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2화 (401/1,132)

< -- 402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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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최고제후 네페티의 명을 받아 긴급 조직된 서부 토벌군의 전과가 별 볼일 없던 건 절반 이상 칼림의 책임이었다. 명색이 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모사라면 모를까 지휘관으로 어울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병영에서 지내기는 죽기보다 싫어했고, 계책과 모략에는 능했지만 거친 군인들에게 복종을 이끌어낼 정도의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렇다보니 노예 폭동을 진압하라는 실질적인 임무는 부사령관이며 황제의 남편 중 한명인 라바니 경에게 거의 맡겨두고 자신은 아켐의 사택에서 발 뻗고 뒹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웬일로 플레렌 가 1군단 병력 3천을 직접 이끌고 노예폭동과는 별반 상관도 없는 라호르 시로 향하고 있었다.

“최고제후께선 어디계신가.”

쌀쌀맞은 표정의 칼림이 네페티가 묵고 있는 호텔 옥상에 셔틀을 착륙시키며 호텔 보안요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질문하려던 그 보안요원은 칼림에 뒤이어 내려서는 수십의 장갑보병들의 모습에 놀라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칼림이 보안요원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호통치듯 물었다.

“어디 계시냐니까!”

무심코 호텔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보안요원은 호텔을 새카맣게 포위하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수백의 병사들을 눈앞에서 확인하고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42층.......특실에......”

한손에 시미터를 움켜쥔 칼림은 50여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호텔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냐고,”

자다 말고 북부대사 푸아킨 경의 갑작스런 알현, 아니 거의 기습에 가까운 막무가내 방문을 받은 네페티는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아당기는 푸아킨 경에게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뭔데 그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본토에 계신 오르마즈 경의 명령이십니다. 그냥 따라오십시오!”

오르마즈의 명령이라는 말에 멍 한 표정을 지은 네페티는 잠옷 위에 망토만 대강 두르고 제일 믿을만한 두 명의 경호원과 보좌관들만을 거느리고 허둥지둥 그를 따라나섰다.

42층의 특실을 나선 네페티는 푸아킨 경을 따라 무작정 계단에 뛰어들었다. 계단실 밖으로 이미 호텔을 포위한 수백이 넘는 병사들의 모습에 네페티가 순간 경악하며 물었다.

“저네들은 뭐야!”

“1군단 예하 4보병연대 병력입니다! 20분 전 주둔지를 무단이탈해 이곳에 왔습니다! 칼림 경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1연대는 종가로 진주했고 2연대는 다른 중요시설과 관사들을 점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고제후에 오르고 단 3개월 만에 벌어진 쿠데타 소식에 네페티는 넋 나간 표정으로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뭘, 뭘 잘못했다고......”

“공께서 잘못한 게 있어서 벌어진 게 아닙니다! 남부의 사주와 칼림 저자의 탐욕 때문이니 제발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지금 비행금지 명령으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니 일단 저희 대사관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원로 중에도 저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채 절반이 되지 않으니 일단 몸만 피하시고......”

헐떡이며 8층까지 계단을 달려 내려온 푸아킨 경은 그곳에 미리 기다리던 두 명의 북부 요원들과 마주쳤다.

“나갈 길은 찾아놨나?”

“예! 옆의 쓰레기 처리장 쪽으로 사다리를 설치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건장한 북부요원 한 명이 반 쯤 넋이 빠져 비틀거리는 자그만 네페티를 등에 업고 망토로 가린 채 다시 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정도 넘은 야심한 밤에 중무장한 수백의 병사들이 들이닥치면서 호텔 안은 투숙객들과 직원들이 온통 뒤엉킨 아수라장이었다.

낯선 남자의 등에 업혀 이 혼란통을 빠져나가던 네페티는 지독한 울분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삼켰다.

“여깁니다.”

