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08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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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 어렵게 걸린 십여 대의 발판을 타고 견고한 대오를 이룬 남부 보병 정예병들이 큰 함성과 함께 빗속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날아온 또 한 대의 발리스타에 발판이 무너져 내리면서 위에 있던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바닥으로 우루루 굴러 떨어졌다.
“발사!”
서부만큼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위력적인 남부의 발리스타 역시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주류성 위의 누대 몇 개를 덮쳐 산산조각으로 흩어놓았다.
“성벽 위만 쏘지 말고 그 후방에 있는 서부 놈들의 발리스타 발사대를 겨누란 말이다!”
기껏 도착한 남부 발리스타들이 보병대 후방의 안전한 위치에 방열하는 모습에 발끈한 마자리크 경이 발리스타 부대로 직접 달려가 악을 썼다. 진창에 빠진 발리스타를 끌고 오느라 발리스타병들도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방의 다른 보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방에서 붕붕 날아들고 있는 서부의 발리스타에 기겁을 한 발리스타 부대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서부 놈들의 발리스타가 우리보다 사정거리도 훨씬 길고 정확합니다. 더 접근하다가는 우리가 먼저 당합니다.”
“놈들 지금 표적은 우리 공성탑이니까 여기 있지 말고 당장 전진하란 말이다! 당장!”
“후, 적장이지만 정말 존경스러운걸.”
마자리크 경이 있는 적 사령부 쪽을 망원경으로 살피던 사르키스가 혀를 내둘렀다. 진흙투성이가 된 채 보병들과 뒤엉켜 함께 명령을 내리고 있는 그 기개는 귀족의식에 사로잡힌 보통의 남부 지휘관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진흙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발리스타 발사대에 함께 달라붙은 그는 사역병들을 악을 쓰고 독려하며 발사대를 진창 밖으로 밀어 올렸다. 사령관인 그의 독려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지쳐 보이던 남부 보병들의 기세는 생각처럼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사르키스는 성벽을 향해 전진해 들어오고 있는 남부의 발리스타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소형 발리스타 15대는 남부의 발리스타 발사대를 조준한다! 적 공성탑은 4개밖에 안 남았으니 대형 5대는 적 공성탑을! 중형 8대는 적 운제를 겨냥해!”
“알겠습니다!”
사역병부대 지휘관의 힘있는 대답과 동시에 30여발의 발리스타가 굉음으로 빗속을 뒤흔들며 다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적에게 마지막 남은 3개의 공성탑이 굉음을 울리며 동시에 성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 중 한대는 사르키스가 있는 지휘 누대 바로 앞이었다.
“발사!”
누대 바로 밑에서 대기하던 발사대에서 기다렸다는 듯 발사된 대형 발리스타가 그대로 관통하면서 미처 병사들을 뱉어내지도 못한 공성탑 한쪽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그냥 나가!”
절반쯤 부서진 공성탑 안에서 십여명의 가디언들과 헤아릴 수 없는 보병들이 발리스타 파편에 이미 죽은 동료의 시체를 짓밟으며 우루루 물려나왔다. 방패를 앞세운 서부 장갑보병들이 악을 쓰고 그들을 막았지만 그 일대 사방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면서 수비군 지휘부에도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양쪽에서 발사된 두 발의 발리스타에 또다시 관통당했지만 적군에서도 가장 거대한 이 공성탑은 쉽사리 무너지지를 않았다.
“씨발, 망할 남부 놈들!”
그 사이 사정거리 내로 접근한 남부의 발리스타 발사대 역시 근접 위치에서 방열하고 있었다. 서부가 발사한 수십 발의 소형 발리스타가 그곳에 명중했지만 40여대나 되는 남부의 발리스타 발사대 중 적어도 30대 이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놈만 무너뜨려! 그러면 적들은 물러난다! 이 공성탑만 무너뜨려!”
나머지 2개의 공성탑에서 몰려나오는 적들은 베나지의 지휘 하에 그럭저럭 제압이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사르키스의 바로 앞에 충돌한 가장 큰 공성탑이었다. 그가 직접 칼을 뽑아들고 그 난투극에 뛰쳐들었다.
“이놈만 막으면 끝난단 말이다!”
