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38화 (437/1,132)

< -- 438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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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백산해 뛰어다니는 작업자들 중간에 슬쩍 파묻힌 자이납은 방금 아리엘이 20여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달려간 제어실을 향해 급히 뛰어 올라갔다. 지금 이 작은 통제소 건물 안에는 30여명의 페로 가디언과 2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 70여명의 남부 경보병들까지 사방팔방 흩어진 채 뒤엉켜 있었다.

“흐익!”

자이납이 지레 놀라 비명을 지르며 얼른 얼굴을 가렸다. 온몸이 물로 흠뻑 젖은 3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계단에 자리를 잡고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며 서 있었지만 놀라 혼비백산한 이 ‘시민 여자 노동자’에게 ‘자리를 지켜’하며 호통을 쳤을 뿐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자이납이 다른 여느 노동자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몸을 낮춘 채 허둥지둥 그들의 앞을 지났다. 그런 자이납에게 잠시 정신이 팔렸던 근위대 가디언들은 그를 뒤따라온 3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칼을 치켜들고 덤벼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전투태세를 잡았다.

“대장한테 연락해!”

손짓을 받은 한 명이 지휘관에게 연락하려는 듯 할룩스를 급히 작동시키려 했다.

“우욱!”

할룩스를 막 켜려던 그 가디언은 오늘 운이 없었다. 방금 그들의 앞을 벌벌 떨며 지나갔던 기름때 묻은 ‘여자 노동자’의 손에 들린 단검이 어느새 그의 등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년은 뭐야!”

얼떨결에 남은 2명 역시 뒤에서 협공해오는 자이납 때문에 제대로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지휘관인 아리엘에게 상황을 알리지도 못한 채 계단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따라와, 시간이 없다.”

자이납이 재빨리 단검을 챙기며 제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힘든 고비는 다 끝났나.”

막 제어실을 장악한 헨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뒤따라온 가디언들을 격려하듯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10분만 지켜. 동성에서 출발한 북부보병들이 이미 중앙성을 거의 장악했다고 하니까 10분이면 충분히 여기로 올 거야.”

제어실 엔지니어들에게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며 막 고함을 지르던 헨지는 할룩스로 들어온 자이납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적 가디언 20여명이 남쪽 계단을 통해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젠장.”

헨지는 뒤따라온 가디언들을 재빨리 돌아보았다. 이끌고 온 가디언들 중 10명은 이곳까지 오는 요소요소에 배치해 두었고 지금 그의 곁에는 10명뿐이었다. 하지만 이암성에 있던 가디언들 중 특별히 추려서 뽑은 상등급 페로 가디언들이었다.

“됐어, 적이 숫자가 많지만 우린 본대가 올 때까지 출입문만 굳게 지키고 있으면 돼. 내가 앞에 서지.”

헨지가 직접 칼을 뽑아들며 남쪽 계단에서 이어진 문을 열었다. 그도 비록 접전 능력은 떨어지지만 명색이 특등급 가디언인 만큼, 아리엘 같은 고수가 오지 않는 이상, 웬만한 근위대 가디언들은 한 칼에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없이 밑을 내려다본 그는 온몸이 바싹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도망치는 이곳 노동자의 머리를 한 주먹에 으깨버리며 달려 올라오는 괴물은 지난번 천하의 네피까지도 쓰러뜨렸던 그 ‘도살꾼’ 아리엘이었다. 그리고 14명 정도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그를 따라 이곳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급히 문을 잠근 그는 손에 쥐었던 짧은 칼을 내던지고 평소 쓰는 두 자루의 장검을 양손에 뽑아들었다.

“출입문을 막아!”

“이까짓 거!”

선두에서 달려온 거구의 아리엘이 잠긴 문을 단번에 때려 부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을 막아서고 있던 헨지는 그의 위력적인 돌격에 힘에서 밀리며 그대로 튕겨나 바닥을 뒹굴었다.

“에이! 씨발!”

그리고 이 도살꾼을 선두로 이쪽보다 훨씬 많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제어실 안으로 우루루 난입했다. 제어실을 먼저 점거하고 있던 페로 가디언들이 질세라 그들의 앞에 뛰어들면서, 이 크지 않은 방 안에서는 가디언들끼리의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 자에게는 덤비지 마라! 내가 맡는다!”

다시 일어난 헨지가 아리엘이 내리찍는 위력적인 프레일 앞으로 제일 먼저 뛰어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상대가 프레일을 추스르는 짧은 시간을 노려 재빨리 왼쪽의 근접거리로 파고들었지만 이 상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어딜 덤벼!”

