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00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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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델루지 가에서 20억 골드의 지참금을 조건으로 서부 플레렌 가에 약혼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제국 상급귀족가 사이에 빠르게 번져나가면서 그들 귀족 사교계는 물론이고 황실까지 한바탕 들썩거리고 있었다.
웬만한 상급제후가도 엄두를 못 낼 그 어마어마한 금액도 화젯거리였지만 델루지 가 정도의 명망있는 가문이 이미 멀쩡한 약혼자가 있는 사람에게 거액의 지참금으로 다시 약혼을 청한 것부터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귀족가문 사이에서 그간 지켜져 온 최소한의 ‘신사협정’까지도 깨버리는 후안무치한 행위에 비난이 쏟아졌지만 델루지 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플레렌 가 원로회에서는 당연히 그 제안을 일단은 ‘정중히 사양’했지만 약혼 당사자의 격이 파격적으로 높아진 이상, 조건의 수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오가고 있었다. 약혼 당시만 해도 종장 여동생인 네페티보다는 종장 적장자에 화려한 관직경력을 갖춘 오르마즈의 몸값이 훨씬 높았고, 약혼조건도 오르마즈 쪽에 더 유리하게 적당한 선에서 합의되어 있었다.
가문 안팎에서 나오는 이런 시끄러운 잡음들이 많았지만, 네페티의 태도는 완강했다. 종장이며 당사자인 그는 ‘20억 골드가 아니라 2백억 골드여도 가문의 신용이 더 중요하다.’며 공개적으로 못을 박기도 했다.
하지만 제수스의 약탈로 치명타를 입은 플레렌 가의 재정은 병사들 봉급도 주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심지어 나머지 서부 4개 상급제후 가문에서 갹출해 급한 구멍을 메우라며 건네준 돈을 사양도 못하고 받아야 했던 정도니 최고제후가의 위신이 땅바닥에 추락해버린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플레렌 가에서 남부와 동일한 조건을 원하는구나.”
낮은 한숨을 내쉰 투르케스크 공이 플레렌 가에서 온 편지를 오르마즈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편지 내용을 살펴본 오르마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고제후 수결이 없군요.”
“가문 원로회에서 최고제후에게 올린 권고문이니 당연하지. 원로회 만장일치니 네페티 그 애도 마음대로 무시할 수는 없을 거다.”
오르마즈는 굳어져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여력이.......됩니까?”
“아니.”
아버지의 대답에 난감해진 오르마즈가 이마를 싸쥐었다.
“올해 예비기금은 8억 골드뿐이다. 전쟁 끝난지 아직 3년밖에 안됐잖냐. 그나마도 추경 예산치 따져보면 부족한 상황이야. 게다가 원래 조건은 반은 약혼시에, 반은 혼인시에 지급하는 걸로 되어있었는데 그걸 당장 현금지급으로 해달라니......”
“그래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아버님. 지금 제가 파악한 바로는 서부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르마즈가 편지를 다시 집어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당장을 위한 문제가 아닙니다. 20년, 30년 후까지 북부가 계속 서부와 원수로 지낼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뭐 섭한 게 있어서?”
투르케스크가 딸을 째려보며 따져들었다. 이번 일로 가뜩이나 자존심이 상한 그는 플레렌 가에서 온 저 불쾌한 편지를 마음 같아서는 확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르마즈가 그런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말을 건넸다.
“플레렌 가도 종장을 팔아치우면서 제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원치 않을 테니 일단 우리 쪽에서 자진해 지참금을 10억 정도로 올려주면 서로가 위신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주 서부대사 푸아킨 경이 협상에 능하니 사자로 파견해서......”
“됐어, 그 꼬맹이 년한테 10억 골드나 들여야 될 정도로 우리가 돈이 넘쳐나는 건 아냐.”
투르케스크가 편지를 철해 넣으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우린 아직 패전지역이라는 걸 잊지 마라, 오르마즈. 우린 모든 게 어려워.”
“아버님, 하지만 그 이후에 얻을 것을 바라본다면 결코 큰 투자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칼림 플레렌 그자가......”
“네가 그렇게 큰돈을 얹어서 보낼 만큼 값없는 인물이었냐?”
투르케스크가 대뜸 이를 악물며 물었다. 오르마즈는 아버지의 이 쌀쌀맞은 태도가 단순히 돈이 아닌, 그 유별난 자존심에서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국 최고의 인물감이라 믿었던 자신의 자식이 지금껏 그 꼬맹이와 ‘결혼해준다’고 강조해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와 거액의 돈까지 ‘덤으로 얹어서’ 보내줘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단단히 상처받은 터였다.
