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05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
.
.
산악연대의 전멸로 흉흉한 분위기에 빠져든 연합군 지휘부에 뒤이어 날아든 소식은 가뜩이나 가라앉은 사기를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보벤, 부주의했구나.”
호랑이가죽 의자에 앉아있던 샤자한 공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의 앞에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보벤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부주의한 건 접어두고, 왜 이 일을 내게 보고하지조차 않았느냐?”
“그, 그건.......”
“기병대 중랑장이 적에게 투항을 해 버린 것을 내게까지 쉬쉬하다니, 네놈이 제정신이냐.”
샤자한 공이 그 째진 눈을 부릅뜨며 장손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것도, 플로브 경의 손자를 네가 멋대로 매질을 해서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이 새끼가 완전히 미쳤구나!”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샤자한 공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그는 투구를 집어들고는 이 한심한 장손자의 얼굴에 들입다 내던졌다. 날아오는 투구에 코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보벤은 악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 편지 내용이 도대체 뭔지 아냐? 앙? 읽어봐라! 네가 해 놓은 바보짓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샤자한 공이 넘어진 보벤의 얼굴이 두루마리를 냅다 집어던졌다.
보벤이 더듬거리며 펼쳐든 문서에는 하크로딘 가 영지인 코라산 내 귀족 모임인 ‘평의회’ 의장 샤르바누 하크로딘 부인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바로 출정 직전, 동맹군 측으로 투항해버린 카베 하크로딘 중랑장의 어머니였고 얼마 전 죽은 종장 플로브 하크로딘 경의 장녀였다.
“가, 가문 종장이신 아버님 플로브 하크로딘 경께서 작고하시었고.......장조카인 잘루크가 전사하였으며, 그 동생은 심약하고 우둔하여 가히 종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바, 이에 평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본인 샤르바누 하크로딘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이며 동부 제3제후가 되었음을 감히 고하옵니다.......”
“계속 읽으라고!”
샤자한 공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보벤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가, 가문 직계 2명이 연이어 목숨을 잃는 전대미문의 변이 발생하여.......가문의 내정이 혼미상태에 빠진 바, 이번 원정에 참여하고 있는 가문 기병대 5천을 속히 철군시키고자 하니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썅!”
발끈한 보벤이 편지를 바닥에 대뜸 동댕이쳤다. 그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이년은 계승권자가 아닌데 왜 멋대로 종장을 사칭하는 겁니까! 잘루크의 동생은......”
“지금 그까짓 게 문제야? 지금 코라산이 내전에 들어갔다니까!”
보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샤자한 공이 이 장손자의 멱살을 붙들며 씩씩거렸다.
“여기 와 있는 하크로딘 가 놈들이 지네 땅에 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샤르바누를 편드는 놈들이 철수하는데, 그 반대파를 지지하는 놈들이라고 여기에 조용히 붙어있을 것 같냐고?”
샤자한 공의 악문 이 사이로 씩씩대는 숨소리가 그대로 새어나왔다. 손자에게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호통을 친 샤자한 공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벌벌 떨고 있던 보벤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어떡해? 허, 궁금하긴 하구나? 별 수 없지. 샤르바누 그년한테 뇌물을 쳐 먹이든 나중에 종장으로 공인해 줄 것을 약속하든 일단 입을 틀어막아야지. 그년 보나마나 카렐 그놈하고 공인해 줄 것을 밀약했을 테니 우리도 일단 비슷한 조건을 제시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수밖에.”
“하지만......”
“지 아비 모가지를 뽑아 죽인 황제 밑에 있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년 감정이라도 자극하던가, 안되면 음모론을 갖다 붙여서 멍청한 평민놈들 여론이라도 선동하던가, 아무거나 다 해 봐야지 뭘 어쩌겠냐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막사 안을 서성거리던 샤자한 공은 손에 걸린 물병을 바닥에 힘껏 내던지고는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보벤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르바누 부인은 야심이 대단한데다가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자입니다. 그 정도 수법에 쉽사리 말려들지는 않을 겁니다.”
