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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35화 (434/1,132)

< -- 435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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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이가 이끄는 2백의 전투대 장갑보병들이 연합군 경보병들을 잠시 쫓아낸 즉시, 2선에 있던 사르키스는 함께 숨어있던 1백여명의 폭파대 병사들과 함께 재빨리 뛰어나왔다. 그는 등에 지고 있던 분말 인화물질을 끌어안고 텅 비어버린 차에 뛰어올랐다.

“여기 있는 자재들을 모두 불살라 버려라! 모두 흩어져서 한 대씩 맡아!”

사르키스의 첫 번째 성공을 축하하듯, 큰 불길이 그가 뛰어오른 차의 짐칸에서 확 솟아올랐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 늘어져있는 교량용 보급품들이 마치 폭발하듯 터지는 강력한 인화물질과 함께 차례로 불길을 뿜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욱리하를 건너는 데 쓰일 어마어마한 부교 자재들이 노란 불꽃과 검은 연기 속에서 어느새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크!”

생각보다 훨씬 크고 뜨거운 불길에 소스라치게 놀란 사르키스가 짐칸에서 잽싸게 뛰어내렸다. 주류성에서 이곳까지, 그 며칠간의 힘겨운 행군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값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이거였어........”

사르키스는 검댕이가 묻은 소매를 털어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100대의 수송차량에서 뿜어나온 검은 연기가 이 심야의 산자락을 새카맣게 덮어가고 있었다. 연합군의 부교 자재를 1군과 3군이 반분해서 가져오고 있었으니 이제 적들은 욱리하의 도하용 부교를 한동안 설치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고 싶은 속내를 애써 가라앉히며 무기를 뽑아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페다이가 이끄는 2백여명의 전투대는 이미 적들을 돌파해 강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모두 전투대를 따라 내려가!”

사르키스는 화물차에 불을 붙이느라 사방에 흩어진 폭파대 장갑보병들을 향해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불을 질렀으면 차에서 빠져나와 전투대와 합류해! 앞서간 전투대를 쫓아 강변의 호버크라프트까지 내려간다! 이제 황궁에 개선한다!”

기쁨에 넘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옆에서 날아든 쉿 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보급품에 붙은 노란 불꽃 사이로 병사들을 향해 내리꽂히는 웬 시커먼 물체가 잠시 그의 눈에 들어왔다.

“투창이다!”

폭파대 장갑보병들 중 몇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르키스 역시 재빨리 방패를 쳐들었지만 미처 막지 못한 한 발이 그의 정강이를 깊숙이 스쳤다.

“아읍!”

사르키스가 잠시 움찔거렸다. 장갑보병 특유의 단단한 갑주 덕택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의 오른쪽 정강이에서 제법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르키스는 다친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시 일어나 도로 밖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병사 두 명이 그의 옆을 황급히 부축해 주려 했다.

“장군님! 힘내십시오!”

“난 괜찮아! 별 것 아니다!.......”

“놈들의 허리를 끊어라!”

이들이 자재에 불을 붙이는 새 강변에서 달려 올라온 천여명의 투창병들이 먼저 지나간 페다이의 전투대와 뒤에 남은 100여명의 폭파대 사이를 순식간에 차단하고 맹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 퇴각해! 싸우면서 시간 끌지 마라! 싸울 필요도 없으니 무조건 살아서 도망쳐라! 알겠나! 살아서 최대한 빨리 강까지 도망치는 게 너희 임무다!”

“장군님! 적 투창병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간도 없을뿐더러 소수병력으로 무작정 정면돌진하다가는 다 죽습니다!”

다급해진 사르키스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먼저 간 전투대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었다.

“저기!”

사르키스는 가파른 언덕을 타고 강까지 이어진 작은 우수 관로를 발견했다. 도로의 빗물이 빠지도록 움푹 패어 설치된 이 좁은 관로는 기껏해야 허리 깊이밖에 되지 않아보였지만 그곳과 적 투창병들과의 사이에는 제법 큰 바위와 작은 언덕, 나무 같은 엄폐물들이 늘어져 있어 자연적인 교통호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북동쪽에 작은 우수로가 있다! 거기로 가면 적의 사격을 피할 수 있으니까 북동쪽으로 우회해서 우수로를 타고 빠져나가!”

