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17화 (416/1,132)

< -- 417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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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놈들 같으니.”

중앙성과 그에 달린 댐 통제소를 어렵게 차지한 아리엘은 피투성이가 된 프레일을 쓰러진 적장의 망토에 대강 닦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 이 통제소를 사수하던 대대장은 그의 가디언 팔찌를 빤히 보면서도 악을 쓰며 창을 내질러올 정도로 용감한, 아니 멍청한 자였다.

“이년 여섯 토막 내서 성벽에 걸어.”

아리엘은 뒤따라 들어온 남부 병사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죽은 용감한 적 무장에게 최소한의 존경을 보일 정도로 예의를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저건 또 뭐야?”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아리엘이 고함을 꽥 질렀다. 중앙성이 완전히 유린당하면서 이곳에서 밀려난 11중대 패잔병들이 서성으로 허둥지둥 퇴각하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아직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 동성(東城)으로 퇴각하는 것이 훨씬 안전할 듯 보였지만, 저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듯, 하나같이 서성으로만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씨발! 도망치는 놈들까지 남김없이 다 죽여! 남겨두면 다 화근이 된단 말이다!”

아리엘이 통제소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남부 병사들에게 호통치듯 외쳤다. 서성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앙성 패잔병은 어림잡아 3백은 족히 넘어보였다. 저들이 서성의 수비대에 합류한다면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서성 공격이 더 어려워질 터였다.

“중앙성은 끝났으니까 서성 측면을 공격해! 서성만 빼앗으면 진격로가 뚫린다! 다 죽어도 좋으니까 서성만 빼앗으란 말이야!”

아리엘은 아직 성벽조차 돌파하지 못한 서성 공격군의 모습을 답답한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구름다리를 끊고 중앙성도 빼앗았으니 댐의 통제권은 일단 장악했지만, 강안을 틀어막고 있는 서성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3군 본대가 남하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터였다.

게다가 중앙성에서 도주한 병사들이 서성의 수비병에 더해진다면 그것 역시 골칫거리였다.

“서성! 서성만 차지하면 끝난다!”

중앙성을 차지한 후 급히 전열을 재정비한 남부연합군 보병 5백여명은 댐 건너편에 있는 서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댐의 구조 자체가 문제였다. 이암댐은 높이만 1.4스타디아에 달하는 거대한 댐이었지만 그 상부의 폭은 고작해야 50명이 횡대로 나란히 서면 꽉 찰 100척(30m)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북쪽으로는 이암호 물이, 반대편인 남쪽으로도 까마득하게 기운 댐 구조물 때문에 따로 돌아갈 곳이 없어 수비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게다가 그런 댐 위, 서성과 중앙성 사이에는 15척(4.5m) 정도 높이의 작은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그 작은 요새에 서성을 지키던 9중대 병사 120여명, 그리고 방금 중앙성에서 퇴각한 11중대 패잔병들이 합류해 2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거 저 새끼들 제법인데.”

아리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 정도면 적들이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들 법도 했지만 적의 저항은 중앙성을 빼앗기고도 여전히 완강했다. 하임달에서 바로 저 북부놈들에게 겪었던 그 끔찍한 기억을 잠시 떠올렸던 아리엘은 괜히 소리를 내지르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빌어먹을! 진격 안 하고 뭐해! 이 새끼들아!”

“대대장님 수급이 방금 중앙성 성벽에 걸렸어.”

11중대장이 가져온 직속상관의 전사소식에도 타슈카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중앙성이 있는 동쪽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린 채 북쪽 절벽을 타고 계속 몰려올라오는 남부연합군 본대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저항하면 모두 사지를 찢어죽이겠다고 함께 적어 걸었군.”

“잘됐군. 사지가 찢겨 죽느니 싸우다 죽는 게 낫지.”

타슈카는 더러워진 투구를 도끼로 툭툭 털어 다시 눌러쓰며 이 소식을 가져온 11중대장의 얼굴을 문득 돌아보았다.

“왜 안전한 동성으로 퇴각하지 않고 위험한 이곳으로 병사들을 데려왔지?”

“이쪽에 더 필요할 것 같아서.”

타슈카의 물음에 그 중대장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북부인다운 부리부리한 눈과 다부지고 큰 체구, 단단하게 각진 턱을 한 그 여자 무장은 입술을 꽉 깨물며 상관의 머리가 걸려있는 중앙성을 다시 돌아보았다.

타슈카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말했다.

“고맙다. 베레트라.”