아리엘의 왼손에 낀 육중한 건틀렛이 접근해오는 헨지의 팔을 무섭게 내리찍었다. 칼날이 돋은 건틀렛에 스치면서 헨지의 팔에서 핏방울과 살점이 솟구쳤다.

“으앗!”

왼쪽 팔꿈치를 얻어맞은 헨지가 칼을 떨어뜨리며 잠시 휘청거렸다. 찢겨나간 살점 사이로 뼈까지 으스러진 팔꿈치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아리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헨지의 얼굴을 향해 프레일의 육중한 쇠공을 다시 내리찍었다.

“아악!”

얼굴 오른쪽이 완전히 짓이겨진 헨지가 뒤로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부서진 한쪽 눈과 머리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그의 왼쪽 눈마저 천천히 덮었다. 온통 붉어진 그의 눈에 희미하게 들어온 건 반대편, 방금 아리엘이 뛰어든 문으로 허둥지둥 달려들어오는 자이납의 모습이었다. 그는 조금씩 무너져가며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가.......가라고.......”

“이, 이런.......”

아리엘의 어깨 너머, 쓰러지는 헨지의 모습을 본 자이납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지난번 네피를 데리고 이 괴물의 눈앞에서 치욕스럽게 도망쳤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뒤에서 나타난 적을 감지한 아리엘이 이번엔 자이납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이년 잘 걸렸다’하며 외치는 아리엘의 굵은 목소리가 그의 귓속에 메아리처럼 윙윙거렸다.

“도망가, 도망가 자이납........”

자이납은 본능적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때, 제어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고압의 전기 배선들, 그리고 물을 건너오느라 온몸이 흠뻑 젖어 있는 근위대 가디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라니까!”

힘을 잃고 쓰러지던 헨지가 피묻은 손을 필사적으로 뻗어 아리엘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헨지에게 붙들려 잠시 휘청거리던 아리엘의 철퇴가 자이납의 눈앞을 붕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났다.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던 자이납은 바로 옆, 수문 통제시설과 연결된 굵은 전기 케이블을 덥석 붙들었다.

“이거나 처먹어라!”

케이블의 연결 플러그를 힘으로 무작정 뜯어낸 자이납은 피복 밖으로 튀어나온 금속 단자를 아리엘을 향해 무작정 휘둘렀다.

“뭐야! 이년이 미쳤나!”

깜짝 놀란 아리엘이 반사적으로 건틀렛을 휘둘려 그 위험천만한 케이블을 쳐냈다.

“악!”

순간 짜릿한 통증을 느낀 아리엘이 온몸을 움츠리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무기와 갑주, 신발에는 절연기능이 있었지만 표면의 물을 타고 흐르는 그 짧고 강한 전류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아리엘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그리고 자이납은 이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직 죽일 놈이 남았댔지!”

케이블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선 자이납은 마비된 몸으로 휘청거리는 아리엘의 목을 향해 칼을 힘껏 내질렀다. 무력해진 몸으로 비틀거리던 아리엘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칼날을 보면서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우웁!”

베흔, 네피와 거의 동급의 최강 가디언으로 손꼽히던 살인귀의 굵고 강인한 목을 자이납의 시미터 끝이 그대로 꿰뚫고 반대편으로 쑥 빠져나왔다.

“하, 학.......”

이 절반 가디언에게 어처구니없이 당한 아리엘은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로 자이납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대신 넌 끝이야.”

손목에 힘을 준 자이납은 칼을 힘껏 돌려 이 무시무시한 가디언의 목을 끊어냈다. 한 무더기의 피와 찢겨나간 살점이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헨지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수에보에 이어 또 한 명의 근위대 특등급 가디언이 이곳 이암성의 혈전에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도망치는 남부 보병들을 쫓아 중앙성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베레트라는 이암호 물 위를 휙 돌아보았다. 남부 지원병을 싣고오던 보트 수십 대가 발리스타에 수장되면서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남부 병사들이 물 위에서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저기 아군들이 건너옵니다!”

병사들이 이암성 본성과 중앙성을 잇는 구름다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서부 사역병들이 지난번 끊어진 구름다리에 재빨리 임시 케이블을 걸고 있었다.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그 케이블을 타고 그간 이암성 본성에서 칼을 갈던 동맹군의 북부보병들이 차례차례 중앙성에 발을 들여놓았다.

“빨리! 빨리!”

중앙성 북쪽 성