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4화 (403/1,132)

< -- 404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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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가 결국 멋대로 서부에 가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투르케스크 공은 겉으로는 소리를 질러대고 마구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난감해진 상황을 홀로 타계해 낼 자신이 없었다. 아마 오르마즈도 아버지가 결국은 이리 될 것을 짐작하고 일을 저질렀을 터였다.

딸이 괘씸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던 투르케스크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은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투르케스크 공과 마주앉은 베흔은 안 어울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하인이 가져온 차를 들이켰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다혈질 최고제후의 속내를 그도 모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저 오랜 원수와 싸우러 온 건 아니었다.

“오르마즈 경께선 서부에 가셨다고요.”

“내 적장자가 어디 있건 자네가 상관할 바가 없지 않나?”

투르케스크의 퉁명스런 응대에 베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소신 황상의 특명을 받자옵고 이 자리에 왔사오니......”

“잡소리 집어치고 할 말이나 하게.”

투르케스크가 삐딱하게 돌아앉으며 다시 말했다. 그의 이런 무례한 태도를 어차피 예상했던 베흔으로서는 새삼스레 화를 낼 필요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황상께서는 이번 일이 전후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제국의 분위기에 자칫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크게 심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오르마즈 경께서 북부와 서부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시기를 바라고 계신 것 같습니다.”

베흔은 창백해지는 투르케스크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명성이나 권위, 그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능가하고 있는 무서운 적장자에 대한 질시와 걱정이 순간 그의 눈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투르케스크의 변심에 내심 쾌재를 부르며 베흔이 말을 이었다.

“연금 중인 오르마즈 경에게 서부행을 특별히 윤허하신 것도 그 때문이죠. 뭐, 연금기간 3년 연장이라는 조건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반대파의 입막음을 위한 수사일 뿐이고.”

투르케스크 공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애써 추슬렀지만 입가는 여전히 씰룩거리고 있었다. 베흔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오르마즈 경의 힘으로 수습한다면 칼림은 서부에서 실각할 테고 서부에서 네페티 공의 친정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을 겁니다. 그것이 황상의 노림수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서 오르마즈 경에게 윤허와 함께 별도로 특명을 내리신 것도 같던데 그 내용은 서부와 북부와의 관계 개선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투르케스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내용들만 교묘하게 짜깁기해 놓은 베흔의 말은 그의 속을 긁어놓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는 딸 오르마즈가 어쩌면 황제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원수 같은 서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것도 황제의 지시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의 얼굴이 순간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베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황상의 뜻을 잘 유념하시고, 현명히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투르케스크의 접견실을 나선 베흔은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쨌든 그는 황제가 전하라는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뉘앙스는 많이 달랐지만.

어쨌든 황제가 오르마즈의 혼인을 탐탁지 않아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오르마즈의 서부행을 흔쾌히 용인해 준 것을 보니 그가 파혼으로 대외적인 망신을 당하는 것 또한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이번에 베흔을 파견하면서 전한 황제의 뜻은 ‘이번 일을 오르마즈가 해결하게 내버려둬라’라는 것이었지만, 저 눈치없는 다혈질 최고제후가 과연 황제의 뜻대로 움직여줄지는 베흔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베흔이 나간 뒤, 투르케스크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가 남극성당 교수일 때만해도 이 잘난 딸은 그에게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최고제후’라는 감투를 쓴 지금, 저 무서운 적장자가 언젠가 아버지의 자리를 뒤집어엎을 것이라는 공포는 내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둘째 일라드의 휘하에 정규군과는 별개의 ‘친위대’를 만들어가며 신변 안전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오르마즈가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정규군 무장들에 대한 그의 불신 때문이었다. 심지어 북부인들 사이에서 투르케스크가 죽고 오르마즈가 최고제후가 되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걸 하는 말이 공공연히 오가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우라질 년들.”

투르케스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년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둘밖에 없었다. 눈엣가시같은 딸 오르마즈와 드러나지 않게 그의 뒤를 밀어주는 황제, 그 둘이 문제였다. 저 둘을 놔둔다면 언젠가 최고제후의 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는 탁자 위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비서관이 들어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굳은 표정의 투르케스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라드를 불러와라.”

북부 카파키 가 대사관을 포위한 칼림의 플레렌 가 쿠데타군들은 거의 나흘 동안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마즈의 계획대로,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황은 쿠데타를 벌인 칼림에게 조금씩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오르마즈에게 힘을 주듯, 황제는 ‘전쟁도 끝났으니 감히 지역간에 충돌을 일으키는 무엄한 것들은 근위대를 동원해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엄포까지 놓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칼림이 감히 북부 카파키 가 대사관에 진입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녀석들 반응은 여전하냐?”