“그쪽에 들인 돈만큼 서부에서 제 발언권이 생긴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아버님, 그러면 테번 공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최고제후끼리라면 남부가 서부를 사들이는 게 되겠지만 넌 그게 아니잖아! 그년을 이리 데려올 것도 아니고, 네가 그쪽에 가서 살아야 할 텐데, 그러면 도리어 지참금을 받아야 하는 쪽은 우리야!”
“하지만 아버님,”
“명심해라. 테번이 그 가문에 주는 돈하고 우리가 주는 건 차원이 달라. 테번은 이미 첩실이 수십 명 있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놓고 살 거니 그 정도 돈을 줄 가치가 있겠지. 하지만 넌 뭐냐? 네가 그쪽 집에 가 살아야 하고, 몇 년 지나고 나면.......그래, 그년도 명색이 최고제후니 다른 첩실도 하나둘씩 들이겠지. 그럼 네 신세는 뭐가 되냐!”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첩실을 들이지 않는 건 어차피 테번 쪽에서도 요구했을 테니 우리도 조건에 명기하면 되고, 돈은 하위제후들에게 차관으로 빌리면......”
차관이라는 말에 투르케스크가 발끈했다.
“명색이 최고제후가 낮은 가문에 돈이나 꾸러 다니냐? 그것도 결혼지참금 마련한다고? 됐다, 다 필요 없어. 내 2억 골드 정도까지 지참금을 올려줄 수는 있다만 그 이상은 안 돼.”
“아버님, 제가 급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놔두면 네페티 공이 실각하게 됩니다. 네페티 공을 끌어들여서 서부를 우리 편으로 삼기 위해서는 체면을 따질 때가......”
“됐어. 집어 쳐라. 그런 꼬마 애한테 그렇게 홀딱 빠져버리다니 너답지 않구나. 내 2억 골드로 수정안을 보낼 테니 넌 잠자코 있도록 해.”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린 투르케스크 공은 망연자실한 표정의 오르마즈를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던 오르마즈는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푸아킨 경인가? 상황이 급박하니 날 위해 한 가지만 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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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제롬과 함께 행군하는 1군 보병들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아직 싸움이라고는 단 한 번도 치러보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흐느적거리며 행군하는 그 모습만 보아서는 대여섯 번쯤 패전을 기록한 병사들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극으로 치닫다보니 처음에는 거의 보고되지 않던 군기사고도 점점 그 빈도를 늘려갔고, 민간인에 대한 피해도 속출하고 있었다.
계속 늘어져가는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지휘부가 대오 곳곳에 흩어져 직접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중간에 싸울 곳이 있기에 망정이지 이 페이스로 황궁까지 직격하려 시도했었더라면 집단탈영이라도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앞쪽에 마을입니다.”
선봉에서 나아가던 제롬에게 근위기병대장 릴라크가 말했다.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기껏해야 백여 가구 됨직한 작은 농촌마을이 보였다.
“여기도 텅텅 비었나?”
쥐죽은 듯 조용한 마을을 둘러보며 제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소한 그저께까지는 이렇지 않았다. 민간인들이 이 대군을 반겨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1군은 진격로 인근 주민들에게 간단한 선물도 뿌렸고, 사역병들을 동원해 낡은 집이나 고장난 기반시설을 고쳐주기도 했다. 심지어 군인이 되겠다고 지원한 몇몇 겉멋든 젊은이들도 이후 ‘강제징발’이라는 오해에 휘말릴지 모른다며 모두 설득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바로 어제, 선발대의 호지 가 경보병과 사역병 2백여명이 8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 하나를 약탈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사실 그들이 돌발행동을 한 것도 이유는 있었다. 전날 밤, 야음을 틈타 강을 타고 잠입한 동맹군 가디언 1백이 숙영지에 불을 지르고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 그 덕에 무려 400여명의 호지 가 보병들이 어이없이 불에 타 죽거나 칼에 맞아 죽으면서 분위기가 극도로 격앙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화풀이를 엉뚱한 민간인에게 한 건 이번 전쟁을 ‘정의로운 원정’으로 만들려 나름대로 조심하던 제롬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을 강간, 살해하고 물건들을 약탈하던 그 무뢰배들을 저지한 것이 자신의 헌병대가 아니고 적군인 동맹군 기병들이었다는 것도 그로서는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연합군의 진격로 앞을 내내 감시하던 그들은 약탈이 벌어지고 채 20분이 되기도 전에 달려와서는 그 약탈꾼들을 쫓아내고 주민들을 산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그들 손에 14명의 경보병과 27명의 사역병이 죽음을 당하면서 공식적으로 1군의 ‘첫 패전’이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인 집단학살극까지 가기 전에 ‘끊어 준’ 것에 어찌보면 제롬도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후 뒤늦게 사건을 보고받고 길길이 날뛰던 제롬은 분대장부터 소대장까지를 모조리 공개참수하고 사병 중 절반을 제비뽑기로 뽑아 나머지 절반에게 돌로 쳐 죽이게 하는 극단적인 처벌을 가했지만 이미 일은 망가진 후였다.
