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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14화 (413/1,132)

< -- 414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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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을 끝낸 마자리크 경이 제네르의 안내를 받아 영빈관으로 간 후, 카렐이 코리온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보기에는 어떤 것 같소?”

“심성이 유한 사람이군요.”

코리온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베흔에게서 그 들볶임을 당하면서도 살아 버티지 못했겠지.”

“그건 그렇고, 페스트를 이그나토 가에 주신다니.......황실과 이그나토 가 모두 손해 볼 것 없는 일이군요.”

코리온의 물음에 카렐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오라버니는 속일 수가 없구려.”

“페스트를 공동령으로 만드신 건 세나우스 1세 폐하의 악수(惡手) 중의 악수였죠. 델루지 가가 이후 그곳을 매번 남부연합군의 합동훈련지로 삼아 황제령과 동부에 무력시위를 하곤 했으니.”

“누구든 특정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면 자존심과 명분 때문에라도 다른 가문 군대가 제집처럼 드나들지는 못할 것 아니요. 상위제후도 아니고 5제후라면 너무 힘이 없지도, 위험천만한 호랑이새끼도 아니니 딱 제격이지.”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코리온이 찻잔을 비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몸도 이제 어느 정도 나아가고 하니, 열흘 정도 후에는 탈라스로 갈까 합니다.”

“오라버니께는 그다지 유쾌한 곳이 되지 못할 텐데, 괜찮겠소?”

“누군가 가야 한다면 그곳을 잘 아는 소인이 가야겠지요.”

“그래서 며칠 새 병서를 그리도 열심히 읽으신 거요?”

“소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폐하.”

코리온이 그 차가운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흘렸다.

혼자 낄낄대며 웃음을 짓던 카렐은 집무실 탁자 위에 있던 긴 상자를 집어 코리온에게 내밀었다. 무심코 상자를 받아든 코리온은 카렐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뭡니까?”

“이 동생은 말주변이 없어서 기껏 이런 식으로나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낸다오.”

코리온이 의아한 표정으로 열어본 상자 안에는 한 뼘 정도 길이의 붉은 코팅된 단검이 기이한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지난번 선물했던 싸구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품이요. 웬만한 갑주는 뚫고도 남을 단단한 칼이니 소중하게 간직하시구려.”

코리온은 날을 쓰다듬으며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곳에는 ‘황고(皇考)대태자 주페의 딸, 세나우스 4세 카렐 대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을 소중히 품어안으며 코리온이 짐짓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 목숨만큼 소중히 간직하지요.”

남부 5제후 마자리크 경이 동맹군에 생포당했다는 소식은 남-동부연합군 전체를 무섭게 뒤흔들었다. 특히나 그동안 마자리크를 들볶아왔던 제롬의 충격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도 마자리크가 정말로 ‘생포당한’ 것인지, 아니면 생포를 가장해 적에게 도망쳐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을 증언할 근위병이나 연락관들은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고, 버려진 차 안에는 마취약과 마자리크의 체액이 묻어있는 주사기까지 함께 발견되었다.

어쨌든 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제롬이라고 이그나토 가를 무작정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마자리크 경의 적장자 윌더 이그나토 경의 전문입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앉아있던 제롬과 샤자한 공은 릴라크가 가져온 전갈에 지레 놀라며 움찔했다. 릴라크의 손에 들려있는 건 그냥 일상적인 전갈이 아닌, 제대로 양식을 갖춘 듯 가죽 두루마리에 단단히 말려있는 공식 문서였다.

“빨리 줘 봐.”

문서를 받아 펼쳐 본 제롬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두루마리 째 벽에 내던져버렸다.

“뭡니까?”

샤자한 공은 릴라크가 다시 주워 온 문서를 받아 펼쳐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도 흙빛이 되어버렸다.

“......이년에게 당한 것 아닙니까?”

제롬은 이마를 감싸 쥔 채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공식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적 동맹군의 인질이 된 종장이며 모친 마자리크 경의 안위를 위해 연합군에 소속되어있는 본가 병력 2만 7천을 사정상 전원 철수시키고자 합니다. 가문의 안위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임을 부디 양해해주시길 바라오며, 최고제후님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본가 연합군의 압승을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며.......-

문서 아래쪽에는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는 이런저런 미사여구가 절반 이상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 한쪽에는 이그나토 가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을 시에는 황궁에 인질로 잡고 있는 마자리크 경을 거열형에 처하겠다는 카렐의 최종 통고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전진캠프의 이그나토 가 병력이 철수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2군에 소속된 중장기병 7천도 회군하기 시작했다는 연락입니다.”

