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1화 (400/1,132)

< -- 401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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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해왔던 군수부장직을 밀리타에게 인계해 주고 명목상이나마 진짜 황후의 지위로 올랐지만 아메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못했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찌보면 재색을 너무도 완벽하게 갖춘 이 여인에 대한 같은 여자로서의 막연한 질투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여자는 그로서도 괜히 기분이 나빴다.

물론 카렐은 겉으로는 이 여자에게 아무 관심 없다며 몇 번이나 밝혔지만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황제가 불구자나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황실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 이 천하절색의 미녀에게 눈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사람들이 멋대로 수군거리곤 했다.

그렇다보니 이 여자에게 정말로 관심조차 없는 카렐에게는 주변의 이런 오해가 답답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의 속내대로, 이 여자에게 정말로 남자를 하나 소개해주는 것밖에는 이 ‘누명’에서 벗어날 길은 사실상 없어보였다.

주변의 그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잘 아는 밀리타였지만, 그는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황후가 될 아메스에 대한 태도 역시 공손하기 짝이 없어서 가끔씩은 나이어린 아메스가 머쓱해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날 저녁도 정원을 잠시 산책하던 카렐이 하필 밀리타와 마주쳐버린 건 아메스에게는 꽤나 기분 나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더더욱이 그랬다.

“웬일인가, 밀리타 레즐린 부장?”

장미덩굴 옆을 아메스와 함께 걷던 카렐은 웬 남자와 함께 산책로 옆에 읍하고 서 있는 밀리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밀리타’라는 말에 거의 노이로제까지 있던 아메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저, 저,”

아메스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밀리타와 함께 서 있는, 말끔하게 생긴 미모의 청년은 이번에 제후가에서 인질, 아니 ‘손님’으로 보내온 15명 중의 하나였다. 간만에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지위로 돌아간 아메스가 청년을 손으로 가리키며 카렐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였다.

“네 이놈! 네 이번에 연락관으로 온 녀석 아니더냐! 그런데 감히 규정을 어기고 외부인을 멋대로 만나다니! 그리고, 시종 놈들은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니! 채찍질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아메스의 호통에 청년을 따르던 3명의 시종들이 당혹스런 얼굴로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들을 가볍게 가로막은 밀리타가 둘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황후 폐하. 하오나 소인 이라즈의 누이이오니,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사료되어 이렇게 함께 산책을 나와 있었사옵니다.”

“이 둘의 아버지가 아스탈 레즐린입니다, 황후. 오해하지 마시구려.”

길길이 날뛰는 아메스의 어깨를 살짝 붙든 카렐이 얼굴로 밀리타와 그 남동생, 이라즈 노에누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렐에게 밀리타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라즈가 어릴 때 계모님이신 아르바나즈 부인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어 이라즈의 외숙이며 노에누스 가 종장이신 안도 경께서 양자로 거두어 키워주고 계셨습니다. 아버님의 신분이 평민이신지라 아무래도......”

밀리타가 짐짓 슬픈 얼굴로 남동생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아무리 계급의식이 약한 북부라지만 상급귀족이 평민과 결혼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부인의 죽음 이후 아들을 제후가에 빼앗긴 듯 했지만.

카렐은 그제야 그 청년, 이라즈에게 문득 눈길을 주었다. 맑고 선한 눈매를 품고 있는 이 청년은 지난번 ‘손님들’ 모였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 섞여 있어서인지, 아니면 카렐과 정 반대편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어서였는지, 지나치리만큼 앳된 외모를 빼면 그때만 해도 그다지 눈길을 끌지는 못했던 터였다.

“126살이라고 했던가?”

카렐이 청년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청년에게 보이는 카렐의 관심에 순간 발끈 한 아메스가 엄한 밀리타를 노려보았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황실 예술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에 있사옵니다.”

“그래, 화가라고 들었네. 으, 음.”

카렐이 마치 습관처럼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가슴을 눌렀다.

“폐하, 지금 이러실 때가.......”

막 심통을 부리려던 아메스는 이번에도 밀리타를 살짝 째려보았다. 하지만 황제의 관심을 얻고 있는 남동생의 모습에 밀리타 역시 그다지 유쾌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메스는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남매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베가 둘 사이에 살짝 끼어들며 말했다.

“폐하, 슈벨 부총리께서 대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으, 음, 그래?”

우베의 참견에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카렐은 조금은 섭섭한 표정으로 이라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언제 여유가 있을 때 가벼운 이야기나 나누어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누나와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라.”

아쉬운 듯 돌아서는 황제의 모습에 이라즈의 까만 눈동자 역시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수십의 시녀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멀어져 가는 황제의 뒷모습에 이라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밀리타가 동생을 바라보며 적이 쌀쌀맞게 말했다.

“아버님 말씀이 맞지?”

“예.......”

이라즈는 부끄러운지 짧게 대답하고는 얼굴만 붉혔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노려보며 밀리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싫다고 안하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동생의 느낌을 애써 과소평가하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밀리타가 동생을 놔둔 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어, 누님, 폐하께서 정말로 저를 불러주실까요?”

누나를 허둥지둥 따라붙으며 이라즈가 조금 긴장한 듯 물었다.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아버지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셨을까요? 지금까지는 저한테 아무도 사귀지 말고 순결을 지키라고 그렇게 강조하셨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저분을 모시라는 것도 그렇고......”

이라즈가 그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밀리타는 그런 동생의 눈가를 매만지며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넌 깊이 생각할 것 없어. 아버지가 언젠가 다 말씀해주실 테니. 난 바쁘니 나중에 보자. 다시 연락하마.”

동생을 정원에 놔둔 채 무언가에서 도망치듯 급히 빠져나온 밀리타는 황궁 본관에 들어서는 황제의 행렬과, 아직도 그쪽에서 넋 나간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운명의 신이시여, 그대의 불쌍한 자손들을 어이하리까?”

그날 저녁, 주류성 아랫자락에 마련된 연합군 숙영지에서 열린 큰 파티는 명목상으로는 전군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한 제롬과 샤자한, 두 최고제후의 배려였다. 지난 긴 행군에서 지칠 대로 지쳐있던 병사와 장교들은 이 기분 좋은 파티에 지난 수십일간의 지독한 행군의 기억도 잊은 듯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한쪽에는 간만에 함께 한 부인과 딸을 곁에 둔 샤자한 공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제롬이 평소 술자리마다 시끌벅적하던 그답지 않게 조용한 태도로 술은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함께 온 보안국 요원에게서 귀엣말과 함께 쟁반을 넘겨받은 베흔은 입가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확실하지?”

“물론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은 보안국 요원이 재빨리 자리를 비워주었다. 다행히 샤자한 공은 알리아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휴.”

옷차림을 정제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베흔은 아버지 샤자한 공과 함께 앉아있던 구르베스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소인이 특별히 한 잔을 올리오니 받으소서.”

보자기를 걷어낸 쟁반 위에는 황금빛 광택이 흐르는 특이한 술이 담겨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구르베스에게 베흔이 한마디 덧붙였다.

“수에니에서 나는 특이한 비방의 아주 귀한 술이옵니다. 한 잔 마시면 여성의 매력을 배가시켜준다 하니 황상의 총애를 얻게 되신 구르베스 마마께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풋,”

샤자한 공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도 지난밤 딸 구르베스가 황제와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소식에 입가에서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베흔에게서 술을 받아든 구르베스는 함께 있는 부모님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마지못해 입술에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동부의 음주식대로, 그 크지 않은 잔의 술을 한 번에 훌쩍 들이켰다.

“제가 바친 술을 기꺼이 드셔주시니 제가 영광입니다.”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물러난 베흔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제롬에게 힐끔 눈짓을 주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서 간만에 맛본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업혀가고 실려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나왔고, 평소 술이 세다고 알려진 구르베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베흔의 잔을 받기가 무섭게 근위대와 남부 장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 계속해서 술잔을 올렸다.

아버지 샤자한 공 역시 딸에게 거듭해 술을 권하는 그들의 모습을 ‘총애 받는 황비에게 일찌감치 줄을 대려는’ 수작 정도로 여기고 도리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쉴게요, 아버지.......”

거의 스무 잔에 가까운 술을 거듭해 마신 구르베스는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듯 테이블에 힘없이 엎드렸다.

“구르베스, 구르베스?”

샤자한 공이 딸의 등을 툭툭 두드렸지만 그는 눈동자까지 뒤집어진 채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얘가 이보다는 좀 더 먹었던 것 같은데.......몸이 약해졌나.......이봐, 부관.”

“이런,”

술 한 잔을 또 들고 왔던 베흔은 쓰러져있는 구르베스의 모습에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산지대라 기압이 낮아 술기운이 빨리 오르신 모양입니다. 날이 쌀쌀하니 빨리 따뜻한 곳에 모셔야겠습니다. 근위대 병영에 조용한 막사를 마련해 뒀으니 그곳에 모시겠습니다.”

“그러게나.”

샤자한 공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사오시안트 궁에 있는 이상, 딸을 돌볼 책임은 공식적으로 그가 아닌 근위대에 있었다.

“너희들!”

베흔의 손짓에 미리 대기하던 건장한 근위대 병사들이 잠든 구르베스를 등에 업었다. 구르베스는 누군가가 업는 느낌에도 미동조차 않은 채 마치 시체처럼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휴, 잠깐 볼일 좀.”

반쯤 술에 취한 제롬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구르베스가 실려 나가고 약 10여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는 따라오려는 남부 장교들도 모두 뿌리친 채 혼자 근위대 병영 쪽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내 팔자가 이것밖에 더 되겠어.”

하필 오늘 같은 날 일직사령을 맡은 릴라크는 연신 입을 삐죽거리며 손에 든 봉지를 쳐다보았다.

자정도 넘어 깜깜해진 숙영지를 혼자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던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봉지 안에서 돼지고기 덩어리와 작은 술병을 꺼내들었다. 이것도 연회장에 들어간 플라칼 가 중대장 녀석이 같은 가문 출신인 그를 챙겨준다고 나름대로 눈치껏 빼돌려서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같은 가문 놈뿐이지.”

그는 시끌벅적한 연회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병사들도 풀어져있는 판에 저런 술판까지 벌어졌으니 그로서는 잔뜩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일직사령인 그가 계속 연회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술 한 잔 얻어먹자는 것이 아니고 행여 있을지 모르는 군기사고 때문이었다.

“마셔? 말어?”

구석진 곳에 서서 술병을 들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바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인기척에 재빨리 봉지를 한구석에 숨겼다.

“응?”

그의 재빠른 눈썰미를 자극한 건 총사령관 제롬의 모습이었다. 제롬은 망토와 계급장, 장신구와 최고제후 서클렛을 모두 벗어놓은 채 모자까지 깊이 눌러 쓰고 보통의 장병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조명 밑을 지나는 그의 얼굴에도 술기운 때문인지 붉은 홍조가 잠깐잠깐 보였다.

‘저 녀석 뭐 하는 거지?’

그의 경계섞인 태도에서 릴라크는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언가 공식적인 일이었다면 오늘의 일직사령인 그에게 미리 알렸어야 정상이었다.

‘뭘 하려는 거야?’

그는 술과 안주가 든 봉지를 잘 숨겨두고는 멀찍이 어둠 속에서 제롬을 조심스레 쫓았다. 명색이 근위기병대장으로서, 경호원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그를 저렇게 보내주기는 어딘지 꺼림칙했다.

“근위대?”

릴라크가 몸을 움츠렸다. 저지 한 번 받지 않고 근위대 병영에 들어선 제롬은 웬 화려한 막사 앞에 멈춰섰다. 다른 막사보다 훨씬 큰 그 막사는 그가 보고받았기로는 오늘 이곳을 찾은 내명부 귀빈이 머물 곳이었다. 릴라크는 순간 기겁을 하며 입을 가렸다.

‘황비?’

근위대 막사 앞에 서 있던 쿠베는 제롬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눈짓을 보냈다.

플랩을 걷고 안에 들어선 제롬에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숨소리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약간은 거칠어져 있는 숨소리가 그의 동물적인 본능을 조금씩 자극했다.

“나쁘지 않군.”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든 구르베스의 옷자락은 이미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다. 제롬의 손끝이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는 건 바로 어젯밤, 동생 수우와 잠자리를 가진 바로 그 여인이었다. 베흔의 진짜 계획이 완벽하게 위장되기 위해서는 바로 오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냥 꿈으로 알아. 다 꿈이니까.”

제롬이 구르베스의 뺨을 살짝 꼬집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베흔이 먹인 그 ‘술’에 배란유도제와, 강력한 환각제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그 아비인 샤자한 공이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바보같은 수우 녀석 역시 이 여자 뱃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생각할 터였다.

“그래, 가문을 위한 거야. 이건 가문을 위한 거야.”

죄책감을 애써 합리화시키며 제롬이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베흔의 계획대로라면, 바로 자신의 자식이 새 황실의 대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레곤 대공주의 자녀와 결혼해 새로운 장태자, 아니 언젠가는 황제가 될 터였다.

그 멍청이 같은 열등한 동생 수우가 아닌, 바로 제롬 자신의 핏줄이 이후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마음을 굳힌 제롬은 잠든 황비 구르베스에게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환각제에 취해 의식을 잃은 구르베스는 그렇게 이 남자를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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