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07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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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그새 투창병을.......”
쓰러지는 동부 경기병들의 모습을 본 순간, 적의 계획을 바로 깨달은 마자리크 경은 순간 뒷골이 당길 듯 아찔해왔다. 나름대로 챙겨온 회심의 수가 적들의 느닷없는 장거리 사격에 무참하게 무너져버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보병들을 동원한 정면 돌격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보병 진격!”
경기병들의 돌격을 위해 잠시 멈춰있던 3만 6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이 굳건한 대오를 짜고 한발한발 전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하급 지휘관들의 협박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마치 마지막 발악처럼 울려퍼졌다.
“전진! 전진! 한 놈이라도 처지면 전체가 흐트러진다! 맞춰서 나아가!”
큰 방패로 사방을 둘러친 남부 보병들이 박자에 맞춰 필사의 함성을 올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던져!”
수비병 사령관 사르키스의 손짓에 성벽 위 1선의 가디언들이 손에손에 쥐고 있던 묵직한 무언가를 적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공중을 붕 날아간 그 물체는 나무 하나 없는 경사진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남부 병사들의 발끝에 와 닿았다.
“이런 제기랄!”
몇몇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주류성의 동맹군 병사들이 내던진 건 지난 전투에서 전멸당한 산악연대 병사들의 잘린 머리였다.
“황상과 학장님의 이름으로 저 반역자들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줘라!”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서부 병사들의 고함소리는 힘겹게 산사면을 기어 올라가는 남부 보병들을 기죽이기에 충분했다. 성벽 위 누대에는 산악연대 지휘관들의 머리가 창끝에 보란 듯 꽂혀있었다.
“우라질,”
비틀거리는 말의 고삐를 꽉 붙들며 마자리크 경이 대뜸 욕을 내뱉었다. 그는 제롬에 대한 욕조차 맘껏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계속 같은 욕만 뱉었다.
이번 공격을 시작하면서 제롬은 참전한 제후들의 직속 근위병을 자신의 근위부대에 배속시켜버렸고, 대신 델루지 가 근위병들로 하여금 제후들의 곁을 지키게, 아니 감시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마자리크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저 30여명의 델루지 가 근위병들과 연락관 놈에게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걷는 게 차라리 낫군.”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쓰러질 뻔했던 말에서 결국 뛰어내려서는 지친 보병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가문을 대표하는 근사한 근위병은 아니어도 어쨌든 그의 가문 병사들이었다. 가문 참모들 역시 잔뜩 불만스런 얼굴로 마지못해 말에서 내려 제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말쑥한 차림새의 델루지 가 근위병들과 연락관은 이 더러운 진창에 발을 디디고 싶지는 않은지 말을 타고 조금 멀찍이서 뒤를 따랐다.
뒤를 돌아보고 있던 마자리크는 앞쪽에서 들려온 보병들의 비명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흐악!”
그는 눈앞으로 굴러오는 거대한 통나무를 몸을 날려 가까스로 피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적들이 성벽 위에서 굴리는 통나무들과 바위에 운 없는 보병들이 짓이겨지거나 튕겨 날아갔다. 병사들이 휩쓸리며 잠시나마 무너진 대오를 향해 수백발의 적 투창이 여지없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방패! 방패!”
마자리크를 덮쳤던 거대한 통나무 역시 순식간에 30여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짓뭉개고 멀어져갔다. 바로 뒤이어, 하늘을 뒤덮듯 시커먼 투창비가 놀라 흩어진 병사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으익!”
통나무를 피하느라 잠시 옆으로 넘어졌던 마자리크의 눈앞으로도 수십 발의 투창이 날아들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방패를 찾았지만 몇 발짝 떨어져있는 와중에 집을 여유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참모들도 통나무에 놀라 그새 모두 흩어져버린 터였다. 아찔해진 마자리크는 눈을 감고 말았다.
“제후님!”
장교들이 모두 겁먹고 도망가 버린 새, 주변에 있던 5명의 말단 보병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사령관의 앞에 방패의 벽을 쌓았다. 저 엄청난 높이에서 중력을 받아 펑펑 소리와 함께 내리꽂히는 수십 발의 투창에 방패를 쥔 보병들이 밀려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마자리크는 그새 더듬더듬 방패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아악!”
순간 방패 사이를 빠져나온 한 발의 투창이 막 일어서려는 마자리크 경의 이마와 눈을 스치고 바닥에 내리꽂혔다. 얼굴을 감싸 쥔 마자리크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후님이 여기 계시다! 빨리 모이란 말이야!”
마자리크를 지키던 보병들이 가까이 있는 보병대 동료들에게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흩어졌던 보병들이 쓰러진 제후의 모습에 깜짝 놀라 우루루 몰려들어 대오를 이루었다. 방패의 벽이 다시 탄탄해지면서 마치 폭풍 같던 집중사격도 잠시 주춤해졌다.
“괜찮으십니까!”