샤자한에게 힘없이 중얼거린 제롬이 머리를 감싸 쥐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 하크로딘 가의 내분부터 시작해서 이그나토 가의 이탈까지, 남-동부연합군은 본격적인 황도 공략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심각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주류성은 일단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제롬을 대신해 샤자한 공이 결국 먼저 결단을 내렸다. 제롬이 고개를 치켜들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육상 보급로를 어떻게 확보하고요! 주류성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는 예르마크 경의 2군은 어쩌고요! 주류성을 포기하면 2군에 있는 남부기병 5만은 산맥 너머에서 캠핑이나 하고 있으라는 겁니까!”

샤자한 공이 이 다혈질의 최고제후를 달래듯 찬찬히 말을 이었다.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마누엘 경의 3군이 이암성을 점령하면 그때는 수상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위가 여기서 더 높아지면 도하가 더 어려워집니다. 이곳에 보병 1개 군단 정도를 남겨서 저들을 성 안에 묶어둔 후에, 본대는 계속 북진해서 최대한 빨리 욱리하부터 돌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롬이 이를 갈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샤자한 공의 말마따나, 이제와 주류성에 새 병력을 올려 보내고, 다시 공성전을 전개해 길을 뚫기는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다.

“예르마크 경의 2군은 기병 위주고, 나머지 병력도 도보 행군 없이 차량으로 이동하니 기동성이 훨씬 높습니다. 2군은 북쪽으로 빙 돌아 이암성을 통해 우회하게 하면 다리가 완공될 무렵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짜증스런 얼굴로 한참을 말이 없던 제롬이 옆을 돌아보았다.

“헤즈 플라칼 경.”

“네에.”

그때까지도 한쪽 구석에서 과자를 씹고 있던 헤즈가 제롬의 부름에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마자리크를 잡아들인 후에 주류성의 새 공략군 사령관으로 내정되어있던 차였다.

“4군단 2만2천과 산악병연대 잔여병력을 줄 테니까 여기 주류성에 있는 놈들이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잡아둬. 본대는 주류성을 포기하고 계속 북상하겠다.”

“4군단이면 호지 가 병력 아닙니까.”

헤즈가 짜증스런 표정을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그게 왜?”

헤즈의 속내를 바로 눈치챈 제롬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헤즈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간 플라칼 가의 정예 병력을 이끌던 그의 눈에는 3제후가의 병력이 유난히 미덥지가 않았다.

이곳 주류성에 남는 것이 호지 가 병력이라면, 플라칼 가의 병사들은 제롬이 본대와 함께 계속 데려간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플라칼 가 장병들은 위험한 도하작전과 황도 공격에 앞장세울 것이 뻔했다.

이곳 주류성까지 행군해오는 중에도 가장 위험한 정찰과 수색은 그동안 ‘델루지 가의 사냥개’ 노릇을 충실히 해 온 플라칼 가 병사들의 차지였다.

‘저 우라질 새끼.’

헤즈가 투덜거리며 본토에서 부인이 직접 만들어 보내 준 쿠키를 입에 넣었다. 평소 그리도 달콤하던 부인의 산딸기 쿠키가 유달리 텁텁하게 느껴졌다.

“전 그럼 이만 나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헤즈는 힘없이 막사 밖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있을 것이라면 더 이상 저 부담스런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을 필요도 없었다.

‘마자리크 그년이 생각 빨리 잘 했군.’

헤즈가 한숨을 내쉬며 숙영지를 걸었다. 그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바라는, 전형적인 ‘가문 적장자’였고, 적당히 욕심도 부릴 줄 알고, 전쟁터에서는 충분히 잔인해지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피와 명예에 굶주린 어마어마한 야심가도 아니었다.

샤레이에서 그 치열한 전투를 모두 겪고 다시 탈라스로, 그리고 이번엔 황제령까지 오면서 그의 플라칼 가 병사들은 조금씩 소모되어 개전 당시의 장병들은 채 절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탈라스에서 케세크가 이끌던 가문 보병대 5천이 전멸당하면서 사기 또한 바닥이었다.

