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09화 (408/1,132)

< -- 409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예폭동을 진압해야 할 서부최고제후가가 정작 내분과 쿠데타로 저희들끼리 싸우고 있을 그 무렵, 제국민들 그 누구도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외진 황제령’, 수베르 1번 행성에서는 아직 바깥에 전혀 드러나지 않은, 조용한 변혁이 조금씩 싹터가고 있었다.

“뒈져도 폭도나 한 놈 잡고 뒈질 것이지.”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이는 건장한 남자의 손에는 이미 피로 물든 작은 손도끼가 쥐여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마치 경기 걸린 사람 마냥 떨고 있는 불쌍한 희생물이 손목이 잘린 채 진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묻어버려.”

냉랭하게 중얼거린 그 남자는 피 묻은 손도끼를 흙바닥에 대강 털어내며 뒤로 휙 돌아섰다. 명령을 받은 노예들이 이 불쌍한 남자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흙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대장님, 그, 그냥 노예로 살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흙에 파묻혀가는 그 남자는 잘린 손목의 그 끔찍한 고통과, 생매장당하는 무서운 공포 속에서 필사적으로 호소했지만 그 잔혹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멀어져갔다.

죽어가는 부하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따위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무표정하게 언덕에서 내려온 그 남자, 투모카프 자이센은 언덕 아래 서 있던 다섯 명의 건장한 노예 앞에 멈춰섰다.

“저 놈을 잡은 게 네놈들이냐?”

“예. 10명이 집단 탈영하던 걸 저희 분대에서 잡았습니다. 5명은 죽었고 저희만 남았습니다.”

분대장을 상징하는 노란 띠를 팔에 두른 남자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투모카프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좋아. 죽은 놈들은 노예명부에서 바로 지워질 거고, 그 가족들도 함께 면천된다. 너희들도 작전 종료 후에 같은 혜택을 받을 거다. 공훈을 세운 너희에겐 황실에서 정착비 1,000골드씩이 별도로 주어질 거다.”

“감사합니다!”

기쁨에 넘치는 그들의 표정에는 관심도 없는 듯, 투모카프는 무표정하게 돌아서서 자기 막사로 향했다.

황실에도, 제국의 그 어떤 기관에도 공식적으로 등재되지 않은 노예부대 ‘카마크 군단’에 소속된 1만 명의 이 거친 노예들에게는 듣기좋은 전우애, 명예, 양심 따위의 단어는 애당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부대, 아니 살인집단은 ‘면천, 그리고 돈’과 모든 것이 기묘하게 얽힌 약육강식의 신디케이트였다. 이들에게 저런 탈영병은 적병과 마찬가지로 붙잡기만 하면 한몫 건질 수 있는 복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 아니 무법지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이들의 병영에서는 매번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군단장인 투모카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물론 그도 왜 매일 밤 한두 명씩이 시체로 발견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저희들끼리 싸워 지휘자를 뽑았고, 약한 지휘자는 죽음을 당하거나 다시 말단으로 추락했다. 힘이 없는 자는 복종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힘 있는 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조금씩 미쳐갔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약육강식 속에서 그들 사이에서도 묵시의 룰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이 신디케이트의 정점에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무장한 절대강자, 투모카프 자이센이 있었다.

“허, 정말 멋지군.”

생매장 광경을 구경하며 키득거리고 박수를 치는 건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 베흔이었다.

“근위대에서도 저럴 수 있으면 딱 좋으련만. 그놈의 군법이 뭔지.”

“들고 온 가방이 두툼한 걸 보니 뭐 괜찮은 소식이 있나보군요.”

아무런 톤 없이 중얼거리는 이 남자의 검은빛 눈동자, 메마른 표정에서는 이미 감정 같은 것은 완전히 거세되어 있었다.

“눈치 하나는.”

투모카프와 함께 막사에 들어선 베흔은 그의 말마따나 꽤나 두툼한 가방에서 몇 꾸러미의 서류들을 꺼내 그의 앞에 내놓았다.

“서부 놈들이 빌빌거리고 있으니 이제 자네가 멋지게 등장할 때가 아닌가.”

“작전지역은 어디요?”