느릿느릿 다가와 마자리크에게 말을 건 사람은 조금 전,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도망간 참모 녀석이었다.
“이 개새끼! 꺼져!”
발끈한 마자리크는 이 속 보이는 참모의 머리통을 칼자루로 힘껏 후려쳤다.
“저 보병 다섯 명을 특진시켜 내 근위병으로 삼겠다! 썅! 참모새끼들 다 어디로 도망갔어!”
떨어졌던 방패를 집어들고 일단 일어선 마자리크 경은 갈가리 찢겨 피로 범벅이 된 한쪽 얼굴을 망토로 급히 가리며 병사들에게 악을 썼다.
“아무 투구나 가져와! 빨리! 아무거나!”
방금 얻어맞았던 참모가 그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뒹굴던 누군가의 더러운 투구 한 개를 재빨리 주워왔다. 마자리크는 모양 따위는 볼 것도 없이 허겁지겁 투구를 머리에 눌러썼다.
투창에 맞아 으깨어진 눈을 투구로 급히 가리며 그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사령관은 여기 있다! 나는 멀쩡하다! 그러니 계속 진격하란 말이다! 공성탑! 공성탑을 빨리 전진시켜!”
“공성탑 10대 중에 2대는 바닥이 미끄러워 전복되었습니다! 8대 뿐입니다!”
“알았으니까 8대라도 보내!”
마자리크 경이 계속 피가 흐르는 눈을 가리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힘껏 밀어! 멈추면 더 힘들다! 힘껏 밀어!”
구동장치를 떼어낸 8대의 공성탑이 방패로 몸을 가린 노예들과 사역병들에게 끌려 이 가파른 사면을 힘겹게 조금씩 올라갔다. 적의 통나무와 바위세례를 뚫고 힘겹게 전진한 남부보병대 선두는 성벽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주류성의 높이에 맞게 제작된 공성용 발판인 운제 20여 대 역시 조금씩 성벽에 가까워졌다.
“경기병 다시 돌격!”
잠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보벤의 동부 경기병들이 일단 안전한 자리가 확보되자 다시 성벽에 접근해 사격을 개시했다. 성벽 위에서 공격을 하던 주류성 수비군 중 수십이 사격의 첫 희생물이 되어 쓰러졌다.
성 위의 수비군과 성벽 아래 연합군의 사격이 공중에서 어지럽게 교차하는 와중에도 공성탑은 차근차근 성벽에 접근해갔다.
“1격!”
그 때, 성벽 위에서 들려온 쾅 하는 굉음에 남부 병사들이 일제히 위를 올려보았다. 거대한 투창 비슷한 물건이 한참 접근해 가는 공성탑을 향해 귀를 찢는 파열음을 내며 날아들었다.
“발리스타다!”
사람 두세 명 키에 달하는 그 거대한 괴물은 남부 공성장비의 천적으로 꼽히는 서부 사역병단의 ‘발리스타’이었다. 수십 개의 그 거대한 괴물 중 몇 개가 공성탑과 운제에 명중하면서 거의 폭음에 가까운 타격이 공기와 땅을 일순간 뒤흔들었다. 그리고 부서진 공성탑 부품과 운 없는 병사들이 파편이 되어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공성탑 중 2개가 중간이 주저앉으며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
“전진! 전진!”
부서진 운제와 공성탑의 파편, 동부 투창병들이 날리는 투창 세례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남부 보병대의 필사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적 공성탑이 부서진다! 발리스타 2격!”
사르키스가 칼을 앞으로 향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한 대당 거의 30명씩의 사역병이 달라붙어 움직이는 거대한 발리스타는 공성전에 능한 저들 남부제후군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무기였다. 넓적하고 큰 머리를 가진 거대한 투창 비슷한 물건은 공성탑에 충돌과 동시에 머리가 깨지면서 그 주변 일대를 파편으로 산산조각냈다. 물론 모든 지역의 군대들이 다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서부 사역병단에서 운용하는 발리스타의 정확도와 위력만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발사!”
그의 명령에 성벽 동측면을 따라 배치된 30여대의 발리스타에서 굉음과 함께 그 무지막지한 괴물이 공중으로 다시 솟구쳐 올랐다.
“공성탑 1개, 운제 2개 다시 무너집니다!”
스캐너로 앞을 살피던 부장이 큰 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사르키스로서는 실질적으로 접근해온 적의 공성탑이 겨우 8개 뿐이라는 것이 하늘의 도움이었다. 정찰병 보고로는 적의 공성탑이 적어도 20개 이상이라고 했지만, 보급의 문제로 그중 절반 정도는 아예 올라오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10대 중 2대는 산사면 아래에 전복되어 쓰러져 있었다.
“적 공성탑은 겨우 5개 남았다! 계속 날려! 가디언들은 적 공성탑과 운제 도착지점 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도록!”
