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0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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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채 전진캠프에 돌아온 마자리크 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격 실패소식에 길길이 날뛰는 제롬의 모습이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롬은 피가 흐르는 얼굴 한쪽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죄인처럼 서 있는 마자리크 경에게 갖은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누가 멋대로 퇴각하랬나? 내가 절반 이상 죽지 않으면 공격을 계속하라 하였거늘! 감히 내 연락관까지 두들겨 패놓고 멋대로 퇴각을 해? 지금 제정신인가! 앙?”
나름대로 제국 원로 중의 하나로 꼽히던 마자리크 경은 저 새파랗게 젊은 최고제후의 무례한 언사에 이를 악문 채 그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이그나토 가 지휘관들 역시 제롬의 조금은 억지스러운 꾸중에 부아를 애써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목을 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 근위대장만 없었어도......”
마자리크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모습에 제롬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돌아오기가 무섭게 마자리크 경의 목을 베라며 악을 쓰던 것은 베흔이 나서서 그나마 뜯어말렸지만 그 이상은 그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마자리크는 제롬이 끝도 없이 퍼붓는 욕지거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공격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보벤 경이 데려간 경기병대는 병력의 절반 가까운 2,000명을 전사 혹은 부상으로 잃었고, 3만 6천의 중장보병대에서도 7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가져간 11개의 공성탑은 모두 부서졌고 40대의 발리스타 발사대 중 제대로 건진 건 18대에 불과했다.
물론 제롬도 이번 공격이 어차피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 날짜에 쫓기면서 그의 조급해진 마음은 ‘혹시나’ 하는 확률 낮은 기대에 계속해 굴복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제롬의 꾸중을 묵묵히 듣던 마자리크 경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기가 코앞에 와 있는 상황에서 도하 일정에 맞춰 무리하게 몰아붙이는 건 어차피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우기가 끝나는 2개월 정도 이후까지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현재의 숙영지에서 방어에 치중하고 건조한 여름이 시작되면 그때 다시 공격함이......”
“미쳤군!”
할룩스에서 울려나오는 제롬의 성난 목소리가 마자리크 경의 막사를 쩌렁 울렸다.
“지금 놈들이 탈라스에서 길러내고 있는 기병이 몇인 줄 아나? 5만이야! 5만! 그리고 트라이앵글하고 ㅤㅋㅞㄹ크의 보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고! 우기가 끝나고 나서 그놈들을 다 상대할 텐가!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이따위 안이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마자리크 경은 후방의 편안한 숙영지에 앉아 일선 지휘관에게 소리나 질러대는 저 망할 사령관에게 내심 이를 갈았지만 당장은 도리가 없었다.
“나흘 주겠다! 나흘! 내 이번만은 살려줬지만 그때까지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경의 목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내 제후건 누구건 패전하고 돌아온 장수는 절대 용서하지 않고 목을 칠 것이니 내 말 똑똑히 명심하도록!”
제롬과의 통신이 끊어지면서 막사 안에는 잠시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개를 푹 숙인 마자리크 경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장에서 막 돌아온 그는 온몸에 뒤집어쓴 진흙과 피얼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막사 지붕을 투둑거리며 울리고 있는 빗소리에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약간 벌어진 플랩 너머로 강한 바람을 타고 쏟아지는 긁은 빗방울이 내다보였다.
“비가 언제까지 온다고 하나?”
“4일 정도는 계속 쏟아질 것 같다고 합니다.”
“제기랄.”
마자리크 경이 탄식을 내뱉었다.
바람도 쐴 겸, 참모진들을 이끌고 막사 밖으로 나선 마자리크 경은 허름한 막사 안에 지쳐 쓰러져있는 병사들과, 만신창이가 된 채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캠프를 둘러보던 캠프 옆, 계곡 절벽 위에 서서는 멀리 희미하게 올려다 보이는 산맥 꼭대기에 문득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계곡이 아니었으면 난리가 날 뻔했군.”
계곡 건너편에서 무섭게 흘러내리는 흙탕물과 자갈들을 바라보며 마자리크 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들이 풀과 나무들을 모두 잘라내 버리면서 민둥산이 되어버린 산사면은 쏟아지는 폭우에 속살을 고스란히 깎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깊은 계곡 덕분에 흙탕물과 자갈들은 모두 중간에서 차단되고 있었다.
“계곡이 범람할 위험은 없겠지?”
“어휴, 깊이를 보십시오.”
따라온 엔지니어가 정색을 하며 까마득하게 깊은 계곡 밑을 가리켰다.
“우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 욱리하 수위는 지금 일년 중에 가장 낮습니다. 적군들도 상류 이암댐의 수문을 굳게 닫아놓고 있습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물을 잔뜩 쌓아놨다가 우리가 도하를 시작할 때 수문을 기습적으로 열어서 부교설치를 방해하려 하겠죠. 욱리하 수위가 낮은 이상 이곳은 범람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마자리크 경은 다시 막사로 향했다.
“3일......3일......”
끔찍한 숫자가 그의 머릿속을 마치 노이로제처럼 괴롭혔다. 3일 내에 주류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끝장이었다. 제롬은 그냥 협박으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아직 수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눈이 다시 욱신거리며 쑤셔왔다.
마자리크 경이 주류성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그 다음날 아침, 마누엘 델루지 경이 이끄는 3군 10만 대군 선발대는 비류수 끝자락, 거대한 욱리하와 만나는 그 지점에 위치한 이암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환장하겠군.”
