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3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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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가 있는 3부 능선의 숙영지를 향해 차를 타고가던 마자리크는 진흙 구덩이에 또 빠진 차를 기를 쓰며 빼내고 있는 델루지 가 근위병들을 무표정하게 내다보았다. 어디서인가 뒤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반란병들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공포가 서려 있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겠군.”
그는 옆에 앉은 감시병과 연락관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7부 능선까지 올라오면서 고생했던 만큼이나 내려가는 길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가뜩이나 적들이 잔뜩 망가뜨려놓고 도망간 이 길은 며칠동안 쏟아진 비와 어젯밤의 산사태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의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다보니 차는 출발한지 3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채 5부 능선에도 닿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령부부터 5부 능선까지는 도로사정이 비교적 양호하니 이번만 넘기면 바로 도착할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염려 마십시오.’라는 말이 위로인지, 놀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자리크는 조바심을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또다시 창밖을 유심히 살피던 마자리크는 구덩이에서 차가 빠져나오는 느낌에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차를 끄집어낸 델루지 가 근위병들과 운전병이 흙투성이가 되어 차에 훌쩍 올라탔다.
“됐어. 가자.”
차가 다시 출발하자 마자리크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삶의 희망이 멀어지는 흙구덩이처럼 그의 손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역부대가 이미 다져놓은, 훤히 뚫린 좋은 길이 멀리 산자락 아래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 모두 끝이구나......”
그가 무심코 손을 더듬으며 차 천장 너머 보이는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차는 가파른 모퉁이를 휙 돌았다.
“에이! 뭐야!”
운전병의 욕지거리와 함께 차가 급정거하면서 완충장치가 작동하는 충격에 사람들이 대번 앞뒤로 나동그라졌다.
“씨발, 사역병새끼들 해놓는 게 다 이렇지, 뭐.”
근위병들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 떨어졌는지, 집채만한 바위가 길 한중간을 떡 가로막고 있었다.
“인력으로는 안 되겠는걸.”
바위를 힘껏 밀어보았던 병사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연락관이 짜증스런 얼굴로 옷을 털며 차에서 내려섰다.
“본대에 연락해. 쫓아오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걸어서라도 내려가야겠다.”
“알겠습니다.”
막 할룩스를 뽑아들려던 근위병은 순간 어디선가에서 날아든 시커먼 물체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으며 차 측면에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뭐야!”
작은 도끼에 머리가 조각나 쓰러진 동료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여 병사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놈들이 벌써 쫓아온 거야?”
바싹 얼어붙은 그들 주위로 마치 죽음같은 침묵이 잠시 흘렀다.
“허! 잘 걸렸다!”
길 한쪽 젖은 수풀에서 십여명의 웬 거한들이 괴성과 함께 공중으로 붕 날아들었다. 그 엄청난 덩치와 날랜 몸놀림으로 보아 저들이 누군지는 뻔했다.
“가디언들이다!”
근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근위대 가디언들을 폭동이 벌어진 캠프에 두고 온 그들로서는 저 무서운 인간병기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놓치지 말고 다 죽여!”
파란빛 팔찌를 낀 그 가디언들은 차 옆에서 달아나지도 못하고 어물거리던 연락관의 겁에 질린 얼굴을 주먹 한 방으로 바로 짓뭉개버렸다. 그대로 즉사한 연락관을 놔둔 채 사방으로 흩어진 가디언들이 도망친 근위병과 운전수를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려 온 몇 번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끝으로, 이 ‘구출작전’은 싱거울 만큼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이십니까?”
지휘자로 보이는 한 가디언이 그때까지도 차 안에 앉아있던 마자리크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머리가 부서진 채 죽어있는 연락관 시체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던 마자리크는 그 가디언들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온통 적군이니 저희와 같이 가시기는 힘들 겁니다. 잠시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어리둥절해진 마자리크의 입을 대뜸 틀어막았다. 거의 동시에 무언가 따끔한 느낌이 그의 옆 목을 찌릿하게 울렸다. 무어라 물으려던 마자리크는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에 문득 정신을 차린 마자리크는 비릿한 물내음과 잔잔한 물결소리를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어디냐?”
