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9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르마즈와 네페티가 강제로 파혼을 당하고 3년 가까이 지난 기원 164년에도 제국은 노예폭동과 서부의 내분으로 여전히 어수선했다.
서부제후들이 적을 코앞에 둔 채로 벌이는 제살 깎아먹기는 최고제후 네페티 발 플레렌 공을 남부최고제후 테번 공에게 강제로 보내버린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네페티의 강제결혼을 주도한 칼림 플레렌은 일단 가문의 실권은 잡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키고 최고제후를 남부에 팔아넘긴 그에 대한 내외의 격렬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세호 가에서는 도덕성과 체계마저도 상실한 플레렌 가를 최고제후가로 인정할 수 없다며 폭탄선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틈타 새로이 권력을 잡으려는 다른 원로들까지 칼림을 비난하고 나서면서 최고제후가 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게 연고 하나 없는 남부에 사실상 유폐된 네페티가 베흔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어찌보면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늙은 약혼자 테번, 그리고 그와의 친분으로 자주 들락거리던 베흔이 전부였다. 네페티는 오르마즈가 있는 북부로 보내주겠다는 베흔의 말에 속아 결국 그와 원치 않는 잠자리까지 해 주었지만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164년, 베흔을 이용해서라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보려던 네페티의 마지막 희망은 강제로 치른 결혼식과 함께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제후들이 진흙탕 싸움에 열중하는 동안 투모카프 자이센이 이끄는 폭도 진압군 ‘카마크 노예군단’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다.
리블로스의 회전으로 테나토의 폭도들을 모두 진압한 그는 164년, 1만여 노예군들을 이끌고 아켐으로 이동해 ‘가족의 원수’ 코나 시디크의 3만 5천의 폭도 본대와 사막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가족들을 몰살시킨 코나 시디크에 대한 투모카프의 광적인 분노는 이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그는 황제가 보내 준 5백여 기병들을 직접 이끌고 노예군 본대에 대대적인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지금껏 제대로 된 기병들과 싸워 본 일은 전무하다시피 한 그 오합지졸들은 겨우 5백에 불과한 기병들의 돌격에 혼비백산하며 진형을 무너뜨리고 흩어져 버렸다.
제수스에 이어 폭도들의 지도자가 된 코나 시디크는 치밀함과 집요함에 있어서는 전임자인 제수스보다도 훨씬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런 만큼, 이런 상황을 대비해 군 경험이 있는 정예병들로 반격을 가해 카마크 군단 노예병의 절반을 쓰러뜨리며 나름대로 분전을 했다.
하지만 승전보다는 약탈에 눈먼 대다수의 하층민출신 잡병들은 지휘관의 이런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리고 투모카프가 이끄는 기병들의 말굽에 학살당하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렇게 노예군 본대를 무너뜨린 투모카프와 ‘카마크 군단’은 폭도들의 가족 14만여명이 살던 난민촌까지 그대로 습격했다. 약탈물과 피에 굶주린 카마크의 노예병들은 이곳에서 무려 이틀간이나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고, 이들은 ‘합법적인 무법자’로서의 방종을 맘껏 발휘했다. 그리고 원수인 코나 시디크를 코앞에서 놓치고 격분한 투모카프 역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 난민촌에는 공식적으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운 좋게 도주한 몇 명쯤이 있었는지는 하늘만이 알 터였다.
제국 역사에 선례가 없던 이 대규모 학살극 이후, 그들이 살던 난민촌 옆 오아시스에는 물보다 피가 더 많이 고여 ‘블러드 오아시스’라는 기분나쁜 오명까지 얻게 되었고, 그 이름은 이 학살극을 주도한 투모카프, 그리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이센 가 후손들의 별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제국 서부와 남부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3차 혼란기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예 폭동을 진압한 지휘관 투모카프에게는 4품의 황실 장군직이 전격적으로 주어졌고 그 휘하의 직속 무장들에게도 모두 황실군 장교에 해당하는 직책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황제의 이런 파격적인 조치가 투모카프를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큰 영광이었지만, 똑같이 노예로 시작해 기껏해야 면천을 바라고 모여든 그 휘하의 노예병들과는 묘한 거리감을 낳게 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게 말하고 싶은 게 뭐냐.”
