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34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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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문제만 없다면 내일 아침이면 본대와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선두차량에 앉아 졸고 있던 케세크는 부장의 보고에 눈을 번쩍 떴다. 최대한의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두의 정찰대와 후미의 호위부대에만 약간의 기병이 있을 뿐 나머지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차량에 탑승해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알았다. 빨리 좀 가라고 해. 어젯밤부터 샜더니 죽을 지경이야.”
위험한 적진 사이로 길을 뚫으면서 먼저 간 본대와는 달리, 이 수송부대는 힘겨운 ‘도보행군’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조립식 교량에 쓰일 어마어마한 중량 자재를 실은 이런 초대형 화물차 정도면 보병 수십 명, 그리고 약간의 보급품이 와글와글하게 무임승차한다고 해도 달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물론 웬만한 도로는 대강 보수가 되었고, 중간중간 큰 차가 지나가기 어려운 곳들에만 사역병들이 달려들어 손을 보는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이렇게 해가 진 어두운 밤 시간에도 숙영지 같은 것을 만들어 쉴 필요도 없었다.
“강 건너 야만족들은?”
케세크는 떡진 머리를 긁적거리며 왼쪽의 욱리하를 돌아보았다.
“여전합니다.”
부장이 스캐너를 확인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스코프로 확대시켜 바라본 욱리하 건너편에는 탈라스에서 이미 눈에 익은 동부 유목민 중기병 2천 정도가 그의 수송대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이암성을 출발한 직후부터 달라붙은 저들은 이쪽 병력이 행여 물을 넘어오면 바로 짓밟아주겠다는 듯, 거의 무력시위에 가까운 행군을 하며 끈질기게 따라붙어 있었다.
“제기랄, 저 지겨운 새끼들.”
케세크가 머리를 흩트리며 대뜸 분통을 토해냈다.
자신들의 대장이 이리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부장들, 그리고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대장인 케세크는 물론이고 이번에 수송대를 호위하는 플라칼 가 보병들의 상당수는 코리온이 사형집행을 받던 같은 날, 5천의 보병대가 전멸당한 탈라스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병사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전우들을 짓밟아 죽인 것이 바로 저 유목민 중기병들이었다.
그런 고역을 치른 당시 패잔병들을 나름대로 배려해 준다고 이 ‘편한’ 수송대에 배속시켰건만 케세크나 병사들이나 하필 이곳에서 저들을 또 만난 것이었다. 가뜩이나 다혈질의 케세크에게는 저들의 꼴을 마치 길동무처럼 계속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가 고문에 가까웠다.
“이 앞에는 길이 좀 안 좋습니다.”
부장이 앞쪽을 가리켰다. 하안의 가파른 비탈 위로 나 있던 도로는 누군가 일부러 산사태를 내 놓고 도망간 흔적이 선명했다. 산사태가 나서 무너졌던 곳에 먼저 간 3군 본대가 임시 교량을 놓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화물차들이 지나갈 수 있을지 케세크는 불안한 기분부터 퍼뜩 들었다.
“혹시 모르니 다리를 점검하도록 해.”
“장군님, 앞서간 본대에서 연락입니다. 남쪽에서 웬 배가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우리 수송대를 노리는 적 기습병력인 것 같다고 합니다. 본대에서 지원병력을 출발시키겠으니 좋은 위치에 방어태세를 완비하고 일단 움직이지 말라는 마누엘 경의 명령이십니다.”
순간 케세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부장의 손에 들린 스캐너를 제일 먼저 쳐다보았다.
“무슨 배?”
“정찰보트 보고에 따르면 5백 명 이상 승선 가능한 호버크라프트 5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30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케세크가 이를 갈았다. 하필 이런 험한 길을 지날 때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 적들의 기습이 틀림없었다.
“놀랄 것 없다. 그냥 예상했던 기습일 뿐이야. 아마 가디언들도 타고 있겠지.”
케세크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은 바로 앞에 숲을 끼고 있어서 방어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다리를 점검하지 않고 일단 전진할까요?”
참모의 물음에 얼굴을 찡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것이 특기인 그였지만 이미 산사태까지 났던 저 도로는 이런 무거운 차가 건너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됐어, 그냥 여기서 지킨다. 숲이지만 경사도 가파르고 우리가 먼저 매복해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상관없어. 사역병들은 빨리 도로를 점검해.”
산 쪽에 이미 수백의 병력이 매복하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케세크는 일단 대부분의 병력을 강 쪽에서 다가오는 배에 쏟기로 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가디언들이 도로 아래 험한 비탈로 허겁지겁 달려 내려가 1차로 적을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3천여의 중장보병과 1천 정도의 투창병들은 비탈에 2차로 견고한 대오를 이루고 강변을 내려다보았다. 넓지 않은 도로 위는 이미 100대에 가까운 이 거대한 중차량들이 온통 점거하고 있어 적과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제기랄, 이게 뭐야.”
