아래를 둘러보던 카렐은 군용도로를 따라 행군해오고 있는 웬 부대에 문득 시선을 두었다. 동부 트라티누스 가 군기를 앞세운 수천의 보병들이 산 아래서 헐떡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오호, 이제야 아슬아슬하게 오는군.”

수문장에게 문을 열라 명령을 내린 카렐은 요새 안쪽으로 내려갔다. 동문이 열리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동부 보병들이 온통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몰골로 차례차례 요새에 들어섰다.

“엉?”

사르키스는 줄지어 들어서는 동부보병들의 희한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른쪽 어깨에는 특이한 형태의 사이클롭스를 차고, 등에는 퀴버를 짊어진 병사들의 낯선 모습에 서부제후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투창 외에 부무장으로 타치와 창 하나씩을 찬 낯선 보병들이었다.

“투창병들입니까?”

“아, 그래.”

카렐이 이들 병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샤레이에서 온 동부 지원병들일세. 동부에서는 보병들도 기본적으로 투창을 던질 줄 아니 서부보병보다야 낫겠지만 솔직히 훈련은 많이 부족해. 훈련을 다 끝내고 배치해야 하겠지만 상황이 워낙 급하니 어쩔 수 없었지.”

“솔직히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르키스가 차마 불평은 못 하고 우회적으로 비꼬듯 말했다. 사이클롭스는 보아하니 2명에 하나 정도씩밖에 없었고, 투창도 10발 정도 가진 것이 고작이었다. 카렐이 조금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이클롭스도 생산량이 부족해서 아직 절반밖에 지급되지 못했고 투창도 훈련용으로 1인당 10발밖에 안되네. 지금 북부에서 철야로 생산중이라니까 내일 밤까지는 1인당 1개씩의 사이클롭스와 투창 10만발을 보내줄 걸세. 보병용이다 보니 기병용보다 공정도 짧고 단가도 절반 이하니까 쉽게 양산에 들어갈 수 있을게야. 일단 영내에서 훈련할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해주게.”

“알겠습니다.”

사르키스는 어딘지 부실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조금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지만 황제가 이들의 양성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차마 대놓고 그러내지는 못했다.

“자, 이제 볼일을 끝냈으니 이 불청객은 여기를 떠야 하겠군. 저 망할 길을 다시 돌아 내려갈 거 생각하니까 끔찍하군 그래.”

카렐이 동쪽 능선 아래로 이어진 험한 산길을 내려다보며 한숨처럼 말했다. 좁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이 근위대 군용도로는 적 1군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서부 사역병들이 최대한 망가뜨려놓은 후였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산사태를 일으켜 길을 무너뜨리고 있을 터였다.

사르키스가 카렐을 배웅하며 말했다.

“모레 마지막 보급을 받는 대로 교량을 모두 파괴할 예정입니다. 이제 폐하의 용안을 한동안 뵙기가 어려울 듯 싶습니다.”

사르키스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렐이 그를 한 번 힘있게 안아주고는 말에 훌쩍 올라탔다.

“그래, 무사히 살아남게나. 살아있어야 솔에게도 좋은 외숙이 되어 주지.”

사르키스와 이곳을 지킬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카렐은 올 때처럼 50여명의 가디언 기병들만 거느리고 홀홀히 성을 나섰다.

귀찮게 항상 뒤를 따라다니는 수하들을 모두 따돌려놓은 수우는 간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별궁 자료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근위대장이 붙여놓은 시녀와 경호원, 보좌관이라는 것들은 명색이 황제인 수우가 읽는 책들까지 매번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대곤 했다.

한참 걸려 찾은 책을 한 아름 싸들고 나오던 수우는 모퉁이에서 막 마주친 낯익은 얼굴에 움찔했다.

“여긴.......웬일이시오?”

약혼자와 마주한 수우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수우와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구르베스도 재빨리 한 발짝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요.......폐하.”

“흐, 흠.......그런가, 35층에 오락실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옥상엔 전망대하고 운동장도 있다오, 황비.”

“동부 초원에서 항상 말을 타고 달렸는데.......이곳에는 말을 탈 곳이 없어서......”

구르베스의 얼굴에 묘한 그리움과 향수가 감돌고 있었다. 수우가 괜한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렇군.”

요동의 넓은 초원에서 다른 동부 귀족들처럼 활기차게 말을 타고 달리던 구르베스가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는 이 별궁 내명부에 갇혀버렸으니 그런 향수가 드는 것도 당연할 듯싶었다. 수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별궁 북쪽에 13선지자의 묘 부근에 옛날 슈로 기사단 주둔지도 있고, 8번 도시나 5번 도시 정도면 대강 동부하고 비슷할 성 싶기도 한데.......시종장이나 근위대장에게 부탁하면 말과 셔틀을 빌려줄 것이니......”

“함께 말을 타던 옛 친구들도 없고, 혼자 말 타는 것도 어딘지 우습고......”

풀죽은 구르베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수우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걸핏하면 드는 음탕한 생각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수우에게 요즘 생긴 새 습관은 여자를 보면 무조건 시선부터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구르베스가 수우의 손에 수북이 들린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 수우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내 할일이 책 읽는 것밖에 더 있겠소.”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수우가 손에 들린 희곡 표지를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옛 꿈에 빠져 시간만 허비하심은 황제답지 않으신 처사입니다. 지금은 이런 것을 읽으실 때가 아닙니다.”

구르베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의 서슴없는 말에 수우는 다시 멈칫거렸다.

“지, 지금 내게 한 말이요?”

“그렇습니다.”

구르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구르베스도 눈앞의 이 황제, 아니 언뜻 선해 보이는 이 귀족청년이 스스로는 황제가 되고픈 생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청년이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아침 네 시간정도 투자해서 베흔과 클레모 부총리가 가져온 서류에 서명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국정에 관해 열심히 설명해주려 들지도 없었고, 설사 수우가 먼저 묻는다 해도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버리기가 일쑤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나마 중요한 사안들은 전장에 가 있는 제롬에게 미리 확인을 받은 후 결재를 올린다는 소문이었다.

“극단을 가지고 싶어 하셨다더니, 사실이었군요.”

구르베스가 수우의 손에 가득 들린 희곡과 연극에 관련된 책들을 보며 물었다.

“누가 그랬소?”

“카렐.......아니, 그 가짜황제가.......”

“가짜황제라.......그쪽도 날 그렇게 부를 텐데.”

수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그 친구야말로 황제감이지.”

구르베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한 황제가 되고 싶으시면 옛 향수나 자극하는 책은 더 이상 보지 마십시오. 스스로 갈 길이 아니다 판단되신다면 과감히 버리셔야 하옵니다. 그것이 옛 꿈이든, 누군가가 강요하는 허울좋은 면류관이든 말입니다.”

깜짝 놀란 수우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말을 별궁 내의 누군가 듣는다면 샤자한 공의 딸인 구르베스라 해도 감히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그, 그대는 내가 황제가 되는 걸 원치 않는 거요?”

“이미 황제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가진 것이 많으신 만큼 아직은 선택의 여지도 많사옵니다. 폐하 스스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살피시옵소서.”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던 수우가 구르베스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말 타는 것이 서투르니 별 재미는 없겠소만.......그러면 나와 함께 말 타러 나가겠소? 내 좀 가르쳐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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