또 한번 발사된 수십 발의 발리스타에 적 공성탑 중 한 개가 다시 박살나며 멈춰섰다. 그리고 성벽 위 1차 돌격에 부여되는 포상금을 노리고 저곳에 몸을 실었을 불운한 정예 용사들이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파편이 되어 공중으로 흩날렸다.
“첫 번째 공성탑 접근합니다!”
남쪽을 맡은 베나지의 고함소리에 사르키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혼란의 와중을 뚫고 결국 성벽까지 도착한 공성탑에서 황금빛 팔찌를 낀 근위대 가디언을 선두로 수십의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막아! 막아! 시간만 벌어!”
타원형 방패와 할버드를 쥔 서부 장갑보병들이 그 앞에 일제히 밀집대오를 만들며 적을 향해 무기를 뻗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예 보병들이라도 가디언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위협적인 양손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해오는 가디언들의 기세에 거의 10명 가까운 장갑보병들의 몸이 방패와 함께 두 동강나 바닥에 쓰러졌다. 성벽 위의 첫 번째 직접 교전이었다.
“여기!”
그들 장갑보병들이 목숨으로 1,2초간을 벌어주는 새 바람같이 뛰어든 동맹군 가디언이 그들 근위대 가디언들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계속 나가! 머뭇거리지 말고!”
가디언들끼리 싸움이 붙은 사이, 공성탑을 함께 타고 온 남부 보병들도 질세라 성벽 위로 쏟아져 나왔다. 일단 이 성벽 위에 교두보만 잡고 살아남는다면 평생을 먹고 살 거액의 연금이 그들에게 보장되어 있었다. 공성탑이 맞닿은 성벽 위는 순식간에 가디언과 서부 장갑보병, 남부 중장보병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의 난투극과 힘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올라가!”
공성탑의 돌격대에 서부 수비군이 혼란스러워진 그 짧은 순간은 밑에서 대기하는 남부 보병들에게는 성에 기어오를 절호의 기회였다. 수비병들의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 수백의 남부 보병들이 일부는 사다리로, 일부는 케이블을 걸고 일제히 성벽에 매달렸다.
“적들이 올라옵니다!”
적들이 새카맣게 매달린 성벽 밑을 내려다본 사르키스가 기겁을 했다.
“저 공성탑 맞춰! 큰 거 한 발만 더 맞으면 부서질 것 같다!”
사르키스가 누대 바로 밑에 있는 대형 발리스타 반장에게 고함을 바락바락 질렀다. 그의 명령에 바로 방향을 바꾼 발사대에서 어른 한 아름의 두께는 될 거대한 발리스타가 귀청을 찢는 쾅 소리로 성 전체를 뒤흔들며 비가 쏟아지는 하늘로 날카롭게 솟구쳤다. 예리한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그 괴물은 적들이 막 걸어놓은 공성탑의 지붕을 꿰뚫고 그 어마어마한 무게의 힘으로 바닥까지도 부수며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피해! 피해!”
성벽 밑에서 올라가려 대기중이던 남부 보병들이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거대한 발리스타에 위아래로 관통당한 공성탑이 세로로 반토막이 나면서 그 한쪽이 밑에 있던 남부 보병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수십의 보병들이 파편에 깔리면서 성벽 밑은 일순간 아비규환에 빠져들었다.
“운제 걸어! 계속 올라가란 말이다! 빨리! 빨리! 우리 발리스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부상을 입은 몸을 무릅쓰고 보병대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던 마자리크는 거의 천둥치듯 들려오는 붕괴음에 고개를 휙 돌렸다.
“맙소사.”
기껏 건 공성탑이 또다시 무너지는 광경에 그의 다리가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저 끔찍한 광경에도 무조건 진격령을 내려야 하는 마자리크의 눈시울이 유난히 축축했다. 성벽 밑에서, 성벽 위에서 시체가 되어 있는 병사들의 대부분은 그가 고향인 일리안에서 데려온 이그나토 가의 자식 같은 병사들이었다.
그는 더 이상의 희생이 무의미하다며 제롬에게 몇 번이나 철수를 요청했지만 제롬의 대답은 간단했다. ‘보병들이 절반 이상 남아있다면 거기에서 내려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2차 공격이 있어야 한다면 그 때는 내가 지휘할 테니’라는 이유가 짤막하게 붙어있었다.
결국 그의 병사들은 제롬의 성공을 위해 적들을 하나라도 더 소진시켜야 하는 희생물이었다.
“개새끼, 씨발 대가리를 짓뭉개 죽일 놈!”
빗속에서 울부짖는 마자리크 경의 외침은 부하들에게는 마치 적장을 향하는 것으로 들릴 터였다.
안구가 으깨어진 오른쪽 눈에서 계속 쏟아지는 피는 투구 속을 흘러 턱을 타고 똑똑 떨어졌다. 하지만 그 고통이 아무리 격렬하다 해도 눈앞에서 의미 없이 죽어가는 병사들을 이렇게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그의 가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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