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3화 (402/1,132)

< -- 403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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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까지 대군이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공사를 맡은 헤즈 플라칼 장군은 휘하에 거느리게 된 2만여 명의 전투병들을 1차로 총동원해 계곡을 샅샅이 훑어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미 자정이 가까운 어두운 시각이었지만 촉박한 일정에 쫓기는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는 없었다.

“젠장할, 3일 이내에 이걸 어떻게 다 끝내라는 거야.”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을 내려다보며 헤즈가 연신 입을 씰룩거렸다.

족히 50보(30m)는 됨직한 폭에 깊이는 0.5스타디아(75m)나 되는 섬뜩한 골짜기가 주류성 공격군의 앞을 떡 하니 가로질러 막고 있었다.

"흔들지 말고 조용조용히 건너가! 한 번 흔들리면 다시 잡기가 어려우니까!"

사역부대 장교가 낭떠러지에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골짜기 사이로 누마 피카르 중랑장 휘하의 산악연대 병사들이 수십 개의 로프에 마치 사탕처럼 줄줄이 매달려 이 위험천만한 낭떠러지를 건너가고 있었다. 먼저 건너간 산악병들은 그 주변에 흩어져 혹시 모를 서부 보병들의 기습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헤즈의 바로 뒤에서는 종군 노예들이 이곳에 설치할 임시 교량 자재를 지고 와 쌓아 놓느라 꽤나 부산한 모습들이었다.

“첫 번째 계곡의 부교 설치 작업은 절반 이상 마무리되어 갑니다.”

사역부대 장교의 보고에 헤즈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첫 번째 계곡은 폭도 좁고 그다지 험하지도 않은 덕에 그냥 저냥 건너올 수 있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10개나 되는 골짜기 중에 지금 이곳 같은 험한 계곡이 앞으로 몇 개나 더 있을지 짐작조차도 가지 않았다.

잔뜩 불만 섞인 얼굴로 주변의 빽빽한 숲을 돌아보던 헤즈는 골짜기 건너편에 가 있는 산악연대장 누마 피카르 중랑장을 불러냈다. 델루지 가 출신의 저 무장은 최고제후 제롬과 근위대장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유능한 녀석이라 들었지만 군인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스파이 같은 느낌을 주는 기이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헤즈의 눈에는 어딘지 미덥지를 않았다.

“산악연대는 몇이나 건너갔어?”

“2천 중에 1400명 정도 건너왔습니다. 일단 교두보만 잡으면 교량 설치야 어려운 게 아니니......”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던 누마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움찔 했다. 그리고 같은 순간, 헤즈 역시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북쪽에 적병이다!”

북쪽 경계를 담당하던 부대에서 갑작스레 들어온 보고에 헤즈가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실 교량 설치 중에 적들이 어느 순간 기습을 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기습 아니냐! 놀랄 것 없이 계획대로......”

누마에게 막 명령을 내리려던 헤즈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비명소리와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는 곳은 계곡 건너편이 아닌, 헤즈가 있는 바로 이곳, 그것도 상당히 근접거리였다.

“어떻게 된 거야! 저놈들은 어떻게 여기로 건너온 거야?”

헤즈를 향해 숲 속에서 우루루 몰려나오고 있는 놈들은 틀림없는 발 가 소속의 서부 장갑보병들과 경보병들이었다. 정석대로라면 계곡을 건너면서 병력이 두 토막 났을 때 먼저 건너간 선봉대를 치는 것이 당연했지만 저들은 헤즈가 있는 본대 쪽을 먼저 쳐 온 것이었다. 그것도 주변을 수색하라며 빽빽하게 뿌려놓은 부대들을 어떻게 모조리 따돌리고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맙소사!”

순간 헤즈는 몇 달 전 있었던 탈라스 슈카른 계곡의 전투를 떠올렸다. 깎아지른 절벽에 눈 깜짝할 새 리프트를 박고 뛰어 오르던 서부 장갑보병들의 무서운 기동력에 그때만 해도 동맹군이었던 남부 보병들까지 경악을 했던 일이 있었다. 저들은 지난번처럼 계곡 밑을 타고 이곳까지 숨어 내려온 모양이었다. 지난번과 방법은 같았지만 이번에는 목표만 바뀐 셈이었다.

“장군님을 지켜!”

근위보병들과 아직 남아 있던 산악병들이 헤즈 주변을 급히 막아섰지만 숲 속에서 몰려나오는 서부 보병들은 족히 500명은 넘어 보였다. 로프에 걸려 골짜기를 건너고 있던 300여명의 산악병들이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장갑보병들은 적 보병을 공격하고! 경보병들은 노예와 사역병들을 죽이고 자재를 불살라 버려라! 산악병 놈들 도하용 로프를 끊어!”