마치 기계로 가공한 것처럼 높낮이가 전혀 없는 어딘지 거슬리는 목소리에 베흔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테나토. 적도 건조지역 리블로스 시. 첩보에 따르자면 8천명쯤 있어. 7, 9, 10연대 놈들이야. 곧 수송선이 올 테니 준비해 둬.”

“포로 따위는 내 취미가 아니니 다 죽이겠소.”

“맘대로.”

베흔이 킬킬거리고 웃음을 지었다. 볼일을 끝낸 베흔이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자 투모카프가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죽 둘러보았다. 매번 평복만 입고 다니는 그답지 않게 오늘은 제대로 다려 입은 근위대 예복 차림이었다.

“어디 좋은 데라도 가시오?”

“좋은 데라.......뭐, 날 원수 취급하는 집안 결혼식이기는 하지만 뭐 특별히 나쁠 건 없지.”

투모카프에게 마치 친구처럼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베흔은 셔틀을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져갔다. 그가 남기고 간 서류들을 대강 훑어본 투모카프는 군단장 막사 한구석에 있는 작은 비상벨을 누르고 확성기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첫 출동이다. 모두 준비해라.”

서부 테나토에 주둔하던 반란군 지휘부는 서부의 어처구니없는 내분 소식 덕택에 잔뜩 들떠있었다. 진압군 사령관 칼림 플레렌은 최고제후가 되겠다는 욕심에 진압군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버렸고, 가버린 상황이었고, 이곳 주인인 발 가 역시 가문 피를 받은 네페티 공의 실각소식에 진압작전마저도 포기한 채 온통 아켐으로 몰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 덕에 어부지리를 챙긴 반란군들은 내친 김에 아예 테나토 전체를 삼켜버릴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던 차였다.

그들이 은거해 게릴라전을 펼치던 산악에서 빠져나와 테나토 최대의 도시인 리블로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것도 정규군들이 다 빠져나갔다는 나름대로의 자신감 덕택이었다.

훈련도나, 무장, 조직력에서 정규군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반란군으로서는 이렇게 ‘회전’을 감행하는 것 자체가 사실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계급제 철폐’라는 고상한 정치적 목적에 1차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사실상 많지 않은 반란 수뇌부뿐이었다. 대부분이 극빈층이나 범죄자 출신인 말단 병사들의 대부분은 이 기회에 제대로 된 도시 하나를 차지해 맘껏 약탈이라도 해 보자며 계속 수뇌부를 괴롭히고 있었다.

계속 ‘한 건’만을 요구하는 이 답답한 폭도들을 일단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반란군 수뇌부는 지난번 플레렌 가 기습에 이어 이번에도 큰 건을 하나 챙겨주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규모 회전을 감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악분지에 위치한 리블로스 시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진격하던 그들 반란군들을 막아선 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낯선 무장병력이었다. 그다지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경갑주를 차려입은 그들은 도끼에 철퇴, 칼에 갖은 잡다한 무기들과, 각자 소속된 부대, 아니 신디케이트를 상징하는 유치한 그림을 대강 그려놓은 방패로 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각자의 지휘자---거의 저희들끼리의 싸움을 통해 선발된---별로 모여선 그들의 괴상망측한 대오는 언뜻 보기에도 제대로 된 정규군의 모습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반란군들이 처음에는 그들을 아켐에서 온 지원군으로 착각해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시 진입로 산길을 넘어 맹렬히 진군하던 그들은 이 정체불명의 상대에 공격을 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조차 잠시 망설일 지경이었다.

“한 놈 죽일 때마다 100골드씩이다. 이제 슬슬 저축할 시간이다. 각 신디케이트별로 잘라온 귀의 갯수만큼 살아남은 병사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반복하지만,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

투모카프의 심복들로 구성된 각 대대 지휘관들의 목소리에 그들 ‘카마크 군단’ 병사들이 이를 갈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공격!”

별다른 경고도, 전투 전 흔하게 오가는 기세싸움 따위도 전혀 없었다. 돈과, 신분에 눈먼 이들 노예병들에게 반란군들의 목숨은 그 머릿수에 따라 걸린 돈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썅! 다 죽여!”