온통 빽빽한 풀과 나무, 거친 바위들로 뒤덮인 숲에서 싸움을 벌이게 된 중장보병들이 대뜸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개활지에서 대오를 지어 싸우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는 빽빽하게 뒤덮인 숲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투창병들의 사격은 이런 숲에서는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장군님, 허락해주신다면 차라리 숲의 강변 쪽 경계까지 최대한 내려가 전진 방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숲은 중장보병들이 싸우기에 그다지 좋지 않을뿐더러 투창병들에게도 불리합니다. 그것도 상대가 가디언들이라면.......”
도로 위에 있던 케세크는 중장보병대 연대장의 제안에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장보병대 지휘관으로 잔뼈가 굵은 그가 보기에도 숲은 가디언들, 그리고 게릴라전에 능하고 개인기량이 뛰어난 적 정예병들이 날뛰기에 더 좋은 무대였다.
“내려가! 강변에서 적들을 바로 막는다! 빨리! 빨리!”
중장보병대가 강변으로 더 내려가면서, 산 중턱의 도로에 늘어선 차량과 호위군와의 거리는 그나마 더 멀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강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기다리는 남부 병사들의 긴장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올라오는 배에 도대체 어떤 적들이 얼마나 타고 있을지 그들에게는 전혀 정보가 없었다.
대응태세를 갖추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긴장감이 조금씩 올라갔다. 그리고 20여분이 되어갈 무렵, 드디어 강 남쪽에서 5척의 빠른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다!”
남부 보병대 지휘관들의 큰 목소리가 차례대로 울려퍼졌다.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최대한의 속도로 돌격해 온 5대의 호버크라프트 중 4대가 강바닥에 긁히는 요란한 마찰음과 물보라를 사방으로 튀기며 강변의 거친 자갈밭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활짝 열린 문 안에서는 가디언 지휘자들을 앞세운 아메샤 스펜타의 기동돌격대 크샤트라 연대 병사 2천여명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돌격!”
호버크라프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향해 2선에 대기하던 세닉 가 투창병들의 집중사격이 매섭게 쏟아졌다. 하지만 악에 찬 성전의 용사들은 사격 따위에는 아랑곳 않는 듯 방패 하나로 몸을 가린 채 괴성을 내지르며 계속 돌진했다.
“겨우 이 정도였냐! 이 사교집단 떨거지들아!”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붉어진 눈을 부릅뜬 이 광신도들의 돌격은 가디언들조차 잠시 움찔하게 만들었다. 사격에 명중당한 수십의 병사들이 거친 자갈바닥에 피를 뿜으며 굴렀지만 전부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남부 지배층은 옛 사교 시절 지배층에서 옷만 갈아입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것을 들먹거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 성전 시대에 살고 있는 저 광신도들만 제외하면.
“저 새끼들 주둥아리를 찢어 놓으란 말이다!”
근위대 가디언들을 앞세운 남부연합군 병사들도 질세라 고함을 올리며 숲에서 튀어나와 적을 향해 돌진했다. 어쨌든 숫자에 있어서는 연합군 쪽이 훨씬 많았다. 평소처럼 견고한 방진을 짠 그들은 동료와 어깨를 맞대고 한 발 한 발 힘 있게 걸음을 내디뎠다.
“뒈지려고 환장했구나!”
숫자 따위에는 원래부터 무관심했던 아메샤 스펜타들은 자갈밭을 가로질러 비틀거리며 전진해오는 적들을 향해 마치 기병대 같은 삼각형의 돌격진을 이루고 거세게 충돌했다. 그들의 매서운 돌격을 맞이한 보병진의 1선의 일부가 무너졌지만 견고함을 생명으로 하는 그들답게 이번에도 쉽사리 흔들리지는 않았다.
도로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케세크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내심 불안감에 떨고있었다. 북상한 5대의 호버크라프트 중 상륙하지 않은 나머지 1대는 강 건너에 있던 유목민 중기병 300여기를 태우고는 다시 이쪽 강둑, 그것도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 북쪽의 완만한 사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곳에 기병들이 상륙한다면 도로를 타고 올라와 이 수송대를 덮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케세크가 부장을 손짓해 불러들여 말했다.
“이봐, 예비대 다 털어서 저 기병들을 차단해. 저놈들 여기 접근 못 하게 해.”