기습부대를 이끌고 나온 주류성 수비군 부사령관 베나지 나하스 중랑장이 도끼를 뽑아들며 직접 장갑보병들의 선두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를 따르는 서부 장갑보병들은 단병접전이라면 제국 정규군 중 가히 최강으로 꼽히는 용사들이었다. 위력적인 할버드를 하나씩 쥔 장갑보병들은 경무장이 고작인 남부 산악병들을 무서운 기세로 돌파하며 중앙에서 보호받고 있는 헤즈를 향해 쳐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보병대 어딨어! 보병대 불러!”

공포감에 휩싸인 헤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 휘하의 중장보병들은 토벌을 위해 계곡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잘 걸렸다! 이 뚱보야!”

섬뜩한 도끼를 치켜들고 덤벼오는 베나지의 기세에 놀란 헤즈가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난히 불룩한 배와 비둔한 몸매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지휘관의 뒤를 근위보병들이 허둥지둥 막아섰다.

“자, 장군님! 아래쪽에......”

적들의 칼날에서 가까스로 몸을 피한 헤즈는 한쪽에서 느껴져 오는 화끈한 열기에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노예들이 기껏 이곳까지 지고 올라온 부교 자재들이 인화물의 맹렬한 불꽃 속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부 경보병들이 달아나는 노예와 사역병들을 쫓아다니며 족족들이 도륙하고 있었다.

“썅! 제기랄!”

자재가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기에 충분했지만 지금 그에게는 당장 자신을 죽이겠다며 달려드는 수백의 서부 장갑보병들이 더 큰 문제였다.

“헤즈 놈이 저ㅤㄱㅣㅆ다!”

또다시 덤벼드는 수십의 장갑보병에 기겁을 한 헤즈는 입고 있던 무거운 갑옷과 투구까지 허둥지둥 벗어 던지고는 숲으로 결사적으로 도망쳤다. 남은 자재가 타들어가건, 남은 노예와 사역병들이 몰살당하건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대장이 도망치는 모습에 그의 근위보병들까지 뒤따라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이 겁쟁이 새끼야! 니 대갈통은 어디 놓고 도망가냐!”

헤즈의 투구를 도끼 끝에 매단 베나지와 장갑보병들이 도망치는 헤즈의 뒤에 대고 큰 소리로 비웃음을 퍼부었다.

"나하스 중랑장님!"

"왜!"

적들을 뒤쫓으며 잔뜩 격앙되어 있던 베나지는 주변 경계를 맡은 부대의 다급한 보고에 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북쪽에 남부 중장보병들입니다!”

“알았다! 퇴각! 퇴각한다!”

베나지의 명령에 이곳을 기습한 500명의 서부 장갑보병들과 경보병들은 일제히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헤즈는 놓쳤지만 적들의 교량 자재를 모두 태워버렸으니 적들의 진격을 지체시킨다는 1차 임무는 모두 완수한 셈이었다. 적 지원병이 오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로프!”

베나지의 명령에 반대편의 높이가 조금 낮은 절벽에 미리 대기 중이던 서부 사역병들이 50개의 로프를 절벽을 가로질러 일제히 발사했다. 차고 있던 벨트에서 일제히 작은 윈치를 뽑아 든 5백 명의 정예 장갑보병들은 그들이 쏘아 준 로프에 고리를 걸고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중력에 의해 가속된 병사들은 50개의 로프를 타고 바람같이 빠른 속력으로 반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놈들 어디 갔어!”

뒤늦게 쫓아온 남부 중장보병들이 절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로프를 끊어 내고는 이쪽을 향해 엉덩이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저들의 재빠른 몸놀림과 상황 대처는 둔중한 남부 중장보병들이 감히 흉내 낼 수가 없는, 가벼운 서부보병들만의 장기와도 같았다.

"어쩌지......."

지원군을 이끌고 온 남부 보병대 지휘관의 멍한 눈길이 골짜기 건너편, 그곳에 이미 건너가 있던 산악병 연대를 향했다.

건너편에서 불타고 있는 부교 자재들과, 모두 끊어져 버린 로프를 바라보며 가장 공포에 떨고 있는 건 이미 달아나 버린 헤즈가 아니었다. 본대와 연결된 로프가 끊기면서 골짜기 반대편에 얼떨결에 고립된 누마 피카르 중랑장의 산악연대는 이제 완전히 적들의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건너편의 중장보병들이 사역병들과 장비를 수습해 다시 로프를 설치하고 건너온다 해도, 자신들이 모두 죽기 전에 도착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제기랄, 건너오면서 기분이 더럽다 했어."

공포감에 조금씩 오그라드는 속내를 애써 감추려는 듯, 누마가 침을 퉤 뱉었다.