그는 군용담요를 가슴에 덮은 채 작은 보트에 누워있었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치켜든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마치 바다처럼 수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거대한 강물과, 그 건너편에 보이는 1번 도시와 웅장한 자태의 황궁, 아니 동맹군이 부르는 대로라면 아케메니안 궁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잠시 머리가 아플 수도 있으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십여명이 탄 보트 앞머리에는 검은 피부에 머리를 빡빡 깎은 단단한 체구의 가디언이 도끼를 짊어지고 서 있었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금빛 가디언 팔찌를 본 마자리크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동맹군 가디언부대장 시로입니다. 여기는 안전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로가 불안해하는 마자리크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오후 6시입니다. 험하게 모셔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후님을 기절시켜서 가디언들이 짊어지고 강변까지 뛰어오는 것이 그나마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9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마자리크는 강 건너 서쪽 흥안령 산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해를 돌아보았다. 저곳 어딘가에서 참담한 기분으로 해돋이를 맞았던 것이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때맞춰 의식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황상께서 경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상.......어떤 황상?”
동맹군이 말하는 ‘황상’이라는 개념에 아직 익숙지 않은 마자리크는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 된 느낌이었다. 마자리크의 조금은 엉뚱한 질문에 시로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욱리하를 건너온 보트는 황궁 서북쪽 성벽에 뚫린 작은 터널로 접근해갔다.
마자리크가 언뜻 둘러본 1번 도시는 근위대가 장악하고 있을 때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해진 모습이었다.
강변에도 거의 0.5스타디아마다 솟은 감시탑이 음산한 느낌마저도 주는 가운데 군데군데 경계를 서고 있는 아메샤 스펜타 초병들의 숫자가 행인들보다 도리어 더 많아보였다. 정세를 눈치챈 대다수의 민간인들이 곧 전투가 벌어질 황성에서 일찌감치 도망쳐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산한 도시에서도 남쪽의 항구만은 배 한 척만 밀면 나머지 배들도 우루루 밀려갈 듯 꽉 찬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적이 수송수단으로 사용하기 전에 동맹군들이 강제로 억류해버린 1번 도시 내의 배들이었다.
마자리크와 시로가 탄 보트는 황성 아래에 뚫린 좁은 수로를 타고 황궁 지하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어둠에 잠시 적응하지 못하던 마자리크는 갑자기 드러난 탁 트인 지하공간에 깜짝 놀라며 얼른 눈을 가렸다. 습기로 가득한 이 넓은 공간은 욱리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좁은 수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마치 제단처럼 공중으로 솟아오른 왼쪽의 연단, 그리고 반대편에는 계단식 청중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
짧은 목례를 해 보이는 사람은 길지 않은 금발머리에 푸른빛 눈동자, 왼쪽 눈을 가로지른 큰 흉터가 얼굴에 새겨진 낯선 여자였다.
“병부대신 상장군 제네르 하크로딘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쪽 눈을 다친 마자리크는 이 묘한 인연인지 아닌지에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더듬거렸다. 지하공간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제네르와 함께 온 루토가 입을 열었다.
“옛날 사교집단에서 물과 지혜의 신 에아를 받들던 신전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특별한 손님을 맞을 때 드물게 쓰고 있습니다.”
보트에서 내린 마자리크는 앞장서는 제네르를 따라 황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인이 바뀐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황궁은 여기저기 정리가 덜 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 짧은 기간에 비해서는 제법 빨리 모양을 찾은 듯 싶어보였다. 특별히 빈 곳 없이 관리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지금은 떠나간 근위대 병사들의 자리를 아메샤 스펜타의 정예 보병들이 남김없이 채우고 있었다.
“황상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이곳 황궁에서 오랜 경험을 가지신 분입니다. 황궁의 운영은 이전과 전혀 다름없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있지요.”
제네르가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며 짐짓 웃음을 지었다. 엘리베이터가 황제의 공식 집무실이 있는 13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마자리크는 이번 자신의 선택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지를 또다시 곱씹고 있었다.
“폐하. 남부 5제후이신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이십니다.”
긴장된 마음을 애써 달래며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은 마자리크 부인은 10척(3m) 정도 높이의 계단 위에 만들어진 큰 상석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 올랐다.
“음?”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옥좌 앞의 탁자에 차 한 잔을 놓고 함께 앉아있던 검은 무명포 차림의 누군가와 먼저 눈이 딱 마주쳤다. 대뜸 자신의 눈을 노려보는 코리온의 태도에 멈칫했던 마자리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렐의 모습에 바싹 굳어버렸다.
“어서 오시오. 마자리크 경.”
대화조차 해 보기도 전에, 이 ‘황제’는 분위기와 약간의 눈짓, 위압적인 키만으로 그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내게 잘 오셨소.”
겁에 질린 마자리크를 스스럼없이 품에 안아준 카렐은 그에게 코리온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이유 없이 소름이 끼치는 괴상한 눈빛의 저 유학자와 마주앉는 것이 그로서도 내심 내키지를 않았지만 일단은 도리가 없었다.
