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27화 (426/1,132)

< -- 427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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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혼란기의 노예폭동이 완전히 진압된 기원 165년부터 185년까지의 20년간은 세나우스 2세의 통치가 드디어 꽃을 피웠다고 해도 됨직한 말 그대로 태평성대였다. 황제령은 물론이고 제후지역에서도 이렇다 할 분쟁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고, 별다르게 신경 쓸 일이 없어진 귀족들은 너도나도 짝을 맺고 후손을 불리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그건 남부 델루지 가와 황제령의 자이센 가, 북부의 카파키 가도 마찬가지였다.

185년의 어느 날, 비엔의 델루지 종가에 찾아온 베흔을 맞아준 건 4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잘생긴 오렌지빛 머리칼의 소년이었다.

“근위대장님이신가요?”

가정교육도 잘 받은 듯, 단정한 몸가짐의 그 소년은 베흔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집사와 함께 2층의 종장 집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흔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정말 잘생기지 않았는가? 이제 겨우 4살인데 머리도 정말 똑똑하다네.”

집무실에 앉아있던 테번 공이 황실에서 온 이 손님에게 제일 먼저 던진 건 인사말이 아니고 아들 자랑이었다. 베흔은 소년 제롬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정말 늠름하게 자라고 계시군요. 오르마즈가 부럽지 않으시겠습니다.”

“에이, 썅, 그 새끼 이야기는 집어 쳐.”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테번이 버럭 화를 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이 소년은 그럭저럭 똑똑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인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난폭한 성격으로 종종 이 가짜 아버지의 속을 썩인다는 소문이었다.

‘너 같은 놈 밑에서 자라니 애가 이 모양이지.’

베흔이 내심 이를 갈며 이 사나운 최고제후와 마주앉았다. 아이가 자리를 비우자 테번이 그에게 차를 내밀며 물었다.

“듣자하니까, 투모카프 그놈이 곧 총리로 오를 것 같다며?”

“이번에 아라무트에서 200명쯤 있던 노예무리를 또 싹 쓸어버렸다죠. 폭도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드니 뭐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렇게 물불 안 가리니 폐하께서도 총애하실 밖에.”

베흔이 차를 홀짝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코나 시디크 그놈 잡겠다고 완전히 노이로제까지 간 모양이던데.......쯧쯧, 새끼 이번에 재혼했다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나?”

테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근데 짝이 누구야? 듣자하니까 완전히 애라며?”

“노에누스 가 종장 안도 경의 셋째아들입죠. 줄리안이라던가? 23살이라던데 새끼 계집애같이 곱상한 게 완전히 꽃이더군요. 남극성당 생도라지요. 뭐가 그리 급한지 그새 아이도 둘이나 만들었더군요.”

“가문 세를 키우려니 뭐 하나라도 빨리 낳고 싶겠지.”

“오르마즈 놈도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죠. 맏아들이 메네스라던가? 1번 도시 황실학교에 다니던데 어미 닮아서 똘똘하니 진짜 잘생겼더군요. 벌써 몇 가문에서 사윗감으로 점찍은 모양이던데 그 집안 놈들은 뭘 먹고 그렇게 자식 농사들은 잘 짓는지.”

베흔이 짓궂게 또 오르마즈 이야기를 꺼내자 테번이 대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쳇.”

“4년 후면 녀석의 연금 기간이 종료됩니다. 그 전에 아이를 다 키워놓고 공직에 복귀하려는 속셈이겠죠.”

오르마즈 이야기가 듣기 싫은 듯, 테번이 다시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요즘 중앙귀족들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며?”

“타르서스의 위건 지방장관이  세금을 착복한 혐의로 조사받고 있죠. 사실 큰 금액도 아니고 그동안 관례적으로 조금씩 ‘빼돌려 온’ 것인데 황상께서 맘먹고 칼을 뽑아 드신 통에 대표로 걸려든 거죠.”

“그리고?”

“이부의 로아크 대신은 뇌물 수수혐의로 조사 중에 있고.”

