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1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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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의 전투가 있던 날부터 시작된 폭우는 이제 만 이틀째를 넘기고 3일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주류성이 있는 흥안령 정상 부근에서는 가끔 비가 잦아든 때도 있기는 했지만 하루에 절반 정도는 첫날과 별 다를 것 없는 폭우로 양쪽 모두 전투 따위는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암댐이 방류를 시작한 그날 자정에 가까운 시각, 주류성 밑자락의 8부 능선 정도의 미끄러운 진흙탕 사면을 위장포를 걸친 십여 명의 동맹군 ‘특공조’가 바삐 뛰어가고 있었다. 우기의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폭우 때문에 몇 발짝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여기다.”
제일 먼저 도착한 2명의 건장한 남자들 손목에서는 파란빛 가디언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을 재빨리 둘러본 그들은 뒤따라오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의 손짓에 이 건장한 가디언과 비교됨직한 자그만 체구를 한 2명의 여자가 헐떡이며 그들의 뒤를 따라와 얼른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한 꾸러미의 투창을 짊어진 5명의 동부 투창병들과 후미를 맡은 가디언이 뒤이어 뛰어왔다.
그들은 빗물과 뒤엉킨 누런 흙을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석축 앞에 재빨리 웅크리고 앉았다.
“설마 이거 지금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이곳까지 일행을 엄호하고 온 투창병 분대장이 석축 틈새로 새나오는 흙탕물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여자는 입고 온 위장포가 갑갑한 듯 후드를 벗어던졌다. 그의 옷깃에는 서부 사역병단 중랑을 상징하는 은빛 깃털 문장이 박혀 있었다. 그 2명의 엔지니어들은 등에 짊어지고 온 계측장비로 석축의 상태를 재빨리 점검했다.
“많이 기울었군.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엔지니어가 마치 놀리듯 석축을 똑똑 두들기는 모습에 순간 기겁을 한 동부 투창병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그, 그만하세요.”
석축에 박혀있는 돌 틈새에서는 유난히 물이 많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고, 군데군데 균열이 생긴 석축은 눈으로 보기에도 당장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얼마 전, 남부 원정군이 이곳까지 오기 전에 서부 사역병들이 일부러 뽑아 걸쳐만 놓은 돌들과 교묘하게 커팅해놓은 결과물이었다.
“이거 무너지면 악 소리도 못 내고 다 죽을 거라고요.”
분대장이 석축 위를 올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말마따나, 석축 위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어마어마한 토사와 돌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굳이 비가 아니더라도 위에서 내리누르는 이 짐덩이만으로도 석축이 버티기는 충분히 버거워보였다. 물론 이 역시 서부 사역병단의 작품이었다.
석축 상태를 점검한 엔지니어는 이 미끄러운 산사면 아래 어딘가에 위치해있을 남부 주류성 공격군 숙영지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남쪽부터 돌을 차례대로 모조리 뽑아내시오. 그리고 행여 사고가 생기지 않게 재빨리 뛰어서 우리를 쫓아오도록.”
엔지니어가 3명의 가디언들에게 손짓을 보내며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3명의 가디언들이 이 긴 석축의 남쪽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엔지니어들과 동부 투창병들이 모두 몸을 피하는 모습을 확인한 가디언들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던 석축의 돌들을 쇠 지렛대로 재빨리 파내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돌이 빠져나간 석축 구멍에서 흙과 잡석이 뒤엉켜 쏟아지면서 이 석축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달려가던 가디언들은 뒤에서 들린 굉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석축 남쪽 끄트머리가 무너지면서 위에 쌓여있던 흙과 돌들이 그 밑으로 천천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놈들아.”