“여기도 다 도망간 모양입니다.”
릴라크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포스터 좀 보십시오.”
릴라크가 허름한 농가 담에 붙은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큼직한 포스터에는 어제 습격당한 마을의 사진과 함께 ‘남부의 반역도들이 민간인을 해치고 있으니 그들의 접근해오면 인근 동맹군 초소에 연락해서 피난지시를 받으라’는 내용이 꽤나 친절하게 쓰여 있었다.
“어제 그 망할 새끼들이 다 개판을 쳐 놨군.”
이를 악문 제롬이 연신 투덜거렸다.
사실 삐걱거리고 있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1군과 예르마크 경의 2군은 그럭저럭 일정대로 속도를 맞추어서 행군했지만 문제는 마누엘 경의 3군이었다. 적들은 3군과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들을 번갈아 동원해가며 행군하는 3군을 계속 들쑤셔대고 있었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한밤중에도 쉬지 않고 들볶아대는 그 망할 기병들 때문에 3군은 원래 예정에서 이미 사흘이나 뒤처져 있었다.
게다가 3군을 이끄는 마누엘 경이나 케세크 경 모두 임기응변이나 순발력 따위와는 거리가 먼 ‘단순무식’형 무장들이다보니, 그들의 재빠른 공격에 별반 대응을 못 한 채 발목만을 잡히고 있었다.
이러다가 3군의 지지부진 때문에 행여 전체 전략구도가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지 제롬도 부쩍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을 눈치 챈 베흔이 수하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가디언 아리엘을 3군에 긴급히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류성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지휘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흥안령 산꼭대기를 향했다. 희뿌연 구름이 드리운 정상 부근에 무언가 육중한 물체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놈인가. 자리도 더럽게 차지하고 있네.”
제롬이 입을 삐죽거렸다. 평소 흥안령을 가로지르는 통로는 원래 이곳 지하를 가로지르는 몇 개의 터널들이었지만 그곳들은 모두 파괴되어 단기간에 복구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 주류성은 대부대가 흥안령 남쪽을 육로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저곳을 뚫어야 산맥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는 예르마크 세닉 경의 2군 기병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계획 중인 욱리하 수로를 보조할 육상 보급로를 하나쯤 확보해 둘 필요도 있었다.
“정말 지독하군, 저길 3일 내에 어떻게 뚫지?”
구름 속에 보이는 주류성을 올려보며 제롬과, 함께 있는 샤자한 공의 표정이 조금씩 창백해졌다. 나름대로 자료를 입수해 이미 충분히 연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깎아지른 계곡과 절벽을 넘어 위치한 저 빌어먹을 성의 주변 지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최고제후님! 정찰대입니다!”
멀리 정상으로 오르는 계곡 위쪽에서 적진을 향해 먼저 보냈던 동부 정찰 기병이 허둥지둥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정찰병을 달랑 1기밖에 안 보내셨소?”
제롬의 질문에 샤자한 공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계곡 위에서 달려오는 정찰병은 정말로 한 명 뿐이었다. 온몸에 지푸라기와 흙, 피로 뒤범벅이 된 기병은 말에서 뛰어내려 샤자한 공의 앞에 급히 절을 올렸다.
“정찰분대 3명 전사했고 1명은 부상을 입고 적들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계곡 2부 초입에 서부 장갑보병 1백여명이 매복 중이었습니다! 그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서부 장갑보병’이라는 말에 지난번 슈카른 계곡 전투에서 그들에게 쓴맛을 보았던 샤자한 공이 순간 기겁을 했다. 정찰병은 성에는 접근도 못해본 채 그들에게 몰살당한 모양이었다. 정찰병 분대장이 가져온 자료를 참모진에 올리며 말했다.
“2부 능선까지 2개의 큰 계곡이 있고 그곳을 지나는 도로와 교량은 이미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저희 분대도 말에서 내려 절벽을 타고 넘어야 했습니다. 임시교량을 놓지 않는 이상 대병력 통과는 어렵습니다.”
길안내를 맡은 근위대 장교가 냉큼 덧붙였다.
“총 12개의 교량이 원래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곳의 교량을 이미 파괴했다면 다른 곳도 그냥 놔두지는 않았겠죠. 앞으로도 이 길을 보급로로 사용하려면 어차피 교량은 설치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긋지긋하군.”
