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6화 (405/1,132)

< -- 406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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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부터 내리던 비는 자정이 넘어간 심야의 흥안령 능선을 아직까지도 적시고 있었다. 해발 28스타디아가 넘는(4200m) 이 고산에서는 계속해서 내리는 비와 고산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면서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 못할 짙은 수증기가 사방을 덮고 있었다.

“저 새끼들 제정신인가.”

멀리 산사면 아래에서 진격해 올라오는 남부 보병대를 바라본 주류성 수비군 사령관 사르키스가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정말 성문 열고 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내주고 싶은 지경이군요.”

부사령관 베나지 나하스 중랑장의 농담에 수비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한바탕 큰 웃음이 터졌다.

낮 내내 비를 맞아 잔뜩 무거워진 중갑주를 입은 남부 보병들은 한번 밀면 도미노처럼 우루루 넘어갈 듯 탈진해버린 모습이었다. 게다가 나무와 풀이 말끔히 깎여나간 민둥산의 가파른 사면과, 미리 뿌려놓은 저지대의 누런 흙은 허우적거리며 올라오는 보병들의 풀린 다리를 미끄러뜨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그 탄탄하던 남부 중장보병대의 대오가 미끄러져 굴러 내려가는 병사 덕택에 줄줄이 무너지는 기막힌 광경도 종종 연출되었다.

성의 동쪽 사면 큰 누대에 선 사르키스는 성벽을 지키고 선 서부 병사들의 힘에 넘치는 모습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미 보름 가까이를 이곳에서 고산에 적응한 병사들의 얼굴에서는 붉고 건강한 혈색이 감돌았다. 적 공성부대가 올라온다는 소식에 초저녁부터 병사들에게 잠도 푹 재워주었고, 평소보다 훨씬 푸짐한 저녁식사와 사기를 돋우기 위한 술 반잔씩으로 배도 든든히 채워놓은 상태였다.

사르키스가 휘하 병사들을 바라보며 칼을 죽 뽑아들었다.

“이곳에 누가 있는지 저 오합지졸들에게 알려줘라!”

사르키스가 칼을 번쩍 치켜들며 수비병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허우적거리며 올라오는 지친 남부 병사들을 놀리듯 이곳의 서부 병사들이 목청을 있는 힘껏 울리며 그 서부인 특유의 괴성으로 이 고산의 고요한 밤시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1선의 장갑보병, 2선의 경보병에 이어 3선에 서 있던 3천여 동부 투창병들까지 서부의 기세에 질세라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제엔장, 망할 새끼, 제롬 그 개자식.”

마자리크는 사령관에 대한 욕을 끝도없이 곱씹었다.

일정에 쫓기는 제롬의 입장을 그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정신나간 명령의 저변에는 지난번 어처구니없이 빼앗긴 황성을 일초라도 빨리 되찾고 하루빨리 황제 대리인 노릇을 하고 싶어 안달 난 탓이 더 크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조급증 때문에 오늘밤 얼마나 많은 죄 없는 병사가 죽어나가야 할지도.

항상 물량공세를 앞세우던 남부의 공격치고는 오늘의 공성은 무언가 부족했다. 21대나 되는 공성탑 중 11대는 아직 이곳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고, 성에 접근할 때 적들의 원거리 공격을 1선에서 받아내 주어야 할 전차도 100대 중 50대밖에 올라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노예들 내보내!”

마자리크 경은 이런저런 분노를 악을 쓰는 고함으로 대신 내질렀다. 커다란 공구와 몇 개의 장비들을 짊어진 노예들이 칼을 든 기병들에 떠밀려 제일 앞에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공성장비가 전진할 길을 뚫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 끔찍한 임무가 바로 이들의 차지였다. 그리고 서부제후군 사역부대가 얼마나 장애물 설치에 능한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 얼굴에는 하나같이 지독한 공포가 어려 있었다.

“걸어가! 못 잡아내는 놈들은 발목을 동강내놓겠다!”

성벽 전면 3스타디아 정도까지 장비를 끌고 가던 동력차량들은 성의 방어장비 권역에 들어서면서 일제히 작동 불능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곳곳에 널린 구덩이와 함정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갈밭이어야 할 이 고산의 사면은 적들이 미리 저지대의 흙을 가져다 뿌려놓았는지 누런 흙과 자갈이 뒤엉켜 온통 진창이 져 있었다.

“가! 가란 말이다!”

기병들의 재촉에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앞장서 나가는 2천여 노예들 행렬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부비트랩에 걸려 발목이 잘려나간 채 울부짖는 노예들과, 함정에 빠져 갈가리 찢겨죽는 노예들까지, 비 내리는 주류성 동측 사면은 순식간에 끔찍한 학살의 구덩이로 변해갔다.

“공격!”

