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28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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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이루어진 태평성태는 베흔의 예상대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기원 186년, 투모카프 자이센 부총리가 총리대신으로 전격 등용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비리 혐의로 조사받던 위건 지방장관과 로아크 대신 두 공직자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처분이 그저 평소보다 조금 엄한 처벌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었다. 처형과 함께 발표된 그들의 수뢰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고, 제국민들은 황제의 선동에 일제히 반응해 격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작된 여론을 등에 업은 황제는 뇌물을 받은 공직자에게 그 수뢰액의 2배만큼을 몰수할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두 대신의 집안은 물론이고 가문에까지 실시된 대대적인 몰수 결과 걷은 수익은 발표된 금액을 겨우 채운 정도였다. 몰수된 재산을 모두 황실 금고에 채워넣은 황제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그 유가족과 가문을 계속 윽박질렀지만 그들에게 내놓을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그들의 애원에 황제는 대신 가문의 상급귀족 지위를 빼앗아버렸다.
그러면서 총 20개였던 중앙의 상급귀족가문은 지방 상급제후가문보다도 적은 18개로 순식간에 줄어버렸다.
가문 수에서 중앙을 앞서게 된 지방제후들은 그간 위세등등했던 중앙귀족들이 철퇴를 맞는 모습에 처음에는 표정관리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전자은행 소장 자그룰라 모렌 박사와, 제국 최대의 은행을 보유하고 있는 재력가 로퍼크 가에 전격적으로 세습 상급귀족 지위를 부여해 빈 자리를 채워버렸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의사 겸 유전학자인 자그룰라 모렌 박사는 자연과학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제국에서 처음 기록된 실무자 출신 상급귀족이었다. 게다가 ‘의학’은 옛 사교 시절 성직자들이 배우던 학문이었고, 현재도 제국 의사들의 절반가량이 아직 옛 종교를 고수하고 있는 이교도였다. 그렇다보니 신앙을 떠나, 아직까지도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묘한 터부가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공신들에게나 드물게 수여되는 비(非)세습 상급귀족도 아닌, 완전한 세습 상급귀족이라는 깜짝 놀랄 지위를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황실 혈통에 관해 유달리 많은 비밀을 쥔 모렌 박사의 입막음을 위해 지위를 수여했을 것이라며 수군대기도 했지만 황제와 모렌 박사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더 큰 논란은 로퍼크 가에 있었다. 사실 로퍼크 가는 이전부터 나무랄 데 없는 가문 구성원들과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가문이었다. 그런 그들이다 보니 상급귀족을 수여해도 전혀 손색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4개의 황궁 별관 공사와 욱리하의 치수 사업, 그때까지도 사막이었던 3번 도시의 녹지화 사업을 강행하면서 진 70억 골드의 현금채무가 문제였다. 로퍼크 가문의 은행은 상급귀족 수여 직후, 황실의 채무 모두를 얼토당토않은 조건으로 인수했고, 얼마 후에는 다섯째 태자인 타니토 세닉 리쿠 공주를 가문 장손자와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전대미문의 상급귀족가 교체로 시작된 ‘공포정치’는 총리 투모카프의 주도하에 주도면밀하게 실시되었다. 이미 처형된 두 대신의 여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공직자들의 비리가 끝도 없이 엮여 나왔고, 그들 상당수는 황제령의 토호(土豪) 가문들이었다.
황제령에서 행정, 치안, 재정 등을 장악하고 지방의 실세로 자처하던 이들 토호, 혹은 유지들은 황실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을 농락하거나, 뇌물, 혹은 과거사로 약점을 잡아 수하로 삼기가 일쑤였다. 그들 대다수는 지방의 범죄조직과도 연관이 있었고, 심지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청렴한 지방관들이나 황실 감사관들이 이들 토호 세력의 손에 암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무렵, 8번 도시에 파견한 감사관이 토호 세력 손에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황제가 얼마나 격분했는지는 이후 벌어진 사건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투모카프에게 지시해 8번 도시 전역에 즉시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와 동시에 4만의 대군을 투입해 경계를 봉쇄하고 토호 세력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토호 세력이 미처 대비할 시간 여유조차 주지 않은, 말 그대로 폭풍이나 마찬가지였다. 법이니 규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행위였지만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황제는 그 처단 대상을 오직 토호 세력에만 한정지었고, 보통 시민을 자극하는 정치적인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곳의 ‘최대한 빠른 청소’를 위임받은 투모카프는 감사관 살해를 주도한 것으로 ‘심증’이 있던 토호와 그 가문 사람들, 그들과 결탁한 공직자 100여명을 재판도 없이 공개처형해 버렸다. 몇몇 사람들이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황제에게서 어처구니없는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으니.”
일단 불붙은 학살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전대미문의 폭풍에 처벌은 ‘처형 아니면 재산을 몰수하고 용서’ 둘 중의 하나뿐이었다. 겨우 열흘 남짓, 짧은 계엄령의 폭풍 중에 8번 도시에서는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당했고, 4개 토호 가문이 사실상 멸문되었다.
그렇게 단기간에 저항의 여지까지 완전히 씨를 말려버린 황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계엄령을 풀고 군대를 바로 철수시켰다.
8번 도시의 참극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황제가 이 일을 이미 몇 년간이나 치밀하게 준비해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가 이미 ‘살생부’를 만들어 쥐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토호들 사이에 돌면서 황제령에서는 ‘다음 순서는 어디냐’ 라는 걱정이 마치 먹구름처럼 떠돌았다.