반란군들은 적들이 도대체 누군지,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공격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에 핏발을 세우고 몰려드는 그들이 어떤 집단 광기에 빠진 미친놈들이라는 것이 그들이 알 수 있던 전부였다.

지금껏 민간인을 때려잡고 약탈이나 해대던 것이 고작이고 제대로 된 ‘전투경험’이라는 것은 전무한 그 ‘폭도’들은 그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조차 포기한 채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흩어진 폭도들 역시 주변에서 전투를 감시할 명령을 받고 도착해있던 황제의 직속 기병 2백의 신나는 사냥감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도망가는 놈들 다 잡아! 썅! 놓치지 말란 말이다! 다른 놈이 잡잖아!”

한 손에 단검을 쥔 각 신디케이트 지휘자들이 부하들이 쓰러뜨린 시체에서 귀를 베어내 자루에 담으며 악을 썼다. 이들에게 이번 싸움은 ‘전투’가 아닌, 돈벌이를 위한 인간사냥일 뿐이었다. 군기 따위는 전무한 이들에게 싸움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한쪽에는 무려 8천명이나 되는 폭도들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말에 올라 무표정하게 구경하고 있는 투모카프 자이센이 있었다.

“황상께서 이 광경을 보셔야 되는데.”

시체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부하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투모카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런 약육강식의 조직에서 벌어지는 저런 싸움에 그가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힘없는 신디케이트는 더 힘세고 악랄한 조직에 굴복할 테고 그것이 이 ‘카마크 군단’의 룰이었다. 이번에 귀를 많이 베어내 큰돈을 번 조직에는 다른 조직을 이탈한 놈들이 흘러들 테고, 그 조직은 더 크고 강한 조직이 될 터였다. 그것이 그가 아랫사람들을 독려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저런 편법을 생각해낸 야비한 자들에 의해 이 조직도 갈수록 썩어가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오래 존속할 조직도 아니기에.

리블로스로 의기양양하게 진격하던 8천의 폭도들은 반나절의 학살극 끝에 몇 운 좋은 도망자들만 제외하고 깡그리 학살되고 말았다. 먼 훗날 그의 손자가 그러하듯, 포로 따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 학살부대 지휘관 ‘블러드’ 투모카프는 그 첫 번째 악명을 제국 내에 날릴 수 있었다.

서부에서 투모카프가 폭도들을 때려잡고 있을 그 시각, 코윈의 카파키 종가 앞마당에서는 제국의 웬만한 귀빈들이 다 모인 가운데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오르마즈가 아닌, 그 아버지 투르케스크 공이었다.

첫 부인 아지드 레즐린의 죽음 이후 100년이 넘도록 혼자 살아온 투르케스크였지만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한 가문의 종장이며 북부 최고제후가 된 상황에서 계속 독신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제국 각지에서 모인 각 가문 축하사절들과 카파키 가의 종원 수백이 모인 가운데 혼례식은 그 격에 맞춰 누구보다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특히나 오랜 기간 홀로 지내온 아버지의 혼례에 그 자녀들의 기쁨도 이루 말할 바가 없었다.

“배례!”

집전을 맡은 남극성당 대제학 란조 경의 목소리에 탁자를 두고 마주선 투르케스크와 루다베 노에누스가 각각 서로를 향해 깊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이곳을 찾은 천여 명의 하객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부부가 되었음을 알렸다.

“나이도 그렇고.......솔직히 좀 안 어울리지 않아?”

다른 하객들과 함께 혼례를 지켜보던 베흔이 함께 온 쿠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북부 4제후 노에누스 가 출신의 루다베 부인은 이미 200세에 가까운 남편 투르케스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막내딸 세네피스보다도 어린 140살에 불과했다. 그리고 험상궂은 인상의 남편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자상한 미모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저 꽉꽉 막힌 독불장군하고 한 이불 속에서 살려면 앞으로 고생 꽤나 할 거야. 쯔쯧.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로 저 녀석에 비하면 오르마즈가......”

말을 미처 다 끝맺지 않은 베흔이 카파키 가 사람들을 다시 빙 둘러보았다.