“적들을 보내주지 마라! 썅! 이것들을 다 잡아서 불 속에서 태워 죽여 버릴 테다!”

어디선가 들려온 거친 고함소리에 사르키스가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전투대의 기습에 잠시 달아났던 케세크 플라칼 경이 그새 경보병과 근위병들을 급히 수습해서는 다시 도로 밑에서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타들어가는 불꽃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 그의 얼굴은 온통 격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기! 저놈들을 쏴!”

적에게 퇴로가 가로막힌 채 잠시 우왕좌왕하던 장갑보병 십여명이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날아든 무수한 투창에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아직 괜찮습니다! 제발 힘내십시오!”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망연자실해하는 사르키스에게 병사가 힘을 주어 말했다.

“빨리! 빨리 내 뒤를 따라오란 말이다!”

사르키스가 자꾸 꺾이는 다리에 고통스럽게 체중을 가하며 달아나는 병사들에 앞장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의 고된 행군 때문인지, 병사들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이런 페이스로 제대로 달아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빨리! 여기로 오란 말이다!”

수로로 제일 먼저 뛰어내린 사르키스는 순간 다리의 상처에 가해진 충격에 잠시 움찔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따라온 폭파대 장갑보병들이 그에 뒤이어 수로에 차례대로 뛰어들었다. 그곳에 몸을 감춘 병사들은 얼굴과 허리 위만 방패로 가리면 적의 집중사격을 그대로 무시하며 강변까지 안전하게 달려 내려갈 수 있었다.

“제기랄! 더 접근해서 쏴!”

투창병 장교가 악을 썼다. 수로 위로 수백발의 투창이 연속해 쏟아졌지만 단 한 명의 장갑보병도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씨발! 저놈들을!”

어느새 이성을 잃은 케세크는 30여명의 근위병들을 직접 이끌고 수로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날래던 저 장갑보병들이 지금은 어딘지 굼떠보였다. 이대로 쫓아가면 저들이 강변에 닿기 전에 따라잡아 몰살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놈!”

근위병의 선두에서 달려온 케세크는 투창에 맞은 동료를 힘겹게 부축해 가느라 뒤처진 장갑보병의 등을 칼로 푹 꿰어버렸다. 함께 쓰러진 부상병의 머리에도 뒤따라온 근위병의 철퇴가 작열하면서 산산조각난 살점과 머리카락, 튀어나온 뇌수가 수로 벽에 끔찍한 얼룩을 그렸다.

“자, 장군님! 뒤에........”

선두에서 달아나던 사르키스는 부하의 비명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어느새 후미에 따라붙은 케세크의 근위병들이 다리까지 휘청거릴 정도로 지친 장갑보병들을 마치 소 돼지 때려잡듯 마구 도살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습니다!”

부장의 호소에 사르키스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7, 8분대는 나를 따라라.”

사르키스가 칼을 뽑아들며 이미 도망쳐 온 길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폭파대에서 그나마 가장 견실하게 남아있던 2개 분대를 이끌고, 그는 후미에서 부하들을 도살하고 있는 케세크를 향해 큰 함성과 함께 돌진했다. 투창에 찢긴 상처가 욱신거리며 쑤셔왔지만 부하들을 이곳에서 저 도살자의 손에 몰살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내가 묶어둘 테니 모두 도망쳐라!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도망치란 말이다!”

격앙된 기분에 선두에서 칼을 휘둘러대고 있던 케세크는 수로 아래쪽에서 십여명의 병사들과 다시 달려올라온 웬 조그만 무장의 기세에 잠시 움찔했다.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한 그는 거구의 케세크를 온 체중을 모두 실어 힘껏 들이받았다. 하지만 이 거구의 맹수 같은 무장은 나름대로 힘을 실은 그의 돌진에도 잠시 휘청거린 것이 고작이었다.

“이 쬐끄만 놈이 감히!”

케세크는 자신에게 바싹 달라붙은 사르키스를 한 발로 힘껏 차내며 칼을 재빨리 올려쳤다. 힘에서도, 그리고 부상을 입은 다리 때문에라도 그는 힘에서 케세크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케세크의 칼을 어렵게 막은 사르키스는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바닥을 굴렀다.

