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6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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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구름다리를 끊었으니 이제 댐의 적병들은 고립됐다. 공격 개시해.”
아리엘의 연락을 받은 마누엘이 공격명령만을 기다리던 케세크 경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주력병력이 머무르고 있는 이암성에서 댐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이들에게는 이제 댐의 진입로 지키고 있는 3개의 보조성---흔히 서성(西城), 중앙성, 동성(東城)이라고 불리는---작은 성들을 무너뜨리는 것만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성은 3군 본대 바로 앞의 댐 진입로를 지키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본대가 남진할 길목 바로 옆을 막고 있는 만큼,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였다.
“조그맣긴 해도 제법 까다롭겠는데요.”
케세크가 서성을 올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진영 중앙의 큰 탑 위에 마누엘과 함께 서 있던 케세크는 거의 1스타디아 높이는 됨직한 깎아지른 석회암 수직절벽 위, 서성을 올려보았다.
“이거 어지간히 죽어나가겠군.”
이미 공성준비를 마친 5만의 중장보병들이 댐의 서쪽 끝을 보호하고 있는 보조성을 노리며 한참 기세를 올려가고 있었다. 각 제대별로 북을 든 고수들과 지휘관들의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보병대 곳곳에서 들려왔다. 구름다리는 일단 끊었지만 서성에는 9중대 500명의 북부보병들이 수성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5만에 달하는 이 어마어마한 병력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리엘 녀석은 구름다리에서 중앙성을 공격할거야. 근위대 놈한테 질 수는 없잖나.”
마누엘 경이 댐 중간께에 솟아오른 중앙성을 가리켰다. 댐과 구름다리가 만나는 중앙성에도 이미 수백의 수비병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공성전에 투입될 수천의 남부병사들이 급조한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 중이었다.
“근위대 가디언들은요?”
케세크가 잔뜩 불만스런 얼굴로 물었다.
“가디언들은 비싸신 몸들이라 공성전에는 투입 안하기로 했잖아. 다리만 점거하고 있다가 보병들이 길을 뚫어주면 그때 들어갈 것 같던데.”
“쳇.”
고개를 돌린 케세크는 중장보병대 제일 선두에 있는 제6군단, 그리고 세닉 가에서 온 투창병 1천여명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공격해.”
험한 산자락을 낮게 울리며 누군가에게는 소름끼치게도 느껴질 나팔소리가 웅웅거리며 번져나갔다. 나팔소리에 각 팔랑크스를 이룬 120명 단위 제대별로 깃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진격!! 물러나는 병사는 뒤의 병사가 즉결처분한다!”
이번 공성에는 공성탑도, 발판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필요가 없었다. 오직 알량한 사다리와 리프트케이블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투 전, 진통제로 가장해 투여받은 한 알씩의 정제에 오늘은 특별히 많은 마약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저들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마치 최면을 걸 듯 악을 쓰며 고함을 내지른 남부 병사들은 보잘것없는 사다리와 리프트에 기대 까마득한 절벽 위, 이암댐의 서성을 향해 차례대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장보병이 1선에! 2선의 투창병은 절벽 중간에 임시 사대를 만들고 엄호사격을 퍼부어!”
근위대 가디언들의 번개같은 기습에 눈 깜짝할 새 끊겨버린 구름다리와 함께 댐에 주둔하는 동맹군 수비병들의 희망도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완전히 고립된 이 댐의 3개 보조성에는 동맹군 직속 중장보병 20대대 1천3백과, 이번에 새로 투입된 햇병아리 동부 투창병 7백, 그리고 발리스타를 다루는 많지 않은 서부 사역병까지 모두 합쳐야 2천 정도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만에 육박하는 남부연합군 3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이제 받아내야 할 판이었다.
서쪽 부속성, 서성을 지키는 9중대장 타슈카 라코타 중랑은 이 짧은 순간이 혹시 현실이 아닌 꿈일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 그와 함께 서성에 선 5백여 수비병들과 3백여 동부 투창병들은 산골짜기를 타고 울리는 남부의 진격나팔소리에 본능적으로 옆에 선 동료들의 얼굴부터 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서성 역시 이미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오직 뚫린 곳은 중앙성과 이어진 댐 위 뿐이었다.
“이대로는 역부족입니다, 중대장님.”
창백해진 얼굴의 부장이 라코타 중랑에게 달려와 성 아래를 가리켰다.
“하임달 때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은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그는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성벽 아래로 몸을 내밀었다. 까마득한 절벽 밑에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수천의 남부 중장보병들이 케이블과 사다리에 기대 필사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별 것도 아니니 호들갑 떨 것 없다.”
라코타 중랑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평민 출신으로 북부 2제후가 말단 사병으로 시작해 하급 사관인 대수를 거쳐 하임달의 결전에도 의용병으로 참전했던 그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은 이곳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앙성과 동성(東城)은?”