“오르마즈 그놈은 어디 갔어?”

아버지의 혼례에 당연히 가족대표로 참석했어야 할 적장자 오르마즈가 무슨 일인지 보이지를 않았다. 함께 있던 북부 파견군 사령관이 베흔의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사고로 다쳐서 누워있답니다.”

“무슨 사고?”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대사관에서 있었던 진압작전 때 다쳐서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설마 투르케스크 저놈이 지 자식을 죽이려 들지는 않았을 테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흔은 가족대표로 대신 나와 있는 일라드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어딘가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목이 부러졌을 때 대는 큼직한 프레임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1명이 부족한데?”

“으음.......막내딸 세네피스도 없군요.”

파견군 사령관이 의아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지 아버지 혼례에도 못나오다니 너무했군.”

“소문에 듣자하니까 저 여자 때문이라고도 하더군요.”

파견군 사령관의 귀엣말에 두 눈이 번쩍 뜨인 베흔이 그에게 귀를 바싹 가져갔다.

“무슨 소리냐? 여자 때문이라니?”

“소문에 원래 노에누스 가에서 원했던 건 투르케스크 저놈이 아니고 오르마즈였다고 말입니다. 오르마즈 놈이 네페티 공하고 깨지면서 노에누스 가에서 얼씨구나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문병 핑계삼아 저 여자를 오르마즈한테 보냈는데 투르케스크 저놈이 문병왔던 저 여자를 중간에서 확 채 버렸다는 겁니다. 노에누스 가도 최고제후가 내놓으라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내줄 수밖에 없었겠죠.”

“뭐? 그럼, 지 자식의 여자를 훔쳤다는 거야?”

“뭐 그런 셈이죠.”

파견군 사령관의 대답에 베흔이 껄껄대며 실소를 터뜨렸다. 저 두 부녀 사이의 갈등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저어, 오르마즈 경의 동생분 되시죠?”

혼례를 끝내고 자리를 물러나려던 일라드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웬 남자를 대뜸 곱지않은 눈길로 째려보았다. 5척 10촌(174cm)정도나 될까 싶은 자그만 체구에 평평하고 둥그스름한 얼굴로 보아 틀림없는 동부 사람이었다. 무난한 인상 때문인지 어딘지 만만해 보이는 그에게 일라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데요?”

“동부 2제후 트라티누스 가에서 온 상급귀족 마에두라고 합니다. 지난 전쟁에서 오르마즈 카파키 각하의 부관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오르마즈’의 이야기에 일라드가 대뜸 짜증을 부렸다.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에두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기, 각하께서 다치셨다는 말을 들어서.......종장이신 누님 명을 받아 그분 문병을 왔습니다. 하지만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어서......”

“본채 3층에 가서 하인들에게 물어보시죠,”

일라드의 성의 없는 대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마에두가 입가 가득 미소를 지었다.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다른 거 하고 있어.”

뒤따라온 하인에게서 큰 선물상자를 빼앗듯 받아든 마에두는 일라드에게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본채에 뛰어들었다.

사실 오르마즈를 탐내고 있는 건 이미 글러버린 플레렌 가나, 얼떨결에 딸을 빼앗긴 노에누스 가 뿐만은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도 네페티 공과 파혼한 오르마즈에게 눈독들이고 있는 가문은 10개가 넘었다.

마에두의 누나인 종장 마굴루 부인이 남동생에게 느닷없이 오르마즈 이야기를 꺼낸 것도 ‘옛날에 부관으로 얼굴을 익혔으니 가문을 위해 한번 잘 해봐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마에두에게 그런 복잡한 가문간의 권력싸움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지금껏 꿈에 그리기만 하던 그 일이 어쩌면  자신에게 실현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꽃 한 다발과 선물상자를 가슴에 꼭 껴안은 마에두는 거의 날 듯한 발걸음으로 3층에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하인이 가리켜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요?”

누군가에게는 듣기 싫은 북부 사투리에 갈라진 목소리겠지만 지금의 마에두에게는 음악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연 문 안에는 그동안 그리도 그리던 그 아름다운 그레이오팔 눈동자의 여인이 병상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