케세크는 나름대로 재빠른 상황 판단을 하는 스스로를 무척이나 대견하게 여겼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장이 이곳에 남아있던 경보병 1천 중 7백 정도를 이끌고 허둥지둥 기병을 막으러 달려 나갔다. 그리고 강변에서 아메샤 스펜타들과 싸우고 있던 중장보병 중 예비대로 있던 5백여명도 기병들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바삐 이동했다.
물론 케세크는 이 수송대의 호위병력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정작 자신이 있는 도로 위에는 고작 경보병 3백뿐이라는 것을 아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눈앞에서는 부하들이 적들을 나름대로 잘 저지하고 있었다.
그때, 도로 남쪽에서 갑자기 무언가 무너지는 큰 소음이 들려왔다.
“앞을 보십시오!”
케세크의 부장이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를 꽥 질렀다. 산비탈 위에서 굵은 통나무 몇 그루와 바위가 작은 나무들을 산산이 부러뜨리며 도로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흙과 나무가 뒤엉켜 도로 위로 쏟아지면서 가뜩이나 험한 길 한쪽이 그대로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준비해라.”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르키스는 이 어둠 속, 위장 크림으로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마치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발 밑, 약 0.5스타디아(75m) 가량 떨어진 곳에는 이번 공격의 궁극적인 목표인 중차량 100여대가 도로를 꽉 채우고 서 있었다.
“저 배 위에서 다시 만나세.”
그는 함께 온 페다이의 손을 힘 있게 맞쥐었다. 사르키스와, 그의 뒤에 선 1백의 ‘폭파대’ 병사들은 군장과 함께 지고 온 강력한 분말 인화물질 주머니를 하나씩 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홀가분한 몸을 한 2백여 ‘전투대’ 병사들이 그 전면에서 페다이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다시 뵙죠.”
페다이는 양 손에 쥔 행거에 힘을 바싹 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공격!”
그의 지시를 받은 ‘전투대’ 병사들이 바위 뒤에서, 나무 뒤에서 큰 함성을 올리며 일제히 도로를 향해 쇄도했다. 강변에서 한참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차 주변에서 마치 남의 일처럼 구경하던 연합군 경보병들이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습이다!”
숲 속에서 들려온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에 그들은 순간 판단력을 잃었다.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함성소리는 적어도 1천명은 넘는 압도적인 병력이 함께 울리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그들은 이 소리가 적들이 숲 사방에서 미리 틀어놓은 큰 앰프에서 터져 나온 허세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가디언이다!”
깜짝 놀라 도망치던 그들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숲 속에서 달려 나오는 5명의 파란 팔찌 가디언들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계속해 몰려나오는 병력에 얼마만큼의 가디언들이 섞여 있는지까지 헤아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대오! 대오!”
몇몇 장교들이 마치 그들에게 도그마처럼 되어버린 명령으로 악을 썼지만 도로를 꽉 채운 그들의 차량은 지금 그들에게 ‘대오’를 만들 수 없게 가로막는 제일 큰 장애물이었다.
“도대체 몇 명이야!”
거대한 화물차에 시야가 완전히 가로막힌 연합군 지휘관들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적이 누군지, 몇 명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3백여 경보병들은 이 거대한 차들 사이를 마치 미로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제대로 서 있을 위치를 찾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병력이 온통 조각조각난 지금은 ‘조직력’ 보다 병사 개개의 ‘기량’이 더 중요한 순간이었다.
“차 앞에서 막아! 적들이 차에까지 접근하면 안 된다! 모두 산 쪽으로 달려나와서 내려오는 놈들을 막으란 말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케세크가 근위병들과 함께 직접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북부보병들보다 더 끔찍한 서부 장갑보병들이었다. 진흙과 위장으로 온몸을 시커멓게 장식한 그들은 소름끼치는 할버드와 양손검을 앞세우고는 남부 경보병들을 마치 밀물처럼 그대로 휩쓸었다. 어찌된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그 돌격에 휩쓸려버린 남부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맙소사!”
“장군님! 일단 피하십시오! 가디언들이 있습니다!”
근위병들이 비틀거리는 케세크의 팔을 급히 잡아끌었다. 망연자실해있던 그는 근위병들의 손에 이끌려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투창병들! 투창병들을 불러올려!”
넋이 빠진 채 강 쪽을 내려다보던 그는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세닉 가 투창병들을 가리키며 거의 본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별다른 생각도 없이 내린 이 명령은 어쩌면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시기적절한 명령이 될 터였다. 이미 난전이 되어버린 강변의 전투에서 그들의 역할은 거의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장보병대 후방에서 다음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1천여명의 그들 정예 투창병들이 난리통이 되어버린 도로 위로 급히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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