샤자한 공이 답답한 듯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놔두면 하크로딘 가마저 연합군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서지를 않았다.
나흘 전, 산악병연대가 전멸당한 처참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남부 특유의 홍수 같은 물량공세로 꿋꿋하게 다리를 걸며 전진해 온 헤즈 플라칼 장군은 어느새 7부 능선 부근에 있는 8번째 계곡까지 다다라 있었다. 약 60보(36m) 정도 폭의 계곡 너머로는 제법 가파른 토사면(土斜面)이 산맥 정상에 보이는 주류성을 향해 거의 직통으로 뚫려있었다.
“여기만 지나면 이젠 완전히 고속도로군.”
헤즈가 함께 선 사역병부대 장교에게 말을 건넸다. 한때 관목 숲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파른 토사면은 시계(視界) 확보를 위해서인지 적들이 나무들, 심지어 풀까지도 싹 다 밀어버린 탓에 붉은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여기만 통과하면 앞에 있는 계곡들은 폭이 좁아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장교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헤즈는 아직도 불안한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난번 서부 장갑보병들의 기습에 학을 뗀 그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근위대 가디언 50여명과, 200여기의 동부기병들을 둘러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해발고도 20스타디아(3,000m)가 가까워지면서 몇몇 약한 병사들이 고산병증세를 호소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난 기습사건 이후로는 다행히 별다르게 힘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들도 듬성듬성해져서, 이젠 적들이 대규모로 매복할만한 큰 숲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헤즈로서는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물론, 공사기간이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어진 것에 대한 제롬의 잔소리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확 트인 게 살 것 같군.”
헤즈가 심호흡을 깊게 들이키며 함께 온 릴라크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만들고 있는 8번 교량 바로 아래쪽의 완만한 사면에는 주류성 공격부대가 주둔할 제2숙영지 정지(整地)공사가 한참이었다.
“이거 산사태 나기 딱 좋은 곳이군요.”
함께 올라와 있던 릴라크가 계곡 건너 가파른 사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아. 엔지니어들이 그러는데 이 계곡 덕에 산사태가 여기까지는 넘어오지 않는댔어. 그러니까 캠프를 여기 세우지.”
“그래요?”
릴라크가 계곡 아래를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좁아진 강폭 때문인지, 물살이 거의 소용돌이치듯 빨리 흐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군요. 계곡이 이렇게 깊으니......”
“그건 그렇고, 오늘 밤이면 주류성 발밑에 닿겠는걸.”
고개를 끄덕인 릴라크가 뒤로 돌아서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허, 욱리하가 크기는 크군요. 여기서도 훤히 보이니. 저 큰 강을 어떻게 건넌담.”
“그런데, 북쪽에서 내려오는 마누엘 그놈 3군은 어떻대? 일정대로라면 어제 이암성에 도착했어야 되잖아? 왜 감감무소식이야?”
헤즈의 질문에 릴라크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웬걸요. 어제는 고사하고 한 2, 3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던데요? 제롬 녀석 그쪽 소식 들을 때마다 펄펄 뛰는 꼴이 볼만하던걸요.”
“푸훗, 마누엘에 케세크까지 천하에 꼴통 두 놈을 붙여놨으니 그러고도 남지. 그런 한심한 놈들한테 이암성 공격을 맡기다니 원.”
“그런데 혹시.......”
릴라크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응?”
“황상하고 황비하고 금실이 꽤 좋다면서요?”
“그렇다더군.”
헤즈가 주머니에서 쿠키 한 움큼을 꺼내 릴라크에게 건내주며 별 성의없이 대답했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릴라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듣자하니 황비가 낳은 대군을 대공주 자녀 중에 하나하고 혼인시켜서 장태자로 삼자는 말이 있다던데.”