성벽 밑에 미리 대기하던 서부 경보병들은 이 불쌍한 표적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불덩이와 사방으로 못이 박힌 통나무, 바위들을 사정없이 굴려댔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거대한 불덩이는 쏟아지는 빗물에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며 남부 노예들과, 그 뒤를 따르는 남부 사역병들을 태우고 깔아뭉갰다. 이 공격들을 막아주어야 할 전차는 노예들까지 지키며 전진하기는 턱도 없이 적은 50대에 불과했고, 노예들은 스스로의 몸과 목숨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전진해! 저기 도착하면 끝난다! 알았나! 성벽 밑에 도착하면 끝난단 말이다!”

말에 탄 기병들이 칼과 채찍을 휘두르며 노예들을 밀어붙였다. 한편에서 동료가 타 죽어가는 와중에 다른 노예들은 뒤따르는 보병들의 진로를 가로막을지 모르는 장애물과 부비트랩, 함정들을 필사적으로 해체했다. 그리고 사역병들은 동부 기병들의 진로를 가로막을 대마 장애물들을 부수고. 쓰러뜨리며 함께 전진했다.

“얼마 안 남았다! 빨리 전진하란 말이다!”

성에 점점 가까워지는 만큼, 수백구의 노예들의 시체가 널린 무덤 또한 조금씩 넓어져갔다. 그리고 노예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3만6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이 그 육중한 대오를 갖추고 발소리를 맞춰 전진했다.

“계속 전진해! 멈추면 안 된다!”

중장보병대 선두에 직접 선 마자리크 경이 빗속에서 걸리적거리는 투구를 벗어던진 채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노예들의 무리가 성벽에 조금씩 가까워졌지만 그때까지도 성벽 밑에서 바위와 불덩이를 굴리던 서부 경보병들은 도망칠 생각도 않은 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성탑 전개하고! 보벤 경! 노예들이 물러나기 시작하면 성벽에 사격을 퍼붓도록!!”

마자리크 경이 측면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보벤 경의 동부기병대를 불러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보벤 경이 뒤에 집결한 휘하 동부기병들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다리까지 으스러졌던 보벤의 몸으로는 아직 전투를 지휘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떡해서든 이번에 ‘전공’이라는 것을 세워 가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조금은 억지를 부려 이곳까지 나온 참이었다. 그의 이런 욕심을 위해 동원된 건 5천의 동부 경기병이었다.

“뭐 별것 아니겠군.”

보벤이 주변을 둘러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에 함께 있던 부장은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꾹 다물었다.

적들이 나무를 모두 베어내면서 확 트인 이 산사면은 가파른 경사가 진 것만 뺀다면 경기병이 작전을 펼치기에 가히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미끄러워진 바닥과 군데군데 널린 진창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말 역시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저지대에서같이 잘 움직여줄지 확신이 없었다.

“대 보병 유효사거리인 1스타디아(150m) 거리에서 연대별로 각1조를 이루어 연속 사격한다! 알겠나!”

“예!”

5천의 경기병들이 비 내리는 심야의 산악을 뒤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지난해 플라칼 가의 군대가 샤레이의 베하라 요새 공격에서도 짭짤하게 써먹었던 경기병의 원거리 공격은 이번 공격에서 제롬과 샤자한 공이 나름대로 ‘비장의 수’라고 내놓은 것이었다. 거의 30여발씩의 투창을 퀴버에 가득 채운 동부 경기병들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돌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못해 보벤에게 다가온 부장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장군님, 여기는 가파른 비탈길이고 진창이 져서 평지만큼의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비도 오는 상황에서 1스타디아는 조준사격하기에 너무 멉니다. 어차피 놈들에게는 변변한 원거리공격수단이 없으니 0.7스타디아(95m) 이내로 근접 사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렇긴 하군.”

경험 많은 부장의 조언에 보벤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 밑에 있는 2천의 서부 경보병들은 도무지 제정신인지, 아직까지도 성 안으로 도망칠 생각도 않은 채 남부 노예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남부 사역병들은 이미 1스타디아 정도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고 남부 주력인 중장보병대는 2스타디아 정도의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저대로라면 서부 경보병들은 성벽 안으로 도망치기도 전에 남부 보병대에 먼저 짓밟혀죽을 판이었다.

“저 서부 광신도 놈들 죽으려고 환장했군, 공격 준비!”

보벤이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중장보병대 양측에 대기중이던 동부 경기병들이 큰 소리로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돌격! 1차 목표는 저 성벽 밑의 경보병들이다! 벌집을 만들어버려!”

보벤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5천여 동부 경기병들이 괴성을 올리며 성벽을 향해 첫 번째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마 장애물!”

2천여 경보병들과 함께 성벽 밑에 내려와 있던 베나지 나하스 중랑장이 돌격해오는 동부 경기병들의 모습에 손을 크게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당겨!”

