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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20화 (419/1,132)

< -- 420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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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성을 지키는 타슈카와 베레트라에게는 조금씩 깔리는 짙은 어둠이 마치 죽음의 그림자처럼 느껴져왔다. 그리고 서성의 성벽을 지키는 1천여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물론 그 중에 3분의 1 정도는 몸이 성치 못했지만 사지가 잘려나간 정도의 중상자가 아니라면 감히 부상자 행세조차 하지 못할 참담한 상황이었다.

낮에도 간간히 적들의 소규모 기습이 있기는 했지만 이쪽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려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느닷없이 날아든 발리스타에 성벽 한쪽이 또다시 무너지면서, 그곳에 기대 잠들었던 병사 3명이 졸지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렇게 즉사한 전우의 시체를 바라보며 병사들은 차라리 부럽다고 넋두리까지 늘어놓았다. 적군을 마주하며 공포에 떨거나, 뼈와 살점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고통도 없이, 꿀 같은 잠에서 바로 죽음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으니.

“지원군이 올까?”

벌써 몇 시간째 강의 남쪽 수평선만 쳐다보고 있던 타슈카가 마치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호수를 적들에게 장악당하면서 본성에서의 지원군은 이미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황궁에서 욱리하를 통해 지원군과 보급품을 보내주는 것이었지만 에너지장벽으로 모든 통신이 두절되면서 지원군이 올지, 안 올지, 아니면 황실에서 아예 이곳을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마 수위가 낮아져서 배가 못 올라오는 건 아니겠지?”

오늘도 하루 종일 이런저런 쓸데없는 걱정에 잠겨있던 타슈카가 굳게 닫힌 수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카렐의 계획대로라면 내일쯤 수문을 열고 방류를 시작해 적들의 도하를 막아야 했지만 중앙성을 차지한 적들은 자기네 1군이 강을 건너고 부교를 안전하게 설치할 때까지는 저 수문을 열 리가 없었다.

“그쪽보다는 이쪽 손님이 먼저 오실 것 같은데.”

북쪽의 적군 병영을 쳐다보던 베레트라는 들고 있던 창날을 쓱쓱 갈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런 그의 말에 화답하듯, 절벽 아래 남부연합군 병영에서 날카로운 나팔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젠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타슈카와 베레트라는 바닥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병사들을 깨우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일어나! 적의 공격이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 두 명의 역할을 대신해주듯, 적군이 날린 거대한 발리스타가 귀청을 찢는 마찰음을 울리며 성벽 한구석을 때렸다. 순간, 잠들어있던 병사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성벽에 머리를 내밀었다. 적병들이 어제처럼 다시 절벽 밑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서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이틀째의 공격을 지켜보며 케세크 경이 잔뜩 불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2천여명의 병력을 산을 통해 우회시켜 서성의 남북에서 함께 치고 있었지만 결과는 새벽의 첫 번째 공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남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절벽을 기어올랐고, 동맹군 병사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성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젠 어쩌죠?”

“이건 아냐. 아냐.”

마누엘 경이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들이 기대한 건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이렇게 두 번째 공세를 가하면 적들이 겁을 먹고 먼저 항복하거나, 최소한 저희들끼리 내분이라도 벌이는 것이었지만 저렇게 거세게 저항하는 적들의 모습을 보아서는 둘 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쳤군. 저 위에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자기네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마누엘은 호수 건너 이암성 본성을 문득 돌아보았다. 저곳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있을 적 본대 1만도 서성을 도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10만에 가까운 연합군 3군 본대에 감히 후방 공격을 가하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의 서성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누엘이 함께 선 사역병단 장교에게 물었다.

“쳇, 남쪽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는?”

“조금 험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늘 투입된 사역병단이 나무는 모두 밀어냈습니다. 보병과 기병, 소형 차량은 어렵지만 일단 통과는 할 수 있습니다. 한 이틀 정도만 더 작업하면 대형차량도 통과 가능한 임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거 시간도 없는데 저놈의 코딱지만한 성에 계속 붙들려 있을 수도 없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병사의 끔찍한 모습에 마누엘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제롬의 1군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그도 점점 초조해하고 있었다.