“음, 그런 말이 있다더군. 제롬 녀석이 계속 그런 주장을 하고 있으니 우리 가문도 일단 지지하고는 있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조만간 가부가 확정될 것 같아.”
“그렇군요.”
릴라크가 말꼬리를 흐리며 쿠키를 오드득 씹었다.
그도 파티가 있던 그날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다. 다만 황비 구르베스가 불륜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제롬이 정말로 몹쓸 짓을 한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멀리 산자락 아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을 올라오는 주류성 공략군의 모습이 희미한 안개 너머 어렴풋이 보였다.
“이제 드디어 한바탕 제대로 벌어지겠군.”
냉소섞인 한마디를 내뱉은 헤즈는 멀리, 운무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주류성을 다시 올려보았다. 이제 오늘밤, 아니면 내일부터 이곳에서 양측의 첫 진검승부가 펼쳐질 터였다.
“으음?”
그는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비가 오려는 모양이군.”
이번 주류성 공략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남부 5제후 마자리크 이그나토 부인은 투구의 비버를 들어 올리며 잔뜩 짜증섞인 표정을 지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제법 맑았던 날씨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갑자기 그 얼굴을 돌변하고 있었다.
2차 혼란기까지도 참전했던 노련한 백전노장인 그는 이런 고지대의 비가 지금 같은 건기 끝머리에 흔히 볼 수 있는 저지대의 추적추적한 비와는 그 차원부터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부터 이 정도라면 제2캠프가 있는 7부 능선에서 더 강하게 몰아칠 돌풍은 생각조차 하기도 싫었다.
“썅, 며칠만 빨리 왔어도......”
마자리크 경은 회색빛 하늘을 올려보며 불만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건 남부연합군 중장보병 3, 4군단 3만6천과, 그리고 경보병 1만이었다. 그리고 공략군 부사령관을 맡은 보벤의 동부기병 5천까지 합치면 5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1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적의 주류성 수비군에 비하면 공성하는 입장에서 어마어마하게 압도적인 병력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북 양쪽을 깎아지른 절벽으로 보호받고 있는 주류성에서 실제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이 동측면 하나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많은 병력을 쏟아 붓는다고 딱히 나아질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할, 왜 하필 이런 일을......”
마자리크 경은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베흔에게 괜한 화살을 돌리며 연신 투덜거렸다. 원래 주류성 공성전은 공성전 경험이 전무한 제롬이 황도 공격을 미리 연습할 겸 직접 맡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서 확인한 주류성의 만만치 않은 입지와 비가 내릴 것이라는 달갑지 않은 예보를 접한 직후, 제롬은 난데없이 독감이 걸렸다며 그 지휘권을 마자리크에게 넘겨버렸다.
부교설치까지 지연되고, 날씨까지 이렇다면 제롬의 스케줄에 맞춰 주류성을 넘어뜨리는 것은 어차피 힘든 상황이었다. 그 빌어먹을 제롬, 아니 그에게 바람을 넣었을 베흔은 공략전의 야전사령관이라는 감투만을 휙 던져주고는 일정 지연의 모든 책임을 결국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속내임이 뻔했다.
게다가 이번 주류성 공략군 중장보병대의 절반 이상은 그의 가문에서 내놓은 이그나토 가 보병들이었다.
“팔자 한번 더럽군.”
마자리크 경이 스코프에 엉겨붙은 진흙을 털어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은 테나스 이그나토 태후의 여동생인 그는 애초부터 베흔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의 언니 테나스 태후, 그리고 오빠와 그 식솔들은 황실을 차지하려는 과욕을 부리다가 베흔과 의붓딸 세나우스 2세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5제후였던 아버지 역시 그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막내딸이었던 그는 얼떨결에 한 가문의 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도 그가 살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온유한 성격 탓이었다. 그의 그런 성격을 못마땅해 했던 테나스 태후는 남매, 친척들을 모두 불러들여 황실을 장악하던 과정에서도 이 막내동생만은 부르지 않았고, 그 덕에 그는 세나우스2세 황제의 무자비한 숙청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3군단은 왜 이리 못 쫓아와?”