이번 전쟁은 그의 일생에 최고의 순간이었다. 비엔에서는 코리온을 붙잡기도 했고, 탈라스에서는 최고제후 샤드니를 생포하는 큰 공훈을 세웠던 것도 그였다. 그 덕에 교위에서 중랑장으로 승진했고, 그를 '미래의 보안국장감'으로까지 추켜세운 제롬은 이번 전쟁만 끝나면 장군으로의 승진까지도 약속해 준 터였다.

“버틸 때까지 버틴다......”

칼을 뽑아 든 누마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골짜기 주변, 비탈지고 빽빽한 숲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듯, 등 뒤의 까마득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중장보병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 산악병들 역시 조금씩 공포에 질려갔다.

"돌격!"

순간 숲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마치 맹수처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 있던 병사들이 마치 본능처럼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우라질 남부 새끼들!”

제일 선두에서 큰 함성과 함께 달려나오고 있는 수백의 거한들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번쩍이는 색색의 팔찌를 끼고 골짜기를 통째로 날릴 듯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해오는 그들은 동맹군 소속의 가디언들이었다. 가디언들의 공격에 주춤거리던 2천여 산악병들은 그 뒤에 몰려나오는 5천이나 되는 서부 보병들의 모습에 경악을 하며 뒷걸음쳤지만 등 뒤로도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그들에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짜 황제의 무리들에게 황상과 학장님의 위엄을 보여줘라!”

시미터를 들고 선두에서 돌진해 온 주류성 수비군 사령관 사르키스가 서부 보병들과 전사단 가디언들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사르키스는 남부에 포로로 잡혔을 때의 분풀이를 하듯 눈앞을 가로막는 남부 보병의 목을 단 한칼에 베어내 발로 힘껏 짓밟았다.

"적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말라는 황상의 명이시다! 포로 따위는 없다! 모두 죽여!"

2천의 산악연대 병사들을 새카맣게 에워싼 동맹군 가디언들과 서부 보병들은 이미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이들을 무섭게 조여가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병력의 총 공세에 잠시 명령을 내리는 것조차도 잊었던 누마는 옆에서 악을 쓰고 외치는 참모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연대장님! 남쪽에서 방금 본대를 기습했던 장갑보병이 또 올라옵니다!”

누마는 두 다리의 힘이 쫙 빠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무력하게 당해줄 수는 없었다.

"밀집해! 밀집해야 더 버틴다! 버티면 산다!"

누마의 명령은 이런 상황에서는 거의 먹히지 않았다. 수백의 가디언까지 섞인데다가 무려 3배가 넘는 압도적인 병력에 휩쓸린 산악병들은 싸운다기보다는 학살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당했다. 대오 따위는 가디언들의 첫 돌격에서 일찌감치 깨져버렸고,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거리거나 절벽으로라도 무작정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임기응변이라면 누구에도 지지 않을 누마였지만 완전히 고립된 지금만은 대책이 없었다.

"연대장님! 저기 보십시오!"

부장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에 누마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 가디언에게 쫓겨 도망치던 병사들 중 몇이 까마득한 골짜기 아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는 무작정 몸을 던지고 있었다.

"저 미친놈들! 다 죽어!"

하지만 이 역시 이성을 잃고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말리지는 못했다. 골짜기 아래를 흐르는 짙푸른 물줄기에 마치 홀린 듯, 아니면 저 물이 자신을 살려주리라 믿었는지 절벽 밑으로 병사들은 마치 경쟁하듯 몸을 날렸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휘관인 누마의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썅, 별 수 없지.”

무기를 들고 적진 사이를 급히 헤집던 그의 시선은 가디언들과 함께 산악병들을 잡아 죽이고 있는 적 지휘관 사르키스에게 멈췄다. 6척이 훨씬 넘는 장신에 우람한 체구의 누마에 비하면 서부 혈통의 사르키스는 왜소하다고 해도 됨직한 작은 몸집이었고, 검술 실력도 아주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누마가 언뜻 보기에도 1대1로 붙기만 한다면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듯 싶었다.

장검을 단단히 고쳐 쥔 누마가 아수라장이 된 부하들을 거칠게 떠밀며 이 만만해 보이는 적을 향해 내달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서부 경보병 분대장의 몸통을 단칼에 대각선으로 토막내버리며 포효하듯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이 서부 광신도놈아! 나하고 붙어보자!”

산악병 한 명을 찔러 쓰러뜨린 사르키스 역시 부하의 비명소리에 옆을 휙 돌아보았다.

“남부 델루지 가 특무대 중랑장 누마 피카르다!”

“오호, 학장님을 폭행했다는 그 무엄한 놈이 네놈이구나! 서부 세호 가 장군 사르키스 세호다! 잘 만났다!”