사실 황제는 민심 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론의 지지라는 것이 ‘이불 속에서 하는 사랑한다는 말’ 만큼이나 못 믿을 헛소리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믿을 수 없는 만큼, 필요한 때만 잘 이용해먹는 것도 그의 특기였다.
그래서 그는 불이 붙은 지금 이 순간, 다음 목표를 향해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근위대가 2번 도시에 진주했다고 하는군요.”
아들 메네스의 검술 연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르마즈는 세네피스가 가져온 소식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르마즈를 그대로 빼닮은 열 살의 이 잘생긴 소년은 어딘지 그늘이 드리우는 어머니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르마즈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려는 듯,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일 년 내내 춥고 흐린 코윈의 궂은 날씨는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눈보라가 칠 것 같구나. 그만 들어가 쉬어라. 메네스.”
“예,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날이 쌀쌀하니 어머님과 이모님도 빨리 들어가세요.”
오르마즈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메네스는 얼른 자리를 비워주었다.
“메네스가 인상은 언니보다 마에두 형부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성격도 그런 것 같고.”
세네피스는 멀어져가는 조카를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르마즈의 첫째남편 마에두는 식물학자라는 직업 덕택에 처가인 이곳 북부에도 콜로니 아카데미 부교수의 자격으로 그럭저럭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식물학자 트라티누스 박사’ 라는 간판보다 ‘오르마즈의 남편’으로 바깥에서 더 큰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지만 본인도 그다지 불평은 없었다.
그는 별다른 야심도 없는 조용하고 자상한 성격에 너그러운 아버지였고, 오랜 연금 생활로 조금씩 지쳐가는 오르마즈를 말없이 다정하게 보듬어주는 좋은 남자였다.
오르마즈는 두 남편을 비교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도 사람인만큼 어느 한 쪽에 마음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자존심이 세고 욕심이 많은 둘째남편 네포프는 걸핏하면 ‘내가 오르마즈의 남편인데.......’라며 우쭐대는 통에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곤 했다. 물론 그가 오르마즈의 이름을 팔아가며 특별히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오르마즈는 가문 원로들에게서 ‘남편 처신에 신경 좀 써라’며 종종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네포프 일로 속을 썩는 오르마즈에게 세네피스는 ‘마에두 형부가 비정상이지 네포프 형부는 극히 정상’이라며 종종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메네스도 그레이오팔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마에두 형부가 검은 눈이라서 그런가요?”
세네피스가 메네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내 아이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오르마즈의 주의 아닌 주의에 세네피스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새 황제를 닮았는지, 오르마즈는 네 자녀들의 생물학적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사실 몽골리안인 마에두와 코카소이드인 네포프의 인종부터가 워낙 다르다보니 아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둘 중 누가 아버지인지는 누가 보기에도 빤했지만 오르마즈는 아이의 아버지에 관해 감히 입에 담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마에두나 네포프도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하는 의문을 가끔 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둘 모두 4명의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고루 애정을 베풀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메네스가 서투르게 정리해놓은 무기장을 다시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레이오팔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다.”
“왜요, 언니가 있고 제가 아직 있는데......”
“너 몸은 좀 어떠냐.”
오르마즈는 ‘그레이오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스러운지 바로 주제를 돌렸다. 세네피스는 평소보다 한결 핏기가 준 얼굴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르마즈는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동생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고집도 적당히 부려야지. 주페 태자가 발현자라는 것도 몰랐냐. 아무리 대문회에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며칠 전, 대문회에서 주페 태자와 힘겨운 무승부를 기록하고 병원에 실려갔던 세네피스는 요양차 종가에 잠시 돌아와 있었다. 남극보다 날씨도 좋지 않은 코윈에 요양이라며 온 것을 오르마즈도 좀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는 언니와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요양이라며 능청맞게 웃기도 했다. 오르마즈는 동생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종가 안으로 향했다. 세네피스가 그의 겨드랑이를 더 깊이 파고들며 말했다.
“참 이상하죠?”
“뭐가?”
“주페 태자에게서 언니하고 같은 게 느껴졌어요.”
순간 움찔한 오르마즈가 걸음을 멈추었다. 세네피스가 그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참 이상하죠. 뭐랄까, 그냥 사람의 체취가 아니고 꼭 무슨 마취제 같아요.......그것만 느끼면 심장이 막 울렁거리는 게 쿡쿡 쑤시듯이 아플 지경이거든요.”
“너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됐나 보다. 별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니.”
오르마즈는 동생의 생각을 애써 평가절하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하고 같이 잘 때 언니도 마찬가지시잖아요.”
“내가?”
오르마즈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언니 잘 때마다 저 안고 더듬으시는 거 모르셨어요?”
“옆 사람 껴안는 건 원래 내 잠버릇이야.”
오르마즈가 난처한 상황을 애써 땜질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네피스도 오르마즈는 더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는지 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가 어디까지 밀어붙일까요?”
“폐하께선 도를 넘기지는 않으실 거다. 이번 일은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려 하시겠지. 폐하 뜻대로만 된다면 이번 일은 토호들만 잡는 선에서 잘 마무리될 수 있을 거다.”
“뜻대로 안 된다면요?”
“누굴 말하고 싶은 거냐?”
오르마즈가 그의 말뜻을 눈치 챈 듯 다시 물었다. 세네피스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냥개가 살기 위해서는 주인이 사냥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죠. 그게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니까.”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네피스의 어깨에 팔을 건 채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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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뒤 편 글을 잘못 올려서 내용을 얼른 바꿨습니다. 이미 한 분이 보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