그 두 중대장 모두 이 정도가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서성을 끝까지 사수한 9중대장 타슈카와, 안전한 동성을 놔두고 적들의 포위망 안으로 제 발로 뛰어 들어온 11중대장 베레트라는 서로의 더러워진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하임달,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까지 함께했던 동료의 얼굴에는 서로에 대한 묘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중앙성을 차지한 적들이 동측면에서도 쳐 옵니다! 어떡할까요?”

부장 한 명이 이 둘에게 달려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베레트라가 타슈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선임이니 이제 새 대대장이군. 명령을 줘. 어떡할까?”

베레트라가 타슈카에게 형식적인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전투 해머를 뽑아 쥐고는 그곳에 묻은 피얼룩과 살점을 신발 굽에 툭툭 털어냈다.

“우라질, 축하해 줘야 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네 차지일 테니 축하 따위는 필요 없어. 네 중대원들로 동쪽을 지켜 줘. 부탁한다. 베레트라.”

“이따 보세. 볼 수 있다면.”

베레트라는 타슈카에게 간단한 눈인사만을 던지고는 바로 동쪽으로 달려갔다.

서성으로 통하는 요새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진격하는 남부연합군을 제일 먼저 맞아준 건 바닥에 고정된 굵은 사슬과 와이어, 부비트랩이었다. 발이 찔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와이어와 장애물에 걸린 병사들이 바닥에 계속해 넘어지면서 진격이 지체되었고, 동맹군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요새 위에 그새 빽빽하게 자리잡은 동맹군 투창병들이 엉거주춤하게 느릿느릿 진격하는 남부연합군 병사들의 머리 위로 하늘을 새카맣게 덮으며 투창을 쏟아 부었다.

동맹군 투창병의 숫자가 많은 건 결코 아니었지만 진격로 자체가 워낙에 좁은지라 이곳을 타고 밀집해 나아가는 남부 병사들은 투창병에게 너무도 손쉬운 표적이 되어줄 수밖에 없었다.

“템포를 두지 말고 무작위로 사격한다! 적 선두병에 집착하지 말고 전위 10열에서 가장 밀집한 곳만 골라 타격해라!”

댐 위의 전투를 맡은 베레트라가 손에 든 전투해머를 내저으며 투창병들에게 사격 위치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발리스타! 너희는 기다렸다가 동시 사격해서 적 전열을 한 번에 무너뜨려라!”

베레트라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요새 위의 서부 사역병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무려 4대의 대 보병용 발리스타가 한발한발 접근해오는 남부 보병진을 향해 직사로 겨누어졌다.

“피해!”

발리스타가 자신들을 겨눈 순간, 남부의 고참병들이 재빨리 소리를 질렀지만 좌우로 피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발사!”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듯, 펑 소리를 울리며 4발의 육중한 발리스타가 정면을 향해 직사로 격발되었다. 넓적한 날을 단 거대한 발리스타는 밀집진으로 다가오는 남부제후군의 다리, 혹은 허리를 겨누고 땅을 스치는 소름끼치는 진동을 뿜으며 날아왔다. 몇몇 잽싼 병사들이 몸을 날려 피했지만 다른 병사들은 그 위력적인 일격에 기껏해야 방패를 치켜든 것이 고작이었다.

“아아악!”

1선에서 나아가던 남부보병 수십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거나 몸 어딘가가 찢겨 옆으로 튕겨났다. 그들의 방패와 갑주와 몸을 산산조각낸 발리스타는 그 뒤, 또 그 뒷사람까지도 무참하게 꿰뚫으며 견고한 남부보병 1선을 마치 갈대밭처럼 우수수 쓸어 넘겼다.

“아악! 씨발! 다 죽잖아! 썅!”

그나마 목숨을 건진 몇몇 병사들이 바닥을 뒹굴며 악을 쓰는 욕지거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터져나온 전우들이 바닥을 두들기며 몸부림을 치는 광경에 그 뒤에서 나아가던 남부 병사들은 순간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적병은 맞붙어 싸워볼 수도, 투창은 방패로 막아볼 수도 있지만 이 무시무시한 중량병기는 그들로서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투창! 또 날아든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도 동부 투창병들의 쉴틈없는 사격은 계속 쏟아졌다.

“나가! 나가!”

지휘관들의 재촉에도 무서운 겁먹은 보병들은 함부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제기랄.”

겁먹은 남부 보병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아리엘이 답답한 듯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이 좁은 댐 위를 거쳐 적의 요새에 병사들을 쏟아 붓는 건 의미없는 병력의 낭비일 뿐이었다.

“서성쪽 공략은 좀 어떻습니까.”

아리엘은 서성 북쪽 절벽을 공격중인 마누엘 경을 연결해 물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만 보아도 상황이 어떤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되겠는데. 저항이 너무 심해.”