“1군에서 이그나토 가 병력 2만이 떨어져나갔고, 주류성 견제군 2만이 또 떨어져 나갔어. 처음 시작할 때의 1군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주류성 공격에 실패하면서 2군 기병들이 흥안령 북쪽을 빙 돌아서 우리보다도 늦게 도착할 형편이란 말이야. 제롬이 머리가 돌지 않았다면 그 상태에서는 절대 단독으로 도하 못해.”

마누엘이 숙영지 절반을 꽉 채우고 세워져 있는 수백 대의 차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재들이 보충되지 않으면 부교를 놓을 수가 없잖아. 병사들은 어찌저찌 건넌다고 해도 다리를 못 놓으면 보급로가 막히는데 병사들 다 굶겨 죽일 거야?”

“하긴, 그렇군요.”

케세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욱리하 자체가 워낙에 깊고 폭이 넓은 강이다 보니 임시 교량을 건설하는 자재만도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1군과 3군이 자재를 반반씩 나누어 옮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케세크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입을 물었다.

“우리라도 일찍 내려가서 1군과 합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일단 댐은 제압했고, 우회로도 뚫었으니 아리엘 녀석한테 2만 정도 줘서 여길 맡겨두고 주력군과 경차량만 일단 남하하는 게 좋겠습니다. 중차량은 임도가 완전히 뚫리는 대로 후발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지지부진한 공성전에 잔뜩 조바심을 내고 있던 마누엘은 케세크의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함께 선 사역병단 장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임도 공사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도록 해. 8군단을 여기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은 일단 남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진격에 조바심이 난 이들은 결국 ‘일부를 남겨 견제해두고 계속 진격’이라는, 1군이 한 것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카렐의 예상대로, 연합군 병력은 진격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추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별궁의 창가 침대에 누워있던 구르베스가 수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 다음날 주류성에 갔을 때 술을 많이 먹었는데 영 걱정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 따위는 입에 대지 않는 거였는데.......어쩌죠? 아이한테 무슨 영향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 말라니까. 내 그래서 주치의한테 특별히 정밀검사까지 시켰으니까. 의사 말이 그때는 착상도 안 됐을 때니까 알콜이 들어갔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지 뭐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아이가 안전하게 자리잡을 때까지는 꼼짝 말고 누워만 있어요, 황비.”

수우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는 언제 구해왔는지, 임신과 태교에 관한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의 이런 성급한 호들갑에 구르베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습니다, 폐하.”

수우의 그 흐릿하고 맥없던 눈동자도 자신의 아이가 수태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놀랄 만큼 반짝이기 시작했고, 그의 말투에도 전보다 한결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버지답게 행동해야지.”

수우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이미 수십 번은 만지고 또 만졌을 구르베스의 아랫배를 더듬으며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이 안에 있는 감이 벌써부터 온다니까.”

수우의 주책에 구르베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폐하, 아직 그런 느낌이 올 때가 아닙니다. 아이는 아직 1개월도 안 됐고.......”

“내 감은 틀림없다니까 그러기요. 이 안에서 내 아이가 틀림없이 느껴진다니까.”

“폐하, 주치의입니다.”

비서관의 목소리에 수우는 그제야 구르베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가에 서 있던 주치의는 무슨 이유엔지 구르베스의 침대에 다가오지 않은 채 잠시 머뭇거리기만 했다. 수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가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수우의 물음에 주치의는 침대에 있는 구르베스의 눈치를 다시 살폈다. 사실 ‘주치의’라고는 했지만 수우의 원래 주치의는 황궁을 빼앗기면서 그곳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동맹군에게 붙잡혀 버렸고, 지금 주치의는 이곳 2번 도시에서 급히 구한 옛 내의원 출신 의사였다. 크지 않은 키에 유달리 뚱뚱한 몸매를 한 그 인상 좋은 의사는 수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하신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폐하.”