칼림과 4번째 협상을 하고 돌아온 동생 세네피스에게 오르마즈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곁에는 굳은 표정의 네페티가 여전히 자리잡고 서 있었다. 지난 사건에서 충격을 많이 받은 듯 그는 오르마즈의 곁에서 하루 종일 떠나지를 않았다.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하지만 녀석들 전보다 많이 초조해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겠지.”

오르마즈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네페티를 돌아보았다. 그간 잠도 거의 이루지 못해 많이 꺼칠해진 이 약혼자의 얼굴을 오르마즈가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세네피스가 그 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본가에서 아버님이 노발대발하고 계신 모양이시던데......”

“이젠 어쩔 수 없지.”

오르마즈가 허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최소한 생각이 있으시다면 당장은 공개적으로 뭐라 못하시겠지. 가문의 대외적인 체면이 걸린 일이니.”

“그렇겠죠,”

세네피스 역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르마즈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씁쓸한 표정의 오르마즈는 이 동생의 손등을 말없이 어루만져주었다.

자신의 약혼자에게 지나치리만큼 가까이 있으려 하는 세네피스를 고깝다는 듯 살짝 째려본 네페티는 오르마즈의 무릎 위에 앉으며 그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안아주세요.”

세네피스의 손을 어루만지던 오르마즈의 손길은 이번에는 네페티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네페티의 작은 몸을 품에 꼭 안은 오르마즈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순간 꽉 깨문 세네피스의 아랫입술 사이로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거의 저주에 가까운 그의 웅얼거림은 다행히 입속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네년이 계속 행복할지 어디 두고 보자.......’

둘 사이의 묘한 냉기류를 눈치챈 오르마즈는 네페티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대사 푸아킨 경이 문을 두드리고는 모습을 나타냈다. 이 어색하던 분위기에서 일단 벗어난 오르마즈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가?”

“본가에서 보급품 셔틀이 왔습니다.”

“보급품?”

“외부가 폐쇄되어 일체의 물품을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별다른 비축분이 없어서 본가에 생필품과 식료품이라도 반입해달라 요청했습니다.”

푸아킨의 말에 오르마즈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네. 본가에서는 별 말 없나?”

“아직은 조용합니다. 이번 일에 해명서를 작성하라는 명이 온 것만 빼면.......”

“나 때문에 난처하게 되어서 미안하네. 푸아킨 경.”

“어차피 각오했던 일입니다.”

푸아킨이 고개를 떨구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이 곧 자넬 해임할 것 같으시네. 하지만 내 자네에게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염려는 말게.”

“무엇이든 각하 원하시는 뜻에 따르겠습니다.”

창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던 오르마즈는 갑자기 옥상 주기장 쪽에서 들려온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뭐, 뭐야!”

기겁을 한 오르마즈는 네페티와 세네피스를 뒤로 밀치며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역시 소스라치게 놀란 푸아킨에게 자리를 지키라 눈짓을 보낸 오르마즈는 칼을 움켜쥐고 달려나가 계단 위를 올려보았다. 또다시 울린 째지는 비명과 함께 옥상을 지키던 대사관 경비병 두 명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뭐냐! 서부 놈들이냐! 감히 대사관에......”

고함을 지르며 달려 올라가는 오르마즈의 앞을 대사관 무관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서부 놈들이 아닙니다! 본가의 종장님 친위병력인 것 같습니다!”

“무어!”

순간 머릿속아 아찔해진 오르마즈는 온몸이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옥상을 검거하고 몰려 내려오고 있는 병사들은 아버지 투르케스크와 동생 일라드를 따르는 가문 ‘친위대’ 병사들이었다.

“무기를 내려놓으십시오! 각하! 종장님의 명이십니다!”

선두에서 달려온 친위대 장교와 십여명의 병사들이 오르마즈에게 도끼를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그 뒤로도 20여명의 병사들이 이곳 대사관 직원들을 때려눕히며 몰려들었다.

“닥쳐! 이 망할 새끼들아!”

악을 쓰며 고함을 내지른 오르마즈는 등뒤를 가로막은 친위대 두 명의 머리를 칼집으로 후려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네페티! 네페티!”

친위대들을 떨구고 가까스로 응접실에 돌아온 오르마즈는 잔뜩 겁에 질려있는 네페티의 손을 붙들고 무작정 반대편으로 뛰쳐나갔다.

“여기! 여기다!”

옆에서 튀어나온 친위대 병사의 턱을 발길질로 단번에 날려버린 오르마즈는 다시 방향을 틀어 지하실로 뛰쳐내려가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이 둘에게 지금 도망칠 곳은 그곳 한군데뿐이었다. 그리고 잘만 하면 지하실 작은 창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가는 기대도 아직은 살아있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달려내려가는 오르마즈의 손은 소중한 약혼자의 작은 손을 으스러질 듯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오르마즈가 순간 주춤거렸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누님.”