“아직 공격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들이 배를 타고 집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 10여분 후면 중앙성도 공격을 개시할 것 같습니다. 행여 중앙성이 무너지면 우리 중대는 완전히 끝장.......”
타슈카는 당황했는지 생각없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부장의 입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적은 댐 통제소가 있는 중앙성과, 자신들의 남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 서성을 주로 노릴 것이다. 4제대와 투창병들은 댐 위를 지키고 1,2,3제대는 나와 함께 이곳 서성을 지킨다.”
“알겠습니다!”
마치 자신의 안방에서 말하듯, 낮고 차분한 지휘관의 목소리에 부장들의 잠시 격앙되었던 분위기도 이내 가라앉았다.
“가디언은 2명씩 팀을 이루어 각 섹터별로 2선에 대기하고 성벽까지 넘어오는 적이 있으면 즉시 투입되어 최대한 빨리 제압한다.”
“예!”
지시를 끝낸 라코타 중랑은 성벽 중앙의 큰 탑에 뛰어오르며 성을 지키는 북부 전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이 뚫리면 황상께서 계시는 황궁이, 그리고 마지막엔 우리의 고향인 북부가 또다시 초토화된다! 알겠는가! 이곳에 뿌려진 우리의 시체를 동포들, 아니 황상께서 거두어주실 것일진대 무엇을 더 걱정한다는 말인가!”
오르마즈가 하임달에서 남겼던 그 마지막 말을 상기한 북부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산자락이 떠나가라 함성을 올렸다. 거의 동시에, 산 밑에서 남부 병사들이 날린 거대한 발리스타가 성벽을 향해 피잉 하며 날아들었다.
“숨지 마라! 올라오는 적들을 너희들의 두 눈으로 똑바로 내려다보란 말이다!”
사람 키만한 거대한 발리스타가 성벽 서쪽 구석을 무너뜨리며 그 뒤에 있던 몇 명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하지만 이미 독기가 오른 북부와 동부 병사들은 올라오는 적병들을 향해 긴 창을 힘껏 내지르고 미리 준비한 투창을 발사했다. 그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성벽에 매달렸던 남부 병사들 수십이 비명을 지으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또 날아온다!”
누군가의 찢어지는 고함소리에 뒤이어 또 한발의 발리스타가 성벽에 설치된 크레인 한쪽을 무너뜨리며 날아갔다. 크레인에 달려있던 거대한 추와 붐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 밑에 십여명의 병사들이 또다시 깔려 으스러졌다.
“이런 썅! 이거 밀어!”
라코타 중랑이 십여명의 부장, 가디언들과 함께 떨어진 추를 성벽 밖으로 힘껏 밀기 시작했다.
“우리 발리스타 어디 간 거냐! 적진 한중간에 떨어뜨려! 서쪽! 서쪽 적들이 제일 빨리 보강되고 있단 말이다! 저놈들 머리 위에 쏟아버려!”
아군들의 피로 붉게 물든 크레인의 추를 밀고 간 타슈카는 그 거대한 쇳덩이를 조금 전 무너진 서쪽 성벽으로 힘껏 밀어냈다. 사람 수십명의 체중에 육박하는 그 육중한 쇳덩이는 절벽의 튀어나온 바위들을 차례차례 산산조각내며 그곳에 매달려있던 수십명의 남부 보병들을 짓뭉개고 떨어졌다.
“발사!”
성 위에서 날아오른 넓적한 발리스타가 열을 맞춰 서 있던 절벽 아래 남부보병들의 머리 위를 사정없이 덮쳤다. 흙먼지 파편과 함께 으스러진 남부 병사들의 살덩이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에 질세라 남부 쪽에서 날아든 발리스타가 2선에서 사격을 퍼붓던 동부 투창병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악!”
튕겨나가는 발리스타 파편에 팔과 다리를 명중당한 타슈카는 공중을 한 바퀴 빙 돌고서야 단단한 돌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피로 물든 팔과 다리를 움켜쥐고 힘겹게 일어난 그의 앞에는 적어도 10구는 될 동부 투창병들의 시체가 산산조각난 채 뒹굴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잔뜩 겁을 먹은 동부 병사들이 제대로 공격을 못한 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적들이 거의 쇄도해 왔습니다! 병력이 부족합니다!”
서쪽 성벽을 지키던 제대장이 팔을 내저으며 악을 썼다. 하지만 죽거나 다친 병사를 대신해 2선에서 투입되어야 할 예비 병력이 전혀 없었다.
“아악!”
문득 고개를 든 타슈카는 성벽에 매달린 적병이 밑에서 뻗어온 낫에 목이 엉키며 밑으로 끌려 추락하는 수비병의 모습을 똑똑히 보아야만 했다. 추락하는 병사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는 어딘가에 계속해 부딪치는 충격음과 함께 조금씩 멀어져갔다.
“제기랄! 시체를 빨리 치워! 부상자도 자리를 지켜라! 죽어도 거기서 죽으란 말이다!”