싸움 한 번 치르지 않은 이 별난 ‘특공조’는 뽑아낸 돌을 사면 밑으로 힘껏 걷어차내고는 재빨리 주류성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막사에 앉아있던 남부 5제후 마자리크 경은 내내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번 원정에 중장보병 2만과 기병 7천을 이끌고 참전한 그의 가문은 가문의 상황과 5제후라는 위치에 비해서는 너무 많은 병력을 내놓은 것이 사실이었다. 친언니였던 테나스 태후의 몰락 이후, 그의 가문은 풍요로운 남부에서도 줄곧 천덕꾸러기를 면치 못해왔고, 재정이나 군사력, 황실에 대한 영향력 모두 다른 남부제후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사령관 제롬은 소모전이 될 것이 뻔한 주류성 공략군에 정작 자신의 델루지 가 보병들은 단 한 명도 내놓지를 않았다.
하지만 당장 오늘 오후에도 제롬은 주류성을 빼앗지 못하면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한바탕 협박을 퍼부었던 터였다. 상급제후 중 제일 만만한 5제후에, 게다가 베흔에게도 눈 밖에 나 있으니 연합군 내에서 그의 군대가 유난히 천대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우라질 놈.”
폭우가 내리는 바깥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던 마자리크는 뜨거운 코코아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들이켰다. 습기와 뒤섞인 고산의 차가운 바람이 휑한 사령관 막사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 나왔다.
“너희도 추울 테니 뜨거운 거나 한 잔씩 마셔라.”
한쪽에 걸려있던 금속제 컵 5개에 손수 코코아를 탄 그는 막사 안을 지키고 선 5명의 근위병들을 손짓해 불렀다.
지난 공략전에서 그를 목숨 걸고 지켰던 그 5명의 병사들은 충성심을 빼면 제후의 근위병이라 하기에는 민망한 병사들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최정예병들도 아니었고, 출신 같은 것도 확인해보지 않았고, 근위병으로서의 교육 같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말단 보병이던 5명을 전격적으로 특진시켜 근위병을 삼은 건 당시의 격앙되었던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제후님.”
그들이 잔뜩 눈치를 보며 마자리크가 내민 컵을 받아들었다.
“델루지 가 근위병들은?”
마자리크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코코아를 마시던 분대장이 그의 의도를 눈치 챈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자고 있습니다. 제 분대원들이 계속 제후님 곁을 지키고 있다 보니 밤중엔 그네들끼리 모여 그냥 자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
마자리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지금까지처럼 그의 부근에는 제롬이 보낸 연락관과 근위병,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 2명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지난번 이들 5명을 전격적으로 근위병을 삼은 것도 즉석 포상을 빙자해 그들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밀어내보려는 욕심이었다.
출신이야 어쨌든, 이 5명은 자신을 따르는 이그나토 가의 보병들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분대장이 마자리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위병 분대장 주제에 감히 제후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마자리크 경은 한때 제국을 쥐고 흔들던 친언니 테나스 태후와는 달리 격식을 따지지 않고 정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근위병의 말에 쓴웃음만을 지었다.
“눈에 보일 정도라니 큰일이군.”
근위병 말마따나, 그는 지난번 파열된 한쪽 눈과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데다가 당장이라도 밀면 쓰러질 듯 피곤한 모습이었다.
저녁 내내 씨름하던 지도와 작전계획서를 한쪽으로 치워놓은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반쯤 식은 코코아를 들이켰다. 내일 아침부터는 날이 갤 것이라는 소식에 그는 이번에 2차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일은 제롬이 요구한 3일 시한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었다.
“저 중에 절반이나 살 수 있을까......”
병사들이 잠들어있을 막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조금씩 그늘이 드리웠다. 코코아를 다 마신 마자리크는 컵을 한쪽에 치워놓고는 힘든 몸을 이끌고 잠자리로 향했다.
그 때, 참모 한 명이 플랩을 확 열어젖히며 허둥지둥 뛰쳐들어왔다.
“사, 사령관님!”
“무슨 일인가.”
마자리크가 담요를 당기며 성의없이 물었다.
“산사태입니다! 지금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중간에 계곡이 있어서 상관없다며?”
“그, 그게, 빨리 나와 보십시오!”
숨이 턱에까지 찬 참모의 고함소리에 마자리크도 이불을 걷어내고 급히 뛰쳐나갔다. 계곡에 허둥지둥 달려간 그는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의 수위가 어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치솟아있는 광경과, 그 계곡을 향해 사방을 누렇게 뒤덮고 쏟아져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토사, 바윗덩어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뭐냐! 물이 왜 이리 불어났어! 며칠 동안은 괜찮다고 했잖아!”