이미 행군 준비를 명받았는지, 곳곳에서 군장을 꾸리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플라칼 가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전쟁이 너무도 지겹다고 생각했다.

연합군 1군이 주류성을 포기하고 떠난 그 시각, 욱리하 상류에 있는 이암성에서는 이제 3군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전날 저녁부터 호수 서쪽에 나타나기 시작한 마누엘의 연합군 3군 본대 병력은 어느새 호수변 비탈을 꽉 채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숫자까지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 넓은 호수 덕에 아직 성채에는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비온 후의 물안개가 어둠속에 짙게 깔린 이암호 위에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50여척의 배들이 곳곳에 산개해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30척(9m) 정도 길이로 만들어진 이 쾌속보트들은 해적들이 즐겨 쓰는 것과 같은 크기, 모양이었다. 이런 배 한 척당 5명 정도씩의 가디언과 경보병 10명, 키잡이 한 명씩이 배치되어 이암성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말 내 팔자 한 번 지랄맞네. 여기까지 와서 또 물질이 뭐냐고.”

배 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물장난을 치던 자이납이 물안개 너머 희미한 실루엣이 비치는 구름다리를 올려보며 오늘도 끝없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근데 저네들은 배를 어떻게 가져왔을까?”

자이납이 적진 쪽 호안에 떠 있는 수십 척의 보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조립하고 있는 꼴을 보니까 미리 분해해서 가져온 모양이군요. 계속 가져다가 욱리하 도하에도 쓸 생각이겠죠. 어차피 큰 배는 가져올 수가 없으니.”

“그냥 성이나 지키는 거면 좀 좋아. 새끼들 저 보트로 다리를 노리고 습격해 올 텐데, 어떤 거지같은 새끼가 저딴 데다가 다리를 세워놓고 지키라고 하는 거야?”

자이납은 씹고 있던 사탕수수를 물에다가 퉤 하고 뱉어냈다.

그의 불평은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내용만은 정확했다. 이암성 자체는 가히 철옹성이었지만 문제는 정작 지켜야 할 댐과의 연계가 고작 호수를 가로지른 구름다리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취약성의 분산이라는 전술의 기본 개념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이 구름다리는 설계한 자의 기괴한 취향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암성에서 댐까지의 거리도 만만치를 않아서, 이 구름다리의 길이 또한 거의 7스타디아(1.05km)에 가까웠다. 폭도 보통 다리보다 훨씬 좁은 20척(6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철제 다리가 이렇게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다 보니 멀리서 언뜻 보면 다리라기보다는 성과 댐 사이에 늘어진 긴 실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긴 다리 중 어느 한 곳이든 끊기면 끝장인 만큼, 그곳에 배치해야 하는 수비병의 숫자도 천 단위는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수비에 어려움이 있다보니 적들의 공격을 1차로 물 위에서 차단하는 건 자이납이 이끄는 8백여 수병들의 몫이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던 자이납은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물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배에 있던 십여명의 가디언들도 즉시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심야의 희미한 물안개 너머 거무스름한 형체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들입니다. 하나, 둘.......54척입니다. 우리 배보다는 조금 큰 것 같습니다.”

함께 있는 페로 가디언의 말에 자이납이 대뜸 입을 삐죽거렸다.

“쳇. 네피 대장한테 일단 알려. 그런데 저 새끼들 여기까지 걸어서 허우적거리고 온 주제에 배는 어떻게 챙겨왔을까.”

“그러니 걸어왔겠죠.”

누군가의 가벼운 대답에 긴장되었던 분위기도 잠시 누그러졌다.

“준비들 해.”

자이납은 평소 쓰던 시미터 대신 두 뼘 정도 길이의 짧은 검을 뽑아들었다. 나머지 병사들 역시 이 좁은 배 위에서의 싸움에 대비해 미리 준비한 짧은 칼과 도끼를 뽑아들었다.

“5소대 10척은 구름다리 밑을 지키고 나머지는 선제공격한다! 출발!”

자이납이 큰 고함을 지르며 칼을 앞으로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40척의 배가 반대편에서 몰려오는 연합군 보트를 향해 사방으로 물살을 튀기며 질주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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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고(皇考)는 황제의 아버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암성의 지도는 위쪽 공지에 함께 올려놓았습니다. 'more'를 누르시면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뀐 뷰어는 전보다 훨 낫군요. 글자크기 13에 바탕체로 해 놓으니 책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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