“허어, 것 봐. 지금껏 지방 귀족들 매번 구더기 보듯 하시더니, 중앙 관료들이라고 뭐 별다를 것 같아?”

“그냥 순서에 걸렸을 뿐이죠. 물론 이게 신호탄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앞으로 일이 더 커진다는 거야?”

테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베흔은 피식 웃음만 지었을 뿐이었다.

“아참, 부인께선 어디 계십니까?”

“마누라는 왜?”

테번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아, 서부 발 가에서 반드시 직접 갖다드리라는 서한이 있어서요.”

베흔이 서류를 번쩍 들어보였다. 물론, 서한은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저 일버러지 태번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문 밖을 성의없이 가리켰다.

“응접실에 가 봐. 거기서 하늘이나 쳐다보고 있는 게 노상 일이니까.”

노크도 없이 들어선 베흔의 모습에 네페티 부인이 순간 움찔했다. 부인의 치마폭에 안겨있던 어린 제롬은 어머니가 놀라는 모습에 덩달아 놀랐는지 그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제롬하고 잠깐 나가서 놀고 오게나.”

네페티 부인이 유모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텅 빈 방에 베흔과 단 둘이 남은 네페티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앞에 선 이 남자는 원수이자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네페티가 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당연하겠죠. 누구 핏줄입니까.”

부인에게 바싹 다가선 베흔이 그의 목덜미에 살며시 코끝을 가져갔다. 어느새 40대에 접어든 이 여인에게서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의 매혹적인 체취가 풍겨오고 있었다. 부인은 가슴을 더듬으려는 베흔의 손길을 얼른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뭘 새삼스럽게.”

베흔이 마치 구렁이같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부인에게 다시 다가섰다.

“제 아이까지 낳아주신 마당에.”

“환각제와 배란유도제까지 먹이고 몰래 범한 것이 행복하시던가요?”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절 이곳에서 도망가게 해 준다는 약속을 저버린 것도 그 잘난 사랑 때문이었습니까? 그 대가로 절......”

부인의 턱을 꽉 움켜잡은 베흔은 그의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저 늙은이가 배 위에서 쩔쩔 매는 것보다는 저와 즐기는 것이 훨씬 짜릿하지 않았던가요?”

“이 손 치워요.”

네페티가 이를 드러내며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베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벌개져서 꿈틀대고 신음하시는 광경이 정말로 보기에 좋더군요. 이런 도도함은 어디에 다 내버리신 것이었는지, 완전히 눈이 뒤집혀서 마치 창녀같이 신음 소리를.......”

“닥치라니까!”

네페티가 거칠게 씩씩대며 베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베흔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네페티를 내려다보았다.

“전 당신 아들의 아버지라는 걸 잊지 마시죠. 절 미워하고 증오해 봤자 그 대가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테니. 그리고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기댈 수 있는 건 저 하나뿐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이.......이......”

네페티는 힘없이 자리에 꿇어앉으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짓누르는 건 지금 저 남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손잡아 줄 사람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공포, 그리고 언젠가는 저 남자의 뜻대로 이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해 평생 그의 인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신을 조금씩 나락으로 잡아끄는 아들 제롬이 그 아버지보다 더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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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시종장을 불러들인 수우가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따라온 저 시종장은 두말할 나위 없는 베흔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루 24시간 곁을 이렇게 사실상 감시하고 있는 것을 수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옛날 익힌 연기실력을 발휘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싱글벙글거리는 수우의 속내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어젯밤 들어온 수에보의 전사 소식에 베흔도 아픈 몸을 이끌고 허둥지둥 탄현성으로 떠나버린 후였다. 특별한 이변만 없다면, 베흔은 황도 점령 전까지는 이곳 사오시안트에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의 오른팔 쿠베가 도끼눈을 부릅뜨고 있기는 했지만 베흔이 있는 것과 같을 수가 없었다.

수우가 천연덕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황제가 되어 미신이나 믿는다고 비웃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되는 심정을 이해해주게나.”

수우의 말길을 알아들은 시종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만 주십시오. 필요하시다면 주술사나 사교 성직자라도.......”