술잔을 쥐고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투모카프는 갑자기 자신에게 면회를 청해 온 노예병 ‘대표’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투모카프의 족히 두 배는 될 어마어마한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뜬 그 ‘대표’는 그들 사이의 그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최강자로 올라선 녀석답게 군단장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폭도들의 본대를 쳐부수면서 우리 임무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끝나? 적 우두머리인 코나 시디크도 잡지 못했으면서?”
투모카프가 이를 빠드득 갈며 되물었다.
“아켐에서 네놈들이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리지만 않았다면 그년을 열 번도 더 잡았어. 코앞에서 폭도 지휘부 놈들을 놓친 주제에 네 무슨 낯짝으로 큰소리를 치는 거냐?”
“어쨌든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약탈을 미끼로 광적으로 싸우게 하는 건 원래 이전부터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당장 우리를 이 감옥같은 병영에서 풀어주시오. 이제 이런 사막 생활은 진절머리난단 말입니다! 그리고 당초 약속한 것보다 2배나 더 복무했으니 보상금도 2배로 주십시오.”
“너흰 당초 약속에도 없던 약탈도 실컷 했어.”
투모카프가 키득거리며 그자의 목에 걸린 바싹 마른 남자 성기를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느라 우리 동료가 절반이나 죽었다는 것도 모르는 겁니까!”
그자가 투모카프의 얼굴만한 주먹으로 탁자를 꽝 내리치며 마치 협박하듯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비슷한 수법이 저자의 경쟁자들에게는 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앉은 이 차가운 피의 사내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5천이나 죽었으면 산 너희들 몫은 두 배로 늘어났을 것 아닌가?”
투모카프가 히죽거리며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마치 이 불평분자와의 말싸움을 내심 즐기는 듯 줄곧 싱글거리고 있었다. 투모카프의 대꾸에 그자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왜? 네놈들에게도 ‘전우애’라는 거라도 있는 거냐? 아니면, 2배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냐? 더 죽여주랴?”
“이 새끼가, 주제에 지휘관이라고 말 다 들어줬더니!”
그자가 대뜸 탁자를 뒤집어엎으며 투모카프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뭐야!”
회의실에 둘러선 투모카프의 직속 장교들이 일제히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무어라 더 악을 쓰려던 그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투모카프의 예리한 단검 끝이 그의 귀 밑에 살짝 닿아있었다.
“주제에 대표라고 말을 좀 들어주려 했더니만.”
투모카프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그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는 벌벌 떨고 있던 거한의 목에서 단검을 치우며 나가보라 손짓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더 떠들다가 내 혈압이 더 올라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모르니까.”
구사일생한 그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귀 밑을 더듬으며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갔다.
“장군님, 저자를 놔 줘도 되는 겁니까? 부대 기강을 위해서도 저런 자는.......”
막사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불만스럽게 지켜보던 부장이 투모카프에게 말했다. 빈 잔에 술을 다시 담던 투모카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기강? 이 빌어먹을 부대에 기강이라는 것도 있었던가?”
“예?”
“이제 이 쓰레기 집단도 쓸모가 다한 건가. 하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알았지. 하지만 코나 시디크 그놈은 잡았어야 되는데.”
투모카프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난 3년여간의 훈련과 전투를 거치면서, 마치 전국시대같던 신디케이트에서의 주도권 경쟁도 이제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 2년여간의 치열한 암투 끝에 저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질서가 잡혔고, 그렇게 기존 헤게모니가 굳건해지면서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자 과욕을 부리는 자들도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저들의 지도력이 집중되면서, 저들의 주도권 싸움 사이에서의 조정자 역할을 무기로 부대를 움직여오던 투모카프의 입지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부대의 변모하는 모습을 살피며, 이들에게 주어질 ‘수명’이 어느 정도일까를 가늠하고 있던 투모카프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병사들을 생매장시키던 이전 같았으면 병사 대표라는 작자가 감히 군단장인 나를 대면하겠다고 쫓아오는 일이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
“저 새끼들 조만간 내 목을 따겠다고 밤중에 창문을 넘어올지도 모르지.”
투모카프가 단검을 다시 허리에 꽂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할룩스를 집어들며 직속 장교들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자네들 가족들은 내 명령대로 모두 영외에 있지?”
무언가 심각한 일을 예감한 장교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다.”