제롬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래저래 일정이 계속 늦어질 판이었다.
함께 있던 보병대 부사령관 헤즈 플라칼 경이 즉시 대답했다.
“특임대의 누마 피카르 중랑장이 이쪽에는 전문가이니 녀석 휘하의 산악병연대 2천을 투입해서 적 전위대를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산악병연대하고 4군단 전투병 1만 9천, 사역병 3천, 3군단 사역병 3천을 모두 붙여줄 테니까 3일 이내로 주류성 발밑까지 접근로를 확보해. 헤즈 자네가 책임지고.”
“알겠습니다.”
헤즈 경이 힘있게 대답하고는 4군단 쪽으로 말을 달려 사라져갔다. 말 한 마디로 거의 3만에 가까운 인원을 일거에 불러내는 남부의 엄청난 물량동원에 샤자한 공이 자존심이 상한 듯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그 동안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면 되겠군.”
“이 정도면 괜찮군요.”
제롬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한때 목초지로 쓰였다가 버려진 듯한 해발 100스타디아 정도의 산자락 황무지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면 걸핏하면 적 가디언들이 날뛰어대는 강변과도 꽤 거리가 있고,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대군의 숙영지를 만들기에는 이상적인 입지였다.
“그럼 일단 사령부와 숙영지를 이곳에 두도록 하고, 사역병단은 당장 정찰이 끝난 곳까지라도 교량 설치에 들어가도록 해. 주류성 앞까지 접근로가 확보되면 전진기지를 세우고 공성전에 들어간다.”
제롬의 명령에 일제히 짐을 푼 연합군 병사들은 지금까지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대한 숙영지 공사를 시작했다. 숙영지 중앙의 사령관용 대형 막사 2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만 개가 넘는 회색빛 군용막사들이 마치 꽃을 피우듯 사방에 일제히 생겨났다.
숙영지 공사를 대강 둘러본 제롬은 중앙의 사령관 막사를 올려보며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최고제후인 사령관의 막사인 만큼, 이동 궁전이라고 불러도 됨직한 직경 50척 정도의 거대한 원형 천막이 그의 것이었다. 주변에는 델루지 가를 상징하는 주작 문장의 금빛 깃발이 촘촘하게 꽂혔고, 십여명의 가디언이 행여 모를 불청객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서 있었다.
“이래 봤자 막사는 막사지.”
제롬이 고개를 저으며 안에 들어섰다.
천막 안에도 서부산 카펫이 몇 겹씩 깔려있었고, 화려한 수공예품 가구와, 간단한 간식거리, 반짝이는 은제 다기류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중앙에 놓인 크고 푹신한 침대는 사병들 6,7명은 뒤엉켜 자도 충분할 크기였다. 하지만 제롬의 눈에는 이것조차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최고제후님.”
침대를 정리하던 두 명의 미녀 노예들이 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제롬의 막사에는 저 두 노예 말고도 8명의 미녀들과 7명의 미소년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원정을 떠나오고 수십 일 동안 같은 얼굴만 봐서인지, 아니면 피곤 때문인지 이젠 별로 눈길이 가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침대에 큰대자로 벌렁 누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망할 놈만 몰아내면.......솔은 데려다가 소실로 삼고.......카렐 그놈 여자들을 데려다가 모조리 욕보이고.......제네르 그것은.......에이, 모르겠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제롬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최고제후님! 근위대장님께서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입니다!”
딸 구르베스와 함께 차를 타고 전장의 남편 샤자한 공을 찾아가는 알리아 아야톨라 부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연합군 보급기지가 있는 나이만 분지를 출발해 1군이 개척한 욱리하 서안 도로를 타고 움직이는 이 행렬은 천 명에 가까운 넘는 근위대 정예 병력의 삼엄한 경계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간 1군이 도로도 거의 복구하고 군데군데 하안 초소도 설치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부근에 계속 흐르고 있었다.
“걱정했는데 별 것도 아니구나.”
어머니의 여유로운 한마디에 구르베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창을 열고 흥안령 중턱을 올려본 구르베스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강 쪽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지만 산맥은 이미 동맹군 초소들로 채워져 있는걸요. 그리고 몇 시간 전에 지나간 강 건너편 백암성에도 동맹군이 주둔하고 있고요. 우리는 지금 언제 끊길지 모르는 전선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거라고요. 어머니.”
전직 기병장교답게 미리 챙겨온 칼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으며 구르베스가 다시 밖을 주시했다. 앞쪽에 앉아있던 베흔이 그런 구르베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걱정 마십시오. 구르베스 전하. 연합군 숙영지에 거의 도착해갑니다.”