마자리크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 그게 지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오늘 새벽에 이암댐에서 대대적인 방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욱리하 수위가 올라가서 그 지류인 여기도 수위가......”
“제기랄! 그걸 이제야 알리면 어떡해!”
입이 쩍 벌어진 마자리크가 위태로워 보이는 강물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잠깐만! 그러면 저 위에서 쏟아지는 산사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게 강물과 만나면.......제기랄! 다 깨워! 빨리! 빨리!”
마자리크가 마치 비명처럼 휘하 장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귀청을 때리는 경보음이 울리면서 내일의 전투를 위해 곤히 잠들어있던 병사들이 반쯤 정신이 없는 멍한 얼굴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달려 나왔다.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은 다 깨워! 흙주머니를 만들어서 토사를 막아! 숙영지를 지키란 말이다! 사역병과 노예들은 계곡 가까운 막사에 적치된 장비하고 보급품을 당장 옮겨 빨리! 빨리!”
각 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악을 쓰는 소리가 쏟아지는 빗소리와 어울려 이 거대한 숙영지를 뒤흔들었다. 손에 삽 하나씩을 들고 뛰어나온 보병들은 어느새 계곡 코앞까지 쇄도해있는 어마어마한 토사에 경악을 하며 그 자리에서 땅을 파고 모래주머니로 둑을 쌓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사면을 타고 내려온 거대한 토사의 흐름이 이미 물로 가득 차 넓어져 있던 계곡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상류에서 쏟아져내려온 물과, 고지대에서 쏟아진 토사와 바위가 온통 뒤엉켜 계곡은 눈 깜짝할 새 거대한 진흙구덩이가 되어갔다. 바위와 진흙에 뒤범벅이 되어버린 계곡물은 부피가 늘어나고, 설상가상으로 유속까지 느려지면서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계곡을 채워나갔다.
물인지, 토사인지 분간 못할 저 진흙탕물이 숙영지를 덮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제후님! 피하십시오! 남쪽 숙영지가 위험합니다!”
병사들의 고함에 마자리크가 고개를 번쩍 돌렸다. 계곡을 흘러넘친 진흙탕물이 비교적 완만한 지형의 남쪽 숙영지부터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맙소사.......저긴.......”
마자리크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숙영지 남쪽에는 공성탑, 전차와 같은 대형 장비가 적치된 창고, 그리고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부상병 수천 명이 있는 야전병원이 위치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제 발로 움직일 수도 없는 중상자들이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마자리크는 맨몸으로 달려가며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부상병들부터 높은 곳으로 옮기고 장비는 나중이다! 다시 반복한다! 부상자를 먼저 구하란 말이다!”
마자리크는 장비를 꺼내겠다고 달라붙어 있는 사역병 장교들에게 호통을 치며 야전병원 막사를 가리켰다. ‘부상병 우선’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장비는 포기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계곡 바로 옆에 있는 병원 막사 몇 개가 이미 진흙탕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부상병들의 살려달라는 비명과 함께 산 밑으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빨리!”
동료들의 비명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백 명의 사역병들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가로질러 필사적으로 달려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삐거덕거리는 야전 병동에 뛰어들었다.
3천여채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막사들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숙영지는 산 꼭대기에서 밀려 내려오는 소름끼치는 토사의 물결과, 그것을 막기 위한 보병들의 처절한 사투 속에서 또 하나의 전투에 말려들어갔다.
“무너지면 몸으로라도 막아! 차량과 전차, 건자재라도 아무 거나 끌어다가 무조건 막으란 말이다! 중장비는 둑을 쌓고! 병사들은 모래주머니로 터진 곳을 메워!”
각 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아우성과, 군데군데 막사가 휩쓸려가면서 내지르는 비명소리, 터진 둑으로 쇄도해드는 토사에 수십, 수백의 병사들의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끈질긴 남부보병들의 살기 위한 필사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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