도끼를 치켜든 타슈카가 방금 떨어진 병사의 자리로 허둥지둥 달려들었다. 그리고 막 위로 기어오르던 남부병사의 관자놀이에 그의 타바진 도끼날을 꽝 소리와 함께 힘껏 박아 넣었다. 성벽에 거의 오를 뻔 했던 그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멀어져갔다.
“투창병이다!”
문득 밑을 내려다본 타슈카는 순간 재빨리 몸을 감추어야만 했다. 큰 방패와 퀴버를 지고 중장보병들에 뒤이어 절벽에 오른 연합군 투창병들이 절벽 중간의 제법 평평한 곳에 서서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재빨리 준비를 마치는 정연한 자세로 보아, 동맹군의 햇병아리 동부 투창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예병들이었다.
“발사!”
지휘관이 손짓과 함께 그들이 1천여 발의 투창을 일제히 공중으로 날렸다. 컴컴한 밤하늘 어디에서 적의 사격이 쏟아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쉬잇 하는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온다!”
예민한 가디언들의 고함에 보병들이 일제히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투창들은 마치 강력한 폭풍우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미처 몸을 숨길 수 없었던 병사와, 운 없는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정거리가 가장 긴 경투창입니다! 공성을 위해 따로 만든 것 같습니다!”
부장이 방패에 박힌 짤막한 투창을 뽑아 내밀었다. 급소에 맞지 않는 한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운 무기였지만 수비병들에게 작은 부상을 입히거나 전투불능으로 만들기는 충분했다. 이런 사격이 미처 정신차릴 새도 없이 수비병들을 노리고 계속 쏟아졌다. 남부제후군다운 어마어마한 물량공세였다.
“서쪽! 뚫린 곳을 빨리 막으란 말이야!”
조금 전 발리스타에 무너진 성벽 한구석을 향해 적들이 벌떼처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숨길 곳을 잃은 그곳의 병사들은 적들의 사격에 계속 쓰러져갔다.
“여기! 여기! 이거로라도 막아!”
2선에 있던 부상병들 중 다리가 비교적 성한 수십 명이 조금 전 무너진 크레인의 철판 파편을 몸으로 힘껏 밀어 가기 시작했다. 쇠가 긁히며 울리는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넓적한 파편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밀어갔다. 성벽의 무너진 구멍에 가까워지자 펑펑 소리와 함께 투창 명중하는 소리와 진동이 그 육중한 파편을 밀고 가는 부상병들의 어깨를 때렸다.
“엄호사격! 엄호사격! 성벽을 막을 동안 계속 쏘란 말이다!”
동부 투창병 지휘관들이 겁먹은 병사들을 마구 발로 걷어차며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무너졌던 성벽을 임시변통으로나마 막은 수비병들은 적에게 들으라는 듯 일제히 큰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기쁨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중대장님! 중앙성이 어렵습니다! 중앙성을 지키는 11중대가 곧 무너질 것 같습니다!”
부장의 고함소리에 타슈카가 동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스코프를 작동시켰다. 철퇴를 든 웬 거구의 가디언을 선두로, 근위대 가디언들을 앞세운 남부 병사들이 중앙성 성벽 한쪽의 무너진 곳으로 마구 난입하고 있었다. 서성과 중앙성, 두 군데에서 벌어지던 공성전 중 한쪽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맙소사.”
타슈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구름다리에 이어 중앙성마저 넘어간다면 그가 있는 서성은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이는 셈이었다. 그리고 저곳에 있는 댐의 통제장치 또한 저들 손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의 직속상관이며, 댐의 수비를 총괄하고 있는 대대장 또한 저곳에 있었다.
‘이.......이걸로 끝인가.......’
그는 성한 병사와 부상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성벽에 매달려 필사의 저항을 하고 있는 자신의 중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적들이 중앙성을 차지하면 바로 우리 측면을 쳐올 겁니다.”
부장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중앙성이 아직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11중대가 살아서 버티어주는 새에 우리 중대는 잘만 하면 동성으로 퇴각할 수도.......”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아무 말도 없던 타슈카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닥쳐라.”
“하지만.......”
“적들이 댐을 차지해도 우리가 서성을 계속 막고 있는 한은 적 3군은 남진하기 어렵다!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곧 지원군이 올 것이다!”
타슈카가 눈썹에 엉겨붙은 덩어리피를 털어내며 휘하 무장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암성에서의 지원군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그들 무장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이미 끊겼고, 호수는 이미 적들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타슈카는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께선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보병 4제대는 댐 위에 방벽을 쌓아라! 중앙성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곳을 지킨다! 아무 거나 좋으니까 다 가져다가 방벽을 쌓아! 투창병 1제대는 요새 위에 미리 올라가 대기하고! 빨리! 빨리!”
타슈카의 명령을 받은 4제대 120여명의 병사들은 서성과 중앙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요새 앞에 굵은 사슬을 치고 마름쇠와 부비트랩 등을 정신없이 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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