두 발, 세 발의 대형 발리스타에 뒤이어 누대 옆에 설치되어있던 크레인까지 공성탑에 충돌하면서 이 거대한 공성탑도 조금씩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쏟아져 나온 적병들은 이미 백 명이 넘었다. 1선의 보병들이 이곳에 휩쓸린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은 성벽 밑의 남부병사들이 성벽에 다시 사다리를 걸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투창병은 1선으로 나서서 벽에 붙은 놈들을 떨어뜨려!”
3선에서 위협사격만 하고 있던 동부 투창병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고는 사다리로 기어 올라오는 남부 보병들을 쏘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꺼지란 말이다!”
남부 보병을 힘껏 걷어차 성벽 밑으로 떨어뜨리며 사르키스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성벽 위에 1차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공성탑의 남부보병들과 방어하는 서부 장갑보병들과의 처절한 난투극은 사령관 사르키스와 그를 따르는 근위병들까지 몰려들면서 조금씩 서부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온다!”
몇몇 남부 병사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공중에서 다시 내리꽂힌 발리스타에 남부의 가장 큰 공성탑마저 결국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성벽 위에서 사투를 벌이던 남부 병사들의 운명은 아군과의 유일한 통로가 끊기면서 이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의 공성탑이 모두 무너진 것을 확인한 사르키스가 다시 누대 위에 뛰쳐오르며 외쳤다.
“중형과 대형 발리스타는 적 보병을 향해 발사해라! 투창병은 발리스타에 무너진 적 진형을 집중공격해! 장갑보병은 운제로 올라오는 적들을 막고 경보병은 성벽에 매달린 적들을 떨어뜨린다! 빨리빨리!”
명령을 받은 사역병들은 발사대에 이번엔 다른 종류의 발리스타를 끼워넣었다. 관통력을 위해 뾰죽하게 만들었던 공성장비 파괴용이 아닌, 마치 귀상어의 머리 같은 넓적한 칼날을 붙인 이 거대한 발리스타는 적 장비가 아닌, 밀집대형을 짜고 전투를 벌이는 남부보병들을 노린 것이었다.
“발사!”
성벽 위에서 날아오른 그 ㅜ자의 그 특이한 형상에 경험 많은 남부 보병들의 얼굴에 지독한 공포가 스쳤다. 저 무서운 흉기를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움직인다는 건 지금의 견고한 이 진형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흩어진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적들의 투창을 그대로 받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방패를 들고 자리를 지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하급지휘관들도 저 흉기가 방패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쉿 소리와 함께 날아든 열 개가 넘는 거대한 괴물이 남부보병대의 견고한 팔랑크스 대형을 비웃듯 공중에서 내리꽂혔다. 운 없이 그 괴물의 표적이 된 십여 개의 방진 한중간에서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남부보병들의 경악하는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중력을 타고 떨어져 내린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자리를 잘못 잡은’ 보병들 수십이 그 방패, 갑주와 함께 몸통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면서 그 일대에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움직이지 마라! 방패로 구멍 난 곳을 매워!”
지휘관들의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허망하게 메아리쳤지만 공포에 휩싸여 가는 그 분위기까지 붙들 수는 없었다. 겁먹은 신참 보병들이 대오에서 도망치다가 고참병들이나 지휘관에게 사살당하는 광경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방진이 무너진 곳으로 기다렸다는 듯 수백발의 투창이 비처럼 쏟아졌다.
기진맥진해있던 남부 병사들을 지금껏 버티어주던 마지막 의지까지도 공성탑과 함께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공성 장비 없이 무작정 성벽을 기어오르는 건 누가보기에도 멍청한 바보짓이었다.
“제기랄, 안되겠다. 퇴각해. 내가 모두 책임진다.”
보다 못한 마자리크가 옆에 있는 델루지 가 연락관을 거칠게 떠밀며 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델루지 가 연락관이 대뜸 짜증스런 표정으로 다시 끼어들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퇴각하지 말라고......”
“씨발! 한 놈 욕심 때문에 보병 3만이 다 죽는 꼴을 봐야겠냐! 네놈은 눈깔도 안 달렸냐! 저 흐느적거리는 병사들 꼴하고 시체들하고 부서진 공성탑이 안보이냐! 네가 보긴 지금 3만을 다 쏟아 붓는다고 이길 것 같냐! 앙!”
“허나 명령이......”