마자리크 경이 뒤를 돌아보며 괜한 부장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앞서간 헤즈가 교량은 어찌저찌 연결했다지만 2캠프가 있는 7부 능선까지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만만하지를 않았다. 당초 주류성에서 사용하기 위해 근위대가 뚫어놓은 이 군용 도로는 대부분의 ‘군용’자가 들어가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편의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그저 차 한 대 굴러 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기어오를 정도의 거친 비포장 산길이었다.
게다가 성을 차지한 서부 사역병들은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해 놓은 건지, 몇 발짝 내디딜 때마다 발목 하나 빠질 만큼의 구덩이가 사방팔방에 널려있었고, 길가의 석축들은 모조리 헐어놓은 덕에 조금 약한 지반들은 산사태로 무너져 길을 막고 있었다.
앞서 지나간 헤즈의 선발대 노예들이 무너진 곳도 대강 수리하고 구덩이마다 흙을 쏟아부어 메워놓은 모양이었지만 잘 다져지지 않은 그 흙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그대로 진창으로 변해 안해놓으니만 못한 결과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산사태가 났던 곳이 워낙 많아 제대로 된 복구공사라기보다는 대강 흙과 바위만 치워놓은 정도였다.
어제 저녁부터 밤을 새서 이 산길을 행군해 올라온 주류성 공략군들은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듯 맥빠진 모습들이었지만 숙영지를 겨우 몇 걸음 앞두고 휴식을 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급품 차량 때문에 진행이 더디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길 자체도 험하고.......진창 때문에 차들도 제대로 진행을 못하고.”
“젠장.”
진창길을 허우적거리며 따라오고 있는 병사들을 돌아본 마자리크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빗물과 진흙을 온통 뒤집어쓴 채 무거운 군장까지 지고 있는 그들 보병들은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병들 역시 말에서 내려 도보로 걷고 있었지만 푹푹 빠지는 진창 속에서 끌고 가는 말을 제어하느라 쩔쩔 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령관인 마자리크 경 역시도 참모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말에서 내려 도보로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지경이었다.
“25스타디아(3.8km)만 더 올라가면 캠프에서 따뜻한 숙소와 저녁식사가 기다리니까 힘들 내라고 해. 일단 쉬는 게 최우선이다.”
“최고제후님께서 당장 오늘 자정에 1차 공격을 개시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함께 온 델루지 가 연락관이 대뜸 그에게 쏘아붙였다.
“저 파김치들을 데리고 어떻게 공성을 하라는 거야!”
발끈한 마자리크 경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지 그를 따라오던 보병들까지 고개를 번쩍 들고 이 제후를 올려보았다. 마자리크의 호통에도 연락관은 아랑곳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꾸했다.
“늦어도 내일까지 주류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번 비 때문에 욱리하 수위가 더 올라갈 겁니다. 그 전에 욱리하에 교량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저 꼴을 보라고, 최소한 몇 시간은 쉬게 해 주고 공격을 해야 할 것 아냐! 후발대까지 다 도착하면 그때서야 자정이 될둥말둥인데! 차라리 오늘 확실히 쉬고 나중에 하는 게 낫지!”
“군령은 군령입니다.”
“썅,”
델루지 가 연락관의 계속된 참견에 마자리크 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연락관의 말마따나, 무리가 따르더라도 당장 오늘 밤 공성을 시작하라는 제롬의 명령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원수 같은 시간이었다. 적들은 본격적인 우기, 그리고 욱리하의 수위가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면서 얄미우리만큼 철저하게 덫을 놓고 한 발 한 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도 멍청한 첫 공성전을 시작해야 할 마자리크는 자신만을 믿고 뒤를 따르는 저 병사들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