그의 명령에 20명 정도씩 팀을 이룬 경보병들이 바닥에 있던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밧줄이 당겨지면서 질척질척한 흙 속에 파묻혀있던 무언가가 흙탕물을 떨어뜨리며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더러운 흙 속에 파묻혀있던 건 뾰족한 창이 수십 개씩 다발로 박힌 거대한 대마 장애물이었다.

“이런!”

창 무더기 위로 하마터면 날아가 꽂힐 뻔했던 보벤이 거의 비명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고삐를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장애물과 맞닥뜨린 수백의 운 없는 선봉대 기병들과 말들이 사방에서 피보라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갑이나 단단한 갑주를 입지 못한 경기병들은 스스로의 돌진해오던 속도와 힘에 밀려 그 무시무시한 창의 방벽에 그대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오던 경기병들 역시 움찔 하며 자리에 멈춰섰다.

“모두 올라간다!”

미리 세워두었던 큰 사각방패를 등에 짊어진 베나지가 성벽 위에서 내려준 케이블에 버클을 걸며 소리쳤다. 그리고 이런 기습적인 움직임에 잘 단련된 서부병사들답게, 성벽 밑의 2천여 경보병들 역시 등에 방패를 짊어지며 일제히 케이블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썅! 저놈들 다 쏴 죽이란 말이다!”

잠시 흐트러졌던 경기병들의 대오를 가까스로 수습한 보벤이 장애물을 뚫고 달려나가며 악을 썼다.

“다시 돌격해!”

장애물에 걸려 죽거나 쓰러져 신음하는 백 명이 넘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나머지 경기병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서부 경보병들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돌진했다. 등을 보인 채 주렁주렁 매달려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은 동부 경기병들에게는 마치 연습용의 큰 표적판처럼 보였다. 문제라면 하나같이 등에 큰 사각방패를 지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최대한 근접해 쏴 죽여! 썅! 0.5스타디아 정도면 저 정도 방패도 관통할 수 있다!”

잔뜩 흥분한 보벤은 거리를 그나마 더 좁힐 것을 명했다. 명령을 받은 경기병들이 일제히 투창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미친 듯 돌진해 들어가는 동부 경기병들은 놀라 흩어지는 남부 노예 따위는 아랑곳없이 푹푹 빠지는 진창 속을 악을 쓰며 돌진했다.

“발사!”

동부 억양의 이 함성을 먼저 지른 건 돌진하는 경기병들이 아닌, 주류성 성벽 위의 누군가였다. 바람 가르는 소리에 문득 위를 올려보았던 보벤은 하늘을 새카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무언가에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뭐야? 저건?”

“적 투창입니다!”

“벌써?”

이미 투창 공격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동부 기병들은 순간 사방으로 쫙 갈라졌지만 이 미끄러운 진창, 그것도 희박한 산소 속에서 그들의 기동력은 어지간한 중장기병보다도 떨어지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끄아악!”

잔뜩 둔해진 경기병들은 쏟아지는 투창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진흙구덩이에 나동그라졌다. 마갑이나 중장갑을 차려입지 못한 경기병들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은 공격에도 바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꼬꾸라지거나 부상을 입고 휘청거렸다.

“우리도 발사해!”

보벤이 뒤늦게 소리쳤지만 사방으로 흩어진 경기병 중 벽에 매달린 적 보병들을 향해 투창을 던질 수 있었던 기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황해하고 있는 경기병들의 머리 위로 또 한 무더기의 투창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공중에서 내리꽂혔다.

“뭐야! 무슨 보병이 투창을 이렇게 멀리까지 던져!”

아직 상황파악조차 하지 못한 보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휘하 기병들을 돌아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동부 투창병 3천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동맹군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보병’이라는 미끼를 던졌고, 보벤과 동부 경기병들이 이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었다.

“퇴각! 퇴각! 0.5스타디아 밖으로 물러나!”

계속해 쓰러지는 경기병들을 보다못한 보벤이 두 팔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서 거의 2,3초 간격으로 무시무시한 투창공격은 계속 쏟아졌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쏘고 있는 거야!”

방패에 박힌 짤막한 투창을 꺾어 내던지며 보벤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놈들이 그새 투창병을.......”

쓰러지는 동부 경기병들의 모습을 본 순간, 적의 계획을 바로 깨달은 마자리크 경은 순간 뒷골이 당길 듯 아찔해왔다. 나름대로 챙겨온 회심의 수가 적들의 느닷없는 장거리 사격에 무참하게 무너져버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보병들을 동원한 정면 돌격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보병 진격!”

경기병들의 돌격을 위해 잠시 멈춰있던 3만 6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이 굳건한 대오를 짜고 한발한발 전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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