“아아, 그런 건 아니고 말이야,”

수우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시종장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듣자하니 내명부 여자들의 속옷은 한 번만 입고 다 버린다지?”

느닷없는 속옷 이야기에 시종장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눈앞의 이 ‘황제’는 그저 형편없는 변태성욕자에 불과했다.

‘그냥 달라면 다 알 걸 구차한 변명 하고는.......’

시종장의 입 속에서 이런 말이 빙빙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바로 버리는 건 아닙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인과 질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내의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한 이후에 내시부에서 한동안 보관했다가 일괄 폐기하고 있습니다.”

시종장의 대답에 수우가 얼굴을 더 붉히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빠가 엄마 입었던 속옷을 가지고 다니면 아이가 건강하게 잘 큰다는 비방을 어디서 들어서 말이야.......”

수우의 말도 안 되는 핑계에 시종장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는 듯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역시, 태어나실 대군 아기씨께 훌륭한 아버지가 되실 듯 합니다, 폐하.”

“고맙네.”

수우가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도 눈앞의 이 시종장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가 노리는 것이었다.

시종장이 목소리를 다시 낮추며 물었다.

“내시부에서 최근 것들은 아직 보관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시면 어느 분 것을 몇 개나.......”

‘어느 분’이냐는 질문은 수우의 말대로라면 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수우가 속내를 들켜 민망한 듯 다시 얼굴을 잔뜩 붉혔다. 귀까지 온통 빨개진 수우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영부영 대답했다.

“뭐, 그거야 알아서.......기왕이면 황비 것이 좋고.......기왕 갖고 오는 김에 다른 여자들 것도 가져오면 좋지. 헛갈리지 않게 이름하고 날짜도 꼭 적고 잘 포장해서 주게나. 남아있는 대로 다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폐하, 당장 시종을 보내서 수거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수우의 명을 받든 시종장은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왔다.

시종장을 내보낸 수우는 자리에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날 바보로 만들려고?’

수우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 황비에게 약을 먹이고 몰래 범했을 것이라는 심중은 어느 정도 굳어 있었다. 그리고 정액의 흔적이 남아있을 속옷은 구르베스를 범한 자를 잡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어떤 놈인지.......반드시 잡아내고 말 테다.’

자리에서 일어선 수우는 자신의 개인처소로 향했다. 오늘은 구르베스의 곁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의 곁에서 지금처럼 멍청한 웃음을 태연하게 지을 수 있을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얼 노리는 거냐.......’

구르베스가 낳은 대군을 레곤 대공주의 자녀 중 한 명과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겠다는 논의가 공공연히 오가고 있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르베스를 몰래 임신시킨다는 이 대담하고 위험천만한 시도를 할 만한 가치는 누구에게도 충분히 있었다.

‘이후에도 모든 걸 은폐할 자신이 있는 놈이겠지.’

수우가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지난 긴 세월 망가지기만 했던 그의 머리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을 모두 떨치고 혼자 침소 안에 들어선 수우는 고개를 떨구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누구냐.”

그의 머릿속에 용의자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쳤다. 하지만 구르베스가 술을 마셨던 그 날, 그의 곁에 있던 사람 중 그 정도의 야심과 힘이 있는 건 결국은 둘 뿐이었다. 하지만 한 명은 생식능력이 없어 마땅한 가디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수우 자신의 혈육이었다.

수우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책 한 권을 펼쳐들었다. 제일 앞장을 펼치자 붉은빛 머리카락 한 가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다음번 페이지에는 그보다 조금 엷은, 오렌지빛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

베흔의 것이야 ‘출정보고’를 하러 온 그에게 만일을 대비해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라며 받아낸 것이었고, 지금은 전장에 있는 형 제롬의 것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잠시 놀아준다는 핑계로 조카 세데스에게 찾아갔던 수우는 그 처소에 걸린 아이 아버지 제롬의 망토에서 몇 가닥이나 되는 그의 특이한 빛깔 머리카락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제발 이 둘은 아니기를.”

수우가 책에 이마를 기대며 근심어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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