악을 쓰는 함성과 함께 시미터를 한 손에 번쩍 치켜든 사르키스는 별다른 탐색전조차 없이 누마를 향해 거칠게 내달았다.

“이악!”

온 힘을 실어 내리찍는 사르키스의 선제공격을 방패를 들어 어렵지 않게 막아낸 누마는 그 틈새를 잡아 오른손의 장검을 힘껏 올려쳤다. 하지만 사르키스 역시 둥근 방패로 그의 손목을 힘껏 후려지며 그 틈새로 칼을 재빨리 내질렀다.

손목을 찍힌 누마가 순간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마는 공격하느라 잠시 허점이 드러난 사르키스의 머리를 향해 장검을 힘껏 내리꽂았다.

“이 콩알만한 놈아!”

누마의 기습에 작은 키의 사르키스가 급히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후였다. 사르키스의 옆머리를 내리친 누마의 장검은 그의 투구에 달린 깃털 장식을 옆으로 날리며 그의 왼쪽 얼굴을 세로로 사정없이 갈랐다. 놀란 사르키스가 방패를 치켜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누마의 어마어마한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아악!”

사르키스는 칼에 베인 얼굴을 방패로 급히 가리며 유난히 큰 비명과 함께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놈! 끝이다!”

기회를 잡은 누마가 묵직한 장검을 번쩍 치켜들고 사르키스에게 맹렬하게 내달았다. 상대의 반응,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타격감으로 보아 상대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것이 확실했다. 다친 얼굴을 방패로 급히 가리면서 사르키스의 하복부 아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힘도 없는 것이! 죽어!”

누마는 장검 끝으로 사르키스의 아랫배를 겨누고 힘껏 뻗었다. 우렁차게 포효하며 내지르는 누마의 칼을 향해 사르키스가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내리찍었다. 순간 잠시 스쳐간 사르키스의 얼굴을 확인한 누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속았다!'

뺨 한쪽을 베인 사르키스의 얼굴은 그렇게 큰 비명을 내지르게 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대신 방패를 쥐고 있던 그의 왼손바닥이 깊이 잘려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제대로 봐야지!"

방금 전까지도 비틀거리던 사르키스는 재빨리 옆으로 스텝을 옮겨 그의 둔중한 찌르기 공격을 피해냈다.

“젠장!”

이미 한 번 방패에 얻어맞았던 누마의 오른손을 깊이 끌어들인 사르키스는 같은 곳을 방패로 또 한 번 힘껏 내리찍었다. 단단한 쇠가 박힌 방패 아래쪽 모서리는 둔기에 못지않은 충격으로 이미 얼얼하던 그의 손목을 타격했다.

"아악!"

순간적으로 손목이 마비된 누마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사르키스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방패를 치켜들며 몸을 바싹 낮춘 사르키스는 자신의 작은 키를 역이용해 누마의 무릎을 향해 힘껏 시미터를 휘둘렀다.

“끄아악!"

예리한 시미터에 무릎을 베인 누마가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방패를 한쪽 발로 차낸 사르키스는 이 덩치 큰 적수의 정수리를 예리한 시미터로 힘껏 내리찍었다. 누마는 더 이상의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그의 쪼개진 투구 사이로 붉은 선혈과 뇌수가 튀어 올랐다.

“하, 학......”

사르키스를 올려보며 온 몸을 부르르 떨던 누마는 결국 힘없이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적 대장을 쓰러뜨렸다!”

마치 야수처럼 입을 벌리고 괴성과 함께 덤벼든 사르키스는 반쯤 살아있던 누마의 목을 서슴없이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잘린 뼈와 힘줄 사이로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는 묵직한 머리를 한 손에 번쩍 치켜들었다. 델루지 가를 이끌 미래의 무장으로 손꼽히던 이 젊은이는 이렇게 황제령의 산악에 그의 마지막 피를 심었다.

"적통을 이으신 황상의 뜻을 감히 어긴 응징이다! 알겠는가!"

사르키스의 우렁찬 고함소리는 적들을 도륙하던 서부 병사들에게는 물론이고, 그들에게 쫓기고 있던 남부 병사들에게 무서운 공포처럼 퍼졌다. 흥안령 중턱의 이 작은 숲은 카렐의 즉위 이후 거둔 첫 번째 대규모 승전과 함께 사기충천한 서부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소리로 마치 산사태처럼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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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부터 파트 2의 본격적인 전투씬의 시작이군요.

전투씬을 중간에 자르기가 뭣해서 그냥 이어붙이다보니 보시다시피 좀 깁니다.

적당량의 비축분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다음 연재는 금요일 정도에 있을 예정입니다. ^^

<가시는 길에 코멘트나 추천도 잊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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