의사의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수우 역시 당혹스런 얼굴로 그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 혈액검사 결과는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황비 전하의 건강상태도 아주 좋습니다. 한동안 몸 관리에만 힘쓰시면 초기유산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건데?”

수우가 따지듯 물었다.

“그게.......황비 전하의 혈액에서 이상한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이상한 성분?”

수우는 조금 놀란 듯 침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구르베스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치의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말했다.

“배란유도제를 안 드셨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압니다.”

“그래. 하지만 그거 없이도 드물게 임신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긴 합니다만.......황비 전하의 혈액에서 배란유도제 성분이 미약하나마 검출되었습니다.”

“엥?

‘배란유도제’라는 말에 수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아이가 유도제 없이 드물게 태어나는, 말 그대로 행운의 아이로 믿고 있던 터였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상관없어.”

구르베스가 자신 몰래 배란유도제를 먹었다고 넘겨짚은 수우는 침실 안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디 소문내지나 말아. 그냥 몰랐던 걸로 해 둬. 겨우 그것 때문에 그런 거야?”

주치의는 다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수우가 그에게 손짓을 보내며 말했다.

“그것뿐이라면 가 봐. 아이한테 아무 문제도 없으면 됐지 뭐.”

주치의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대군 아기씨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한참을 머뭇거리던 의사가 수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혈액에서 환각제 성분도 함께 검출되었습니다.”

순간 수우는 다리가 꺾이며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머릿속이 텅 빈 듯,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수우는 의사의 손에 들려있던 파일을 무작정 빼앗아들었지만 그의 머리로는 도대체 무어라 쓰여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환각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환각제라니? 그럼 황비가 마약을 한다는 거야?”

수우가 두 손을 벌벌 떨며 물었다.

“아,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대답을 하란 말이야! 마약을 하는 게 아니면 왜 환각제가 나오냐고?”

수우가 의사의 멱살을 꽉 붙들며 눈을 부라렸다. 창백해진 의사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황비 전하의 다른 신체 상태를 보아 주, 중독 상태는 아닙니다. 소견으로 보아 일회성 복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검출된 약물이.......”

“약물이?”

“알콜과 섞어서 범죄에 자주 쓰이는 악질적인 향정의약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몸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검출이 극히 어렵지만 다행히 신기술로 정밀검사 결과.......”

“알콜?”

수우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비록 오랜 방탕으로 많이 무디어졌지만, 그의 총명한 머리는 지금 상황이 의심스럽다는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고 남음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수우가 어지러워진 머리를 애써 다잡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에 몰린 지금, 그의 흐릿해졌던 판단력은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유전자검사는 언제 해 볼 수 있나? 내 말은.......친자 여부를.......”

“태아를 체외로 꺼낸다면 모르지만 계속 태중에서 기르실 것이라면 산모의 안정을 위해 아직 며칠은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수우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붉게 충혈된 눈을 얼른 닦아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았네. 지금 내게 말한 것하고.......검사했다는 사실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게 말게나. 황비는 물론이고.......설사 내 가족이나 황실 내각에 있는 그 누구라도 말이야. 이게 유출되면 자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야. 알겠나.”

황제의 서슬퍼런 명령에 의사가 조심스레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 의사가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는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혹시 말이야,”

수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황비가 주류성에 갔던 날........도대체 누가.......”

수우가 더듬거리며 어렵게 말하려는 내용을 눈치 챈 듯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체내에서 정자를 검출하기는 날짜가 너무 많이 지났습니다. 태아가 그 누군가의 2세라면 혹 모르지만.”

“그, 그건.......”

“물론,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오면......”

의사가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순간, 긴장한 수우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살의를 느낀 그의 심장이 터질 듯 울렁이기 시작했다.

의사를 돌려보내고 침실에 돌아온 수우는 자신을 돌아보며 입가에 천진한 웃음을 짓는 구르베스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무 걱정 마세요, 황비. 내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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