관리실을 거쳐 테라스로 달려나간 북부요원은 네페티의 몸을 벨트로 단단히 동여맸다. 8층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그 까마득한 높이에 네페티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자신을 업고 있는 남자의 목을 꽉 껴안았다. 이곳부터 바닥의 쓰레기 처리장 건물까지는 보호망 하나 없는 줄사다리가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빨리, 빨리.”

테라스 난간을 넘어 사다리에 매달린 일행은 이곳을 포위한 쿠데타군의 눈을 피해 호텔의 가장 구석진 폐기물 처리장에 차례대로 내려섰다.

“담 밑에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호텔 건물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십여 명의 일행은 뒤편의 높은 돌담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여깁니다.”

북부요원이 낙엽과 흙으로 대강 가려놓은 바닥을 손바닥으로 급히 헤집자 사람 한 명 가까스로 빠져나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담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또 다른 사람이 빨리 나오라 손짓을 보냈다. 네페티가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제일 먼저 구멍을 빠져나가자 그 뒤를 이어 푸아킨과 다른 일행들이 차례대로 구멍을 빠져나갔다.

사람 키의 두세 배는 될 이 돌담 때문인지 쿠데타군의 모습은 아직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오르마즈님은 어디 계셔? 아직 북부에 묶여 계신거야?”

“지금 이곳으로 오기 위해 애를 쓰고 계십니다. 이곳에 몸소 오시기 위해 황상께 특별히 간청드리고 계신 걸로 압니다.”

푸아킨이 급히 차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빨리! 빨리 대사관으로 가!”

호텔을 좁혀드는 수백의 쿠데타군들을 뒤로하고 네페티가 탄 차는 북반구의 북부 대사관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네페티 부인이 북부 대사관으로 도주했음을 뒤늦게 알아챈 칼림은 심복을 동원한 오르마즈의 발빠른 대응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뒤늦은 일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는 3천의 병력을 동원해 북부 대사관을 완전포위하고 무력시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북부최고제후인 투르케스크에게도 충격이었다. 문제는 명색이 북부 수석대사관인 푸아킨 경이 최고제후의 허락도 없이 오르마즈의 명령만으로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북부 대사관에 네페티가 피신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보고받은 투르케스크 공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자신들의 대사관에 피신해 온 서부최고제후를 쫓아낸다는 것도 북부의 위신에 치명타를 가하는 짓이었다.

“제가 지시했습니다.”

아버지의 추궁에 오르마즈는 순순히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 망할 놈 같으니!”

순간 노기가 뻗친 투르케스크 공은 자신의 앞에 말없이 고개를 떨군 오르마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쓰러진 딸의 멱살을 움켜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감히 최고제후인 내 허락도 없이 대사에게 명령을 내려? 그래, 네놈은 그 꼬마년에 눈이 멀어 그랬다 치고, 네 말대로 움직인 푸아킨 그놈은 또 뭐냐? 앙? 그놈이 언제부터 네 꼬붕이였냐?”

“네페티 공이 남부로 시집가는 것은 어떡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아버님, 칼림 그자가 네페티 공을 테번 공과 결혼시켜 남부로 쫓아내고 자신이 서부의 실권을 쥐려는 수작인 것을 왜 모르십니까! 모두 다 제가 지시한 것이니 제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오르마즈가 그 회색빛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게 뭐가 어떻다고? 칼림 그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최고제후는 될 수가 없어. 서부는 최고제후가 쫓겨나고 지도력이 흔들리면서 중구난방이 될 게 틀림없어! 그러면 우리는 지난번 우리에게 칼을 겨누었던 서부를 떨궈내고......”

“서부는 몰락시킬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동반자로 끌어들여야 할 존재입니다! 동부는 지난 동지일 뿐 이제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새 최고제후인 샤자한은 동지로 삼기는 너무도 옹졸한 자입니다! 우리에겐 서부뿐입니다!”