지하실 복도 한쪽에서 튀어나온 건 남동생 일라드였다. 동시에 5명의 창병이 일제히 몰려나와 그 좁은 복도를 꽉 막아섰다. 오르마즈를 뒤쫓아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뒤마저 막아버리면서 오르마즈와 네페티 이 둘에게는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한 손에 칼을 쥔 오르마즈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네페티를 한 팔로 꽉 껴안았다.

“비켜라, 일라드.”

“아버님의 명을 거역하실 생각입니까? 누님?”

“말도 안 되는 명까지 다 들을 필요는 없다. 빨리 비켜라. 일라드. 북부를 위한다면 네놈 정도 베고 지나갈 수도 있다.”

섬뜩한 눈을 부릅뜬 오르마즈의 칼날이 자신의 코를 똑바로 겨누자 순간 움찔한 일라드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당장 비키라니까!”

쩌렁 하는 오르마즈의 고함소리가 지하 복도를 뒤흔들었다. 그의 기세에 덜덜 떨던 일라드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상황에서 오르마즈를 죽인다면, 그의 평생의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금 누나는 가문의 명령에 불복하고 있었고, 적장자가 될 수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눈가에 지위에 대한 탐욕과, 누나에 대한 최소한의 죄책감이 뒤엉켜 잠시 갈등을 빚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공격해!”

다른 사람도 아닌 북부의 영웅 오르마즈를 공격하라는 명령에 병사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그들을 자극하듯, 창을 앞세운 친위대 장교와 도끼를 치켜든 일라드가 오르마즈의 양쪽에서 동시해 쇄도했다. 그리고 창을 든 병사들 역시 반사적으로  지휘자의 뒤를 따라 고함을 지르며 창을 뻗었다.

“이악!”

자신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창날 2개를 어렵게 쳐낸 오르마즈는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느낌에 자리에서 멈칫거렸다.

“빌어먹을!”

칼을 반 바퀴 휙 돌린 오르마즈는 등에 박혀있는 친위대 장교의 창자루를 힘껏 잘라내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함께 있던 네페티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오르마즈 님!”

“죽여! 죽이란 말이야!”

눈에 살기를 곤두세운 일라드가 누나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며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네페티를 구석에 몰아붙이고 몸으로 막아선 오르마즈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10개 가까운 창과, 일라드가 내던진 투척도끼의 바람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제기랄!”

날아오는 도끼와 창을 힘겹게 쳐낸 오르마즈의 허벅지, 그리고 옆구리를 또다시 2개의 창이 파고들었다.

“하.......아.......악......”

무려 3군데를 찔리면서 온몸의 힘을 잃은 오르마즈가 결국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네페티 공을 밖으로 모셔라.”

일라드의 명령을 받은 친위대 병사가 네페티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안 돼......”

오르마즈가 버둥거리며 끌려 나가는 네페티를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거친 병사들에게 붙들려 지하실에서 끌려 나가던 네페티 역시 쓰러져 피를 흘리는 오르마즈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이러면 안돼요! 이러면 안 된다고요!”

“다 데리고 나가. 지하실에 한 놈도 남아있지 마라.”

일라드가 손에 쥔 타바진 도끼날을 어루만지며 친위대 장교에게 속삭였다. 일라드의 속내를 바로 눈치챈 그 장교는 잠시 머뭇거리며 이 기이한 남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로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 그 장교의 모습에 일라드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차기 친위대장이면 되겠냐?”

“......멀찍이 떨어져 있겠습니다.”

그제야 뒤로 휙 돌아선 장교는 오르마즈를 향해 몸부림치는 네페티 부인과, 함께 온 병사들을 모두 이끌고 바깥으로 멀어져갔다.

“네페티, 네페티,”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네페티를 따라가려던 오르마즈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생애 두 번째로 어렵게 만난, 그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었던 그 여인이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첫사랑과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떨어지게 된 네페티의 울음소리가 지하실 복도 너머로 웅웅거리며 멀어져갔다.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귓가에 새기며 오르마즈가 탄식을 내뱉었다.

“죽일 테면 빨리 죽여라, 일라드.”

오르마즈가 입에 가득 찬 피를 뱉어내며 헐떡거렸다.

“북부를 위해서라면.......저도 누나 정도는 베어버릴 수 있죠.”

“합리화시키려고 애쓸 거 없다.”

쓰러져 있던 오르마즈가 이 동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르 언니! 오르 언니!”