다시 뭐라 말하려는 연락관의 턱이 마자리크 경의 일격에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의 분노섞인 일격에 턱을 얻어맞고 주저앉은 연락관이 이 무엄한 5제후를 멍한 얼굴로 올려보았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경께선 지금 무장 신분입니다.......감히 최고제후 각하의 명을 어기시고 연락관인 저를 폭행하다니.......명백한 반란 행위이므로 군법에 따라......”
“닥쳐!”
마자리크는 기수에게서 직접 깃발을 빼앗아들고 크게 흔들며 소리를 내질렀다.
“퇴각이다! 동부 경기병들과 경보병들이 후방을 엄호하고 1선의 중장보병부터 퇴각해! 부상자를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퇴각해라!”
이제나 저제나 퇴각령만을 기다리던 남부보병대 지휘관들이 일제히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자리를 지키던 보병들 역시 진창진 산사면을 타고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사르키스가 성 안쪽에 예비대로 대기 중이던 부대에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장갑보병 2천과 경보병 2천은 성문을 열고 적을 뒤쫓는다! 성문을 열 준비를 해!”
누대에서 뛰어내려온 사르키스가 미리 대기시켜 둔 말에 뛰어오르며 깃발을 치켜들었다. 견고하게 닫혀있던 성문이 물러나는 적들의 등 뒤를 향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진격!”
앞장서는 사르키스를 따라 장갑보병들과 투창병들이 우루루 쏟아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순간만을 대비해 산사면 능선에 매복해 대기중이던 서부기병 1천여기도 동시에 양쪽에서 적들을 조여가기 시작했다.
“우리 기병은 후미의 적 경기병을 잡아라! 놈들은 퇴각 후미를 엄호해야 하니 도망칠 곳도 없다! 우리 기병들이 적 경기병들을 붙잡아놓으면 장갑보병대가 적 경보병들을 친다! 적들이 반격할지 모르니 욕심을 내지 말고 절대 흩어지지 마라!”
서부 중장기병에 합류한 사르키스가 적 후미를 엄호하는 동부 경기병들에게 빗속을 가르며 돌진해 들어갔다.
푹푹 빠지는 진창에서 이쪽의 서부 중장기병 역시 움직임이 둔했지만 굼뜨기는 적 역시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남부 중장보병 후미를 엄호해야 하는 경기병들로서는 그들 특유의 ‘치고 빠지기’를 할 여유조차 없었고, 말과 사람 모두가 지쳐 있었다. 경기병들이 날린 집중사격에 백여명 가까운 기병들이 말에서 나동그라졌지만 돌격을 멈추기는 역부족이었다.
“다 죽여!”
사르키스가 겨드랑이에 창을 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쐐기꼴로 돌진하는 서부 중장기병진형의 정면에서 우레 같은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두 번의 투창공격만을 날리고 바로 중장기병들의 매서운 정면충돌을 받아낸 동부 경기병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5천여의 서부보병대 역시 도망치는 남부 후미의 경보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 뭐냐고!”
퇴각하는 남부 중장보병대 본대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마자리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지금껏 공격군을 이끈 것도 오직 정신력 하나에 기댄 것이었다.
“저걸 다 누가 책임지냐고......”
한쪽밖에 안 남은 그의 눈동자 위로 후미에서 죽어가는 부하들의 처참한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눈과 찢겨진 얼굴에서 끝도 없이 흘러내린 피로 그의 흉갑은 이미 온통 붉어져 있었다.
“제후님, 정신 차리십시오.”
기진해 휘청거리는 그를 곁에서 지키던 근위보병들이 급히 부축해 주었다. 근위병의 어깨에 기대 가까스로 눈을 부릅뜬 그가 부장에게 힘겹게 말을 이었다.
“최대한 빨리 제2캠프까지 퇴각해, 중장보병 3군단이 외곽을 지킨다. 놈들이 어디까지 쫓아올지 모르니 캠프에 연락해서 동부 중장기병들을 미리 내보내 둬, 그리고......”
참모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던 마자리크 경은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우렁찬 승리의 함성에 휩싸인 주류성을 멍하니 올려보며 그는 이곳에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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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 전투씬은 2부의 첫 공성전인만큼 유달리 길었습니다. 결정적인 씬(?)을 제외하면 앞으로 이렇게 긴 단일 전투씬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아참, 뷰어 화면 위쪽에 '전체창으로 보기' 기능이 생겼군요. 작은 뷰어때문에 마음에 안 들어하시던 분께서는 택하시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