“알고 있어요. 근위대장.”
구르베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딸과 베흔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알리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어젯밤 폐하와 합방을 했다니.......그분에 대해 안 좋은 소문도 있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순간 얼굴이 조금 붉어진 구르베스는 자신을 돌아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베흔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알리아 부인이 딸에게 얼굴을 바싹 들어대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별일 없던 거지? 어땠냐? 얘기 좀 해봐라.”
귀밑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구르베스는 어머니의 이 지나친 관심을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끊어버렸다.
“뭘 그런 걸 다 묻고 그러세요?”
“아침에 황상의 용안이 평소보다 한결 밝으신 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중간에 끼어든 베흔의 한마디에 알리아 부인이 연신 싱글거렸다. 내심 많이 걱정했던 혼인이었지만 야무진 딸 덕분인지, 아니면 둘의 궁합이 생각 외로 잘 맞는지 이 둘의 금실이 꽤 좋다는 소문이 사오시안트 궁에 쫙 퍼져있었다. 이쯤 된다면 나중에 정식 황후가 될 ‘바보’ 라이 공주 정도는 그대로 따돌리고 구르베스가 내명부의 실권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될 터였다.
“믿음직한 대군이라도 생산하신다면 이제 구르베스 마마의 지위는 아무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법도가 있고 서열이 있으니 태자가 태어난 후에 대군을 생산하는 것이 순서겠죠.”
구르베스가 냉큼 대답했지만 베흔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태자는 태자고 대군은 대군이죠. 어쨌든 하루라도 빨리 대군을 생산하시면 마마의 지위도 확고해질 것이고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부와 동부 사이에도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긴가요?”
구르베스가 베흔의 참견을 듣기 싫다는 듯, 창밖을 가리키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흥안령 산허리의 넓은 공터를 족히 만 개는 넘을 크고 작은 천막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은 정리가 조금 덜 된 듯 어수선했지만 그곳에 모인 병사들은 오랜만의 긴 휴식을 얻어서인지 하나같이 밝은 얼굴들이었다.
“오셨구려, 부인.”
미리 기다리던 샤자한 공이 차에서 내려서는 알리아 부인을 제일 먼저 품에 안아주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근데 근위대장이 뜬금없이 웬일이야?”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제롬이 샤자한 공 가족을 데리고 모습을 나타낸 베흔에게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아,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롬과 함께 막사에 들어선 베흔은 바로 의자에 자리잡고 앉으며 말을 건넸다.
“듣자하니 정찰대부터 서부 장갑보병들에게 낭패를 봤다고요?”
“됐어.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제롬이 짜증스레 대꾸하며 술 한 잔을 훌쩍 마셔버렸다. 그에게서 잔을 빼앗아들며 베흔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근위대 가디언 200명을 데려왔으니 이제 심려는 놓으십시오. 제아무리 잘난 장갑보병들도 감히 가디언에게 덤비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것들은 귀찮게 뭐 하러 병영에 데려왔어. 썅.”
여전히 졸린 표정의 제롬이 계속 신경질만 부렸다. 오랜 행군에 지쳐서인지, 그의 얼굴도 꽤 많이 꺼칠해져 있었다. 베흔이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구르베스 마마께서 어제 황상과 침소를 함께하셨습니다.”
“저, 정말?”
제롬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확실합니다.”
피식 웃음지은 베흔이 마치 제 잔인 양 제롬의 잔에 새 술을 담아 꿀꺽 들이켰다. 제롬도 기분이 풀린 듯 껄껄대며 웃음을 지었다.
“허, 녀석이 웬일이야. 그나마 다행이네.”
제롬을 말없이 바라보던 베흔은 품 속에서 웬 서류뭉치를 꺼내놓았다. 제롬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이건 뭐야?”
“제가 이곳까지 직접 온 것은 조금 장기적인 계획을 상의드리려는 겁니다.”
“장기?”
“솔직히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민망하지만.”
베흔이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제왕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흔의 말을 차마 부인할 수 없는지, 제롬이 얼굴을 붉히며 퉁명스레 되물었다. 베흔이 그런 제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번 혼란사태도 따지고 보면 선대 황제의 형편없는 핏줄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제롬 역시 무슨 반역모의라도 하는 사람마냥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다시 물었다. 베흔이 제롬의 손등을 살짝 짚으며 조심조심 말을 건넸다.
“이번과 같은 혼란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심약하신 황상 대신 훨씬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누군가의 핏줄이 대신 그 후계자가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얼굴의 핏기가 싹 사라져버린 제롬이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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