다음날 저녁, 군단장 투모카프의 특명으로 ‘내일이면 모두 제대하게 되니 짐을 꾸려라.’는 특별한 명령이 내려졌다. 보상금을 2배로 달라는 그들의 요구도 일단 약속된 만큼을 1차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정착할 때 주택보조금으로 지급한다는, 일단 그럭저럭 받아들일만한 정도로 수정되었다. 물론 그들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모두 수용했다가는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투모카프의 계산이 숨어있었다.
3년간의 전쟁에서 얻은 약탈물과 보상금을 갖고 당당한 자유민이 되어 가족들에게 금의환향할 기대에 부푼 노예병들은 경계초소도 모두 철수한 채 병영 곳곳에 모여 술과 파티의 광란에 열중하고 있었다.
병영에서 느닷없이 큰 불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부대 외곽 펜스에서 먼저 솟아오른 큰 불은 허름한 목조 가건물들로 빽빽하게 지어있던 이 노예병들의 막사와 연병장을 무서운 속도로 조여들어갔다. 노예병들 중 몇몇은 숙영지를 인수인계받기 위해 이곳에 와 있던 근위대 선발대 병사들이 그새 모두 사라진 것을 발견했지만 이미 상황은 결정되어 있었다. 바로 이틀 전 과할만큼 많이 지급받은 난방용 연료통이 사방에서 터져 올랐고, 술에 잔뜩 취한 채 혼비백산한 그들 중 불을 피해 도망칠 정도의 정신을 지닌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불붙은 펜스를 뛰어넘어 밖으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이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부대를 완전히 포위한 채 이 불꽃놀이를 말없이 구경하고 있던 근위대 파견군 병사들의 집중사격이었다.
“젠장! 근위대들이야! 근위대가 밖에 있어!”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죽는 동료들을 보며 그들은 불 속에서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그들 사이에서 ‘리더’로 있던 자건, 제일 밑바닥에서 약탈물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약자이건, 절대권력과 죽음 앞에서는 모두 한 명의 ‘노예병’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군단장님은! 군단장님은 어디 계시냐고!”
비명과 열기, 검은 연기와 타들어가는 시체로 온통 아수라장이 된 병영 곳곳에서 장교들과 군단장을 찾는 고함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들의 군단장은 지금 그들의 곁에 없었다.
“어차피 저런 놈들 나가 봤자 제대로 사람 노릇이나 하겠는가.”
근위대 파견군을 이끌고 온 쿠베와 함께 병영 밖 언덕 위에 서 있던 투모카프는 부하들의 목숨과 함께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지켜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근위대 내에서도 모진 성격으로 유명한 쿠베였지만 비명과 함께 타 죽어가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 남자의 모습에 내심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내일 새벽 정도면 다 탈 테니 그때 들어가 남김없이 확인사살하게나. 단 한 놈도 남겨선 안 돼.”
“.......알겠습니다.”
쿠베가 짐짓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저놈들의 가족은 면천되는 겁니까?”
“폐하의 은총이지.”
투모카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제국의 새로운 시민으로 폐하의 은혜에 감복하며 살아가지 않겠는가. 저런 인간쓰레기들 때문에 같이 구렁텅이에 몰려드는 일 없이 말이야.”
5천의 카마크 부대원들이 몰살당한 ‘아켐에서의 참극’은 군단장 투모카프의 출타를 틈타 야습을 감행해 온 코나 시디크의 잔여병력과 이들과의 처절한 사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단 3년간만 존재했던 이 전무후무한 노예부대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저항했고, 이들의 ‘마지막 전투’는 황실군을 대표하는 용맹함의 상징으로 황궁 1층 벽, ‘영광의 전당’에 조각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이들, 그리고 먼저 전사한 노예병의 식솔 모두를 면천시켜주었고, 미리 약속한 보상금은 물론이고 그들 모두에게 ‘유공 유가족’으로 등재시켜주는 은혜까지 베풀었다.
이후 이 참극을 둘러싼 이런저런 잡음과 소문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면천시켜 준 그 영광스런 죽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이런 소문과 주장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 이들 ‘유공 유가족’들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자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수만의 ‘시민’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 공훈을 인정받은 투모카프 자이센 군단장은 3품 장관급에 해당하는 황제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되어 이제 당당한 한 명의 진짜 공직자 신분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