복도 건너편에서 들려온 악을 쓰는 고함소리는 세네피스의 것이었다. 병사들이 모두 사라진 사이 오르마즈를 쫓아 달려온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일라드가 도끼를 번쩍 쳐들었다.

“언니! 어디 있어요?”

같은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세네피스가 붉어진 얼굴로 모습을 나타냈다. 오르마즈는 잘 알고 있었다. 일라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막내여동생 정도는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잔혹한 남자였다.

“돌아가! 세네피스!”

잠시 모든 것을 포기했던 오르마즈는 막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런 썅! 죽어!”

힘껏 도끼를 내리치던 일라드는 순간 몸을 휙 돌린 오르마즈의 정강이에 발목이 걸리면서 옆으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넘어진 일라드를 온몸으로 내리누르며 오르마즈가 세네피스에게 악을 썼다.

“오지 말라니까!”

잠시 오르마즈에 깔려있던 일라드는 이미 다친 이 누나를 발로 힘껏 차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맙소사!!”

병사들을 따돌리고 오르마즈를 쫓아 달려온 세네피스는 눈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놀라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치빠른 세네피스는 이 음흉한 오빠가 언제든 못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듯 일어난 세네피스는 두려움조차 잊은 듯 이미 피가 난무하는 그 둘의 싸움에 무작정 달려들었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일라드 오라버니!”

“꺼져 이년아!”

“나가라니까! 세네피스!”

오르마즈는 일라드가 뒤를 돌아보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도끼를 쥔 그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떨군 일라드는 소매 속에 숨겨놓았던 작은 단검을 재빨리 뽑아들었다.

“죽어!”

“악!”

오르마즈의 목을 향해 내지르던 단검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비명소리와 동시에 그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급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오르마즈를 안았던 세네피스가 그 단검 끝에서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단검에 찢겨진 그의 날갯죽지에서 일라드의 손을 향해 선홍색 굵은 핏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칼을 몸으로 막아낸 세네피스는 자신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오르마즈를 향해 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이곳 대사관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그 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볼 수 있었다.

“개새끼가 누굴 감히!”

완전히 이성을 잃은 오르마즈의 눈에는 이제 아무 것도 분간되지 않았다. 마치 괴물로 돌변한 듯, 떨어진 도끼를 덥석 집어든 그는 잠시 멍해져있던 동생 일라드의 얼굴을 사정없이 올려쳤다.

“아아악!”

순식간에 얼굴로 날아든 도끼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일라드의 코와 뺨을 두동강내고는 공중을 붕 스쳤다. 얼굴을 감싸 쥔 일라드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계속 울부짖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그가 더 이상의 소리를 지를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감히 네놈이.......”

일라드의 목을 얽어버린 오르마즈 팔과 손등에 그의 광기를 나타내듯 굵은 힘줄이 마치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버둥거리는 일라드의 목이 뚝 뚝 하며 한 마디씩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조금씩 돌아갔다. 핏발이 곤두선 오르마즈의 회색빛 눈동자에서는 초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언니, 언니.”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세네피스가 반쯤 미친 오르마즈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예?”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뺨을 더듬으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오르마즈의 팔에는 숨이 반쯤 끊어져가는 일라드가 눈이 뒤집힌 채 가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살아있어요, 언니, 제발.......”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의 손을 끌어당겨 가슴에 얹으며 울먹였다. 아직 따뜻한 동생의 체온을 느낀 오르마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일라드의 목을 얽고 있는 그의 팔에서도 비로소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리는 오르마즈를 세네피스가 안으려 했지만 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온몸에 남은 큰 상처를 멍한 얼굴로 돌아보던 오르마즈는 마치 시동이 꺼진 기계처럼 바닥에 천천히 쓰러졌다.

“언니, 언니?”

조금씩 의식을 잃어가는 오르마즈의 가슴에 역시 피투성이가 된 세네피스가 울먹이며 얼굴을 묻었다.

“나 두고 가지 말아요.......나 두고 가지 말라고요. 예?”

대사관 지하의 음습한 복도에 쓰러져있던 세 명의 카파키 가 종가 남매들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격분한 투르케스크가 장남 일라드의 모든 공직을 빼앗아버렸다는 것 정도가 그 정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할뿐이었다.

같은 북부의 군인이 북부대사관에 벌였던 이 기이한 ‘진압작전’ 이후, 북부 최고제후 투르케스크 공의 특명으로 이곳에 피신중이던 서부 최고제후 네페티 공은 결국 칼림의 쿠데타군에 넘겨졌고, 투르케스크 공의 그 쓸데없는 고집은 가문의 대외적 위신이 땅으로 추락하면서 그 매운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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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또 깁니다;;; 비축분을 이렇게 까먹으면 정말 곤란한데 큰일이군요.

정말로 며칠 후에 다음회를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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