“그 낯짝을 갈가리 찢어놓으마!”

다시 칼을 치켜든 케세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사르키스를 향해 칼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깜짝 놀란 사르키스가 그의 칼을 쳐내려 했지만 몸이 마음처럼 재빨리 움직여주지 않았다. 케세크의 잔혹한 칼날은 옆으로 몸을 비틀던 그의 투구를 찢고 오른쪽 귀를 순식간에 두 조각냈다.

“새끼 여기서 뒈져봐라!”

케세크는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는 사르키스의 왼쪽 머리를 방패 모서리로 힘껏 후려쳤다. 순간 모든 것이 멍해진 사르키스의 눈에 아직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문득 들어왔다. 무슨 이유엔지, 그는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적 근위병들과 싸우던 부하들이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는 것도, 그의 가슴에 칼끝을 들이내고 왼손으로 목을 내리누른 케세크가 무어라 히죽거리는 것도, 그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아, 아아악........”

고막이 터져버린 사르키스는 본능적으로 적의 칼날을 움켜쥐었다. 케세크가 천천히 힘을 가하며 밀어 넣는 칼날에 그는 결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만 더 많아질 뿐이었다. 갑주를 뚫은 칼날이 급소를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사르키스는 결국 칼을 쥔 손을 놓았다. 그는 짧게 한 마디를 꺼냈다.

“길동무가 필요해.”

팔을 뻗은 사르키스는 눈이 휘둥그레진 케세크의 양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순간 당황한 케세크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죽어가는 사르키스의 손은 그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 꽉 붙들고 놔 주지 않았다.

“놔! 놓으라니까!”

이를 드러내고 악을 쓰던 케세크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치 먹잇감의 발악과도 같은 그의 고함소리를 들은 주위의 장갑보병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자신들의 지휘관에 붙들려 악을 쓰고 있던 케세크의 머리를 그 육중한 할버드 날로 힘껏 후려쳤다.

“아악!”

이미 감각을 잃어가던 사르키스의 얼굴 위로 두 조각난 케세크의 머리에서 터져나온  끈적한 피와 살점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때까지도 케세크의 손을 단단히 쥐고 있던 사르키스의 손에서 비로소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칼이 깊이 꽂혀있는 그의 가슴 위에는 한때 남부 제일의 보병지휘관 중 하나로 꼽히던 연합군 3군 부사령관의 육중한 시체도 함께 놓여있었다.

“하아........”

사르키스는 총총한 별이 떠 있는 황제령의 밤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황제령의 하늘이 이렇게까지 아름답다고 느낀 건 난생 처음이었다. 케세크의 죽음에 놀란 남부 병사들이 놀라 주춤거리는 것도, 기회를 포착한 장갑보병들이 쓰러진 그를 바닥에 끌고 급히 달아나는 것도 그에게는 마치 아득하게 먼 사건처럼 느껴졌다.

“나의 시체를.......거두지 마라........내 이곳에서.......원수의 죽음을 행복하게 지켜볼 것이니.......”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는 서부제후군의 교범에 실려 있는 한 마디를 계속 중얼거렸다.

“장군님! 강변입니다! 살았습니다! 조금만 힘내십시오!”

병사들이 그의 옆에서 악을 쓰고 외쳤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것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의 부대가 보급품들을 태워버리는 동안 적 주력군을 붙들어두었던 아메샤 스펜타와 중기병대도 작전 성공과 함께 정연하게 퇴각해 호버크라프트에 다시 오르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장군님! 다 왔습니다!”

배에 올려진 사르키스는 생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주페 태자와 함께 처형당했던 아버지와, 마리안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절, 황빈이 된 솔을 보며 기뻐하던 기억이 그의 희미해져가는 의식에 한 꺼풀씩 겹쳐져 나타났다.

“어머니........”

사르키스는 어느새 피로 가득 찬 폐를 울려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고, 먼저 간 여동생 마리안이 묻혀 있는 이 황제령도 영원한 휴식을 갖기에 나름대로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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