일단 자리에 앉은 그는 뇌 속을 파먹는 듯한 저 무서운 유학자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리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힘겹게 평상심을 찾은 그의 곁에는 한때 근위대 남부 파견군 사령관으로 몇 번 안면이 있던 카렐이 ‘황제’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제게.......원하시는 게 뭡니까.......폐하?”
마자리크는 안 떨어지는 입술을 애써 움직여 카렐에게 어색하나마 경칭을 붙였다. 그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카렐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술 한 잔을 손수 내주었다.
“그건 내가 물을 질문인 것 같소만?”
“.......”
난처해하는 마자리크에게 카렐이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내 그대의 안전을 보장해주겠소.”
“제가.......원하는 것이 단순히 제 안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제겐 지켜주어야 할 영지민들과 병사들과 가문 사람들이.......”
“일단 투항은 했으되, 연합군에 배속된 이그나토 가의 병사들과 영지인 일리안의 안전을 보살펴 달라 이말 아니겠소? 내 그 정도 자비야 못 베풀어 주겠소.”
황제가 재빨리 선수를 치자 마자리크는 다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예 동맹군 쪽으로 돌아설지, 아니면 남부연합군에서 손을 떼는 정도의 선에서 마무리할지를 아직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상대의 심리상태를 카렐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물론, 경은 주류성 밑자락에서 우리 가디언부대의 기습공격에 납치되어 온 포로요.......우리에게 투항 같은 건 '결코' 한 일이 없고 말이요. 당장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린 마자리크는 재빨리 카렐의 눈치를 살폈다.
카렐이 가슴을 펴고 앉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젠 내 조건을 말할 차례요.”
“......”
“내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나,”
카렐의 이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던 제네르가 얼른 표정을 추스렸다.
“내 그대를 억류하고 이그나토 가를 협박하는 것을 용인해주시오. 아니, 용인이라기도 뭣하군. 경이 더 원했던 것일 테니.”
마자리크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술을 훌쩍 들이켰다. 물론 그가 카렐의 제안에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는 한때 ‘적의 수괴’였던 카렐은 그와 동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각이 일치했다.
“내 그대를 구해주고, 연합군이라는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으니 그대도 내게 철군으로 보답해 줄 것을 믿겠소.”
“........알겠습니다.”
마자리크가 그 정도는 이미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천리로 잘 나가는 담판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카렐은 그의 잔에 술을 다시 채워주었다. 이젠 그 이상의 일을 꺼낼 시간이었다.
“물론 경이 철군을 넘어서서 내게 힘을 빌려준다면 대가는 단순히 그대와 가문의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오. 이후로도 죽.”
카렐의 뜬구름 잡는 제안에 마자리크가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 이 자리의 그는 어디까지나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주이며 상급귀족가 제후의 신분이었고, 허튼 다짐 따위에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마자리크가 야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동부 탈라스에서 지금의 썩어빠진 근위대를 대신할 짐의 새로운 전사들을 양성하고 있으나 서부의 배신자 칼림이 베흔의 사주로 그곳을 곧 공격할 것 같소. 그곳에 여기 있는 코리온 오라버니가 곧 갈 것이니, 두 분이서 그곳을 지켜 주시오. 그러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부 공동령인 페스트를 그대 가문에 주겠소.”
순간 깜짝 놀란 마자리크는 읍 소리를 내며 재빨리 입을 막았다.
페스트는 남부와 황제령, 동부가 만나는 남부 최고의 교통의 요지였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입지와는 정 반대로, 실제 거주자는 거의 없는 기이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을 파고들어보면 좀 복잡해서, 그곳과 접하고 있는 최고제후 델루지 가, 3제후 호지 가, 이그나토 가의 지독한 분쟁을 보다 못한 세나우스 1세와 당시 테나스 이그나토 황후가 ‘공동령’으로 선포해버린 곳이었다.
“그 정도면 내 조건으로는 충분한 것 같소만? 기회는 오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오.”
“아, 알겠습니다.”
마자리크가 식은땀을 닦아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번 ‘도박’의 판돈은 그의 예상보다 더 컸다. 어차피 베흔의 눈 밖에 나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수우가 제위에 오르는 것을 돕는다고 가문 영지의 사정이 딱히 나아질 성 싶지도 않았다.
몰릴 데까지 몰린 이상, 그로서는 이번 도박이 실패해도 어차피 제롬에게 빼앗길 운명이었던 자신의 목숨 말고는 버릴 것이 없었다. 그는 카렐을 돌아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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