그는 아직까지도 병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필사의 접근을 감행하고 있는 서성 북쪽 벽을 보여주며 입을 삐죽거렸다. 공격 초반, 잠시 적에게 위협을 주기는 했지만 중앙성에서 막 퇴각한 4백여의 11중대 병사들이 서성에 수비병으로 투입되면서 상황이 점점 더 어려지고 있었다.

“어쨌든 목적했던 대로 중앙성과 댐의 통제권은 차지했으니 일단 이번 공격은 접어야겠다. 모두 공격 중지하고 퇴각해. 아리엘 자네는 중앙성을 맡아 지켜주게. 이쪽은 우리 남부가 계속 공격할 테니.”

결국 결정을 내린 마누엘이 아리엘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리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팔수가 울리는 유난히 낮은 음조의 퇴각 나팔은 이 끔찍한 절벽을 눈앞에 두고 벌벌 떨며 기다리던 남부 병사들에게도, 필사적으로 성벽을 지키던 동맹군 병사들에게도 몇 시간, 길면 하루 정도의 삶이 더 연장되었다는 반가운 신호음이었다.

절벽에 이미 매달렸던 병사들과, 만신창이가 되어 절벽 중간쯤에서 신음하던 부상병들까지 차례대로 지상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서성 위에서 산을 뒤흔들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저 새끼들 저것도 이겼다고 지랄인감.”

케세크는 서성 위에서 무기를 치켜들며 환호성을 지르는 동맹군 병사들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의 비웃음은 당연했다. 목줄인 구름다리와 중앙성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동맹군이 거둔 성공이라고는 저 조그마한 서성을 지켜냈다는 것 단 하나였다.

“내일이면 저 위에 우리가 설 테니 걱정 말게나. 오늘은 병사들이나 푹 쉬게 해.”

마누엘 경은 동쪽 하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새벽 여명을 쳐다보며 오랜만에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경보병 2천 정도를 더 뽑아서 서성 남쪽으로 넘어가게 해. 적 지원군이나 보급품이 도착 못하게 서성의 남쪽 봉쇄도 더 강화하도록 해. 이렇게 조금 끌다보면 결국 제풀에 떨어질 테니.”

“예, 알겠습니다.”

“여기! 여기!”

이암호의 깊은 물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자이납은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호숫가 모래톱에 맥없이 드러누운 그의 눈에 까마득하게 높은 구조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웬 거구가 온몸을 거칠게 떨며 마찬가지로 쓰러져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 둘의 젖은 몸을 매섭게 파고들어왔다.

“네피 대장군님! 대장군님!”

북부 억양이 섞인 거친 고함소리가 물이 잔뜩 들어가 웅웅거리는 자이납의 귀에는 마치 천상의 부름처럼 들려왔다.

“살아계신 겁니까!”

호들갑을 떨며 둘에게 다가온 건 이암성 본성에 주둔하던 동맹군 보병들이었다.

“의무병 불러! 빨리! 대장군님이 중상이시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자이납은 쓰러져있는 네피의 눈동자를 조심스레 확인했다.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는 것은 같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이었다.

“네피 대장이 위급해! 빨리! 빨리 좀 오란 말이야!”

초소에서 허둥지둥 달려나온 의무병에게 자이납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흥분한 자이납에게 의무병이 조용히 하라며 손짓했다.

“카메네이 비장님, 몸을 좀 보십시오.”

“나?”

생각없이 머리를 더듬던 자이납은 무언가 끈적한 느낌에 지레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그의 뒤통수부터 눈가까지 완전히 찢어져 속살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다리 상판이 떨어지면서 무언가 아찔한 느낌을 받았던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맙소사.”

순간 머리를 아찔하게 할 정도로 강타하는 매서운 통증을 느낀 자이납은 뒤에 있던 병사의 가슴에 갑자기 축 늘어졌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진득한 피가 목을 거쳐 어깨까지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병사들이 네피를 실은 들것을 들고 먼저 이암성 안으로 사라져갔다.

“네피, 네피 대장은?”

“요추와 경추가 상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러진 건지, 그냥 어긋난 건지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다 나 때문이야.......다 나 때문이야........”

들것에 실려지며 자이납이 탄식을 내뱉었다. 네피는 이곳 단지를 방어하는 총 책임자였고, 가디언과 보병 지휘에 있어서는 카렐 휘하에서 가장 믿음직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네피가 쓰러진 것이었다.

“댐, 댐은?”

자이납이 들것을 든 병사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보십시오.”

병사가 새벽의 남색빛 여명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댐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이납이 문득 돌아본 댐 위, 3개의 부속성 중 서성과 동성 위에는 아직까지도 동맹군의 검은빛 황룡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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