선발대와 함께 도착해 이암성의 모습을 처음 본 마누엘 경의 입에서 처음 터져나온 말은 이런 탄식이었다. 사람들이 ‘성’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그 이미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이곳은 성곽과 호수, 댐이 한 덩어리가 된 거대한 군사요새였다.
하류의 파란기스 호에 이어 황제령에서 두 번째로 큰 인공호수인 거대한 이암호는 그 중앙에 마치 섬처럼 위치한 거대한 성곽의 삼면을 마치 자연해자처럼 감싸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이암성의 조금 남쪽, 욱리하를 가로질러 세워진 복합댐인 이암댐은 그 높이만도 하류 쪽에서 올려보면 1.4스타디아(210m), 양단의 길이는 무려 50스타디아(7.5km)에 달하는 규모 덕에 댐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그리고 댐과, 호수 건너편 이암성은 긴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마치 T자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댐의 양단, 그리고 중앙으로도 견고한 부속성곽 3개, 서성과 중앙성, 동성이 댐으로 진입하려는 적군을 1차로 막아서고 있었다.
“우라질, 이걸 도대체 어떻게 공격하라는 거야?”
호수변 높은 언덕 위에 오른 마누엘 경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난감하게 만드는 건 상식을 벗어난, 이 성의 희한한 형태만은 아니었다. 이번 공격을 하면서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바로 ‘댐의 통제시설까지 손상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인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행여 적들이 댐을 손상시키거나 무너뜨려 버리면 이곳을 장악해 수위를 낮춰 부교를 놓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상 운송로를 확보하려는 제롬의 계획 또한 엉망이 되어버릴 터였다.
“이암성 자체를 공격하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씨발, 공격이나 할 수 있겠냐?”
참모의 말에 마누엘이 대뜸 짜증을 부렸다. 유일하게 육로와 접하고 있는 북쪽면은 가디언을 동원해도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나머지 면은 수심 1스타디아에 맞먹은 깊은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수변에서 무려 30스타디아는 떨어진 주성까지 물을 건너 공성전을 한다는 것도 어려우려니와, 공성장비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둔중인 적 병력은?”
“동맹군 직할 북부보병 7천과 경보병 5천, 가디언 5백, 서부 사역병단 2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우라질 서부놈들. 그놈의 사역병단이 안 가 있는 곳이 없군.”
투덜거리는 마누엘에게 이번에 참모로 동행한 근위대 가디언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암성과 댐을 잇는 저 구름다리가 적에게는 사실상 목구멍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저렇게 호수 위에 잔뜩 배를 띄워놓은 거고.”
마누엘은 구름다리 아래, 수면에 군데군데 떠 있는 수십 대의 쾌속정들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놈들도 그걸 아나보지.”
“원래 고수끼리의 싸움은 알면서도 당하는 거죠.”
피식 웃음지은 아리엘이 망원경 배율을 최대로 높여 쾌속정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쾌속정들 중 제일 중앙에 있는 큰 배에서도 누군가가 이쪽을 망원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이나브 카메네이. 역시 저놈이로군요. 쉽지 않겠군요. 물에서 싸우는 게 전문인 해적 출신이니......”
“어쩌지?”
마누엘이 머리를 긁적거리자 아리엘이 냉큼 거들었다.
“함께 온 가디언들을 동원해 저 구름다리를 장악하고 파괴하면 적들은 댐에 주둔한 병력과 성에 주둔한 병력이 두동강나게 됩니다. 그 때 중장보병과 투창병을 동원해 재빨리 댐만 장악하면 될 겁니다.”
“이암성은 그럼 어쩌고?”
마누엘이 멀리 이암호 건너 보이는 위압적인 이암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성을 함락시키는 건 급한 일이 아니니 댐을 장악하고 난 이후 3만 정도의 병력을 두어 봉쇄하는 정도로 해 두어도 무방할 겁니다.”
저 골아픈 성을 굳이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마누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 다리를 언제 공격하지?”
“본대가 모두 도착하는 대로 실시하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리엘이 냉큼 대답하며 입가에 웃음을 품었다.
그의 자신만만함에도 여전히 불만이 그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누엘은 댐 쪽에서 들려온 묘한 소음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저게 뭐야?”
마누엘이 가리킨 곳에서는 댐의 수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이암호에 고여있던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기가 시작되어서 녀석들 수위조절을 하려고 저러나봅니다.”
함께 온 엔지니어가 제일 먼저 엔지니어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함께 있던 아리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댐 수위를 낮춰서 댐에 대한 공격을 더 어렵게 만들려고 저러나봅니다.”
“둘 중에 하나만 얘기해. 헛갈려.”
단순한 마누엘답게 대뜸 짜증부터 부렸다.
“둘 다일수도 있고요.”
“뭐, 구경거리로는 나름대로 장관이군.”
마누엘은 댐에서 쏟아져 나온 어마어마한 물이 하류에 만들어내는 거대한 운무의 장관을 별 생각없이 바라보았다. 이 일로 욱리하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하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도, 그의 참모들 중 누구도 알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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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에는 이암성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지만 유조아가 그림기능을 지원하지 않는 관계로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의 작가게시판(Tasawwuf's story)에 대신 올립니다.
참고로 개인지 1부 완결편(9. 10권) 예약은 다음달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
가시는 길에 잊지말고 코멘트나 추천 남겨주세요. 요즘 연료가 부족합니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