오르마즈 역시 아버지의 기세에 지지 않으며 맞받아 언성을 높였다. 오르마즈의 대꾸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투르케스크는 오르마즈를 바닥에 동댕이치면서 목젖이 보일 정도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동반자? 너 미쳤구나, 지난번에 네 큰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리 끔찍하게 돌아가시는 걸 두 눈으로 봤으면서, 아니 너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치욕스러운 태형까지 당했으면서 그런 말이 네 입에서 나와? 이 후레자식 같으니! 네놈은 도대체 가문 사람이 맞는 거냐! 가문 뜻도 어기고 네 멋대로 행동한 게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알기나 해!”

어느새 눈까지 붉게 충혈된 투르케스크가 쓰러져있는 오르마즈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거의 이성을 잃은 아버지를 흰 무명포를 입은 누군가가 뛰어들며 급히 막아섰다.

“아버님, 그만두세요, 오르 언니 이야기도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이러셔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문제를 조용히 정리할 방법을 찾으셔야죠,”

방에 뛰어든 세네피스가 쓰러진 오르마즈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아버지의 발을 급히 붙들었다. 오르마즈는 동생을 거칠게 밀어내고 다시 일어나 이마에 핏대를 높였다.

“아버님! 제발 최고제후답게 행동하십시오! 지난 원한을 언제까지 붙들고 계실 겁니까! 이런 식으로는 끝도 안 납니다! 황제는 이미 제국을 장악했고 북부만의 힘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시란 말입니다!”

“현실? 이 망할 것 같으니, 그래서 지금까지 두 번이나 가문을 배신했냐!”

“전 가문을 배신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다시 고함을 지르려는 오르마즈를 세네피스가 급히 부둥켜안았다. 그는 씩씩대는 오르마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이듯 속삭였다.

“제발, 그만하세요, 아버지 성격 아시면서 왜이래요? 예?”

거의 필사적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막아서는 세네피스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무섭게 대치하던 오르마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서부로 갈 겁니다.”

“넌 지금 연금중이야.”

“방금 황상께 윤허를 받았습니다.”

“허, 그 황상인지 밥상인지 너한테는 더럽게 잘해주는구나? 그러면서 지난번 매질은 왜 했다냐? 뒷구멍으로 도대체 뭔 짓을 했냐? 소문대로 그 못난이 년하고도 침대에서 뒹굴기라도 했었냐?”

“아버님같은 분과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도 없군요.”

세네피스를 뿌리친 오르마즈는 문을 쾅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부로 향하는 셔틀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오르마즈는 뜬금없이 자신과 동행하겠다며 나선 이 막내 동생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조용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주무세요, 언니.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오르마즈의 팔을 베고 누워있던 세네피스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르마즈는 긴 눈썹을 까딱거리며 잠들어있는 이 동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도 매번 내 뒤치다꺼리만 하지 말고 슬슬 네 사람을 찾아야지.”

“필요 없어요. 전 이대로가 좋아요.”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허리를 꼭 안으며 어눌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 이런 거 아시면 기절하시겠다.”

오르마즈가 세네피스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할아버지 빌루이 카파키 공은 생전에 세네피스의 결혼, 아니 정확히는 오르마즈를 지나치게 따르는 세네피스의 모습에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종종 보이곤 했다.

한번은 오르마즈를 불러들인 할아버지 빌루이 공이 ‘세네피스가 저런 건 너 때문’이라며 투르케스크에게 ‘저 둘을 떼어 놓아라’고까지 명령한 일도 있었다.

그 덕에 가문 사람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오르마즈가 친동생까지 따먹었나?’라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오르마즈에게 세네피스는 그냥 자신을 유난히 헌신적으로 잘 따르는 여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르마즈는 겨드랑이를 베고 잠든 이 동생의 몸에 담요를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하지만 오르마즈 스스로도 다른 5명의 동생들과는 달리 이 막내에게만 유별한 애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유달리 많이 닮았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세네피스에게는 차마 이야기해 줄 수 없는 먼 옛날의 한 사건 때문일지라도.

“어디 가지 말아요,”

잠꼬대인지, 진담인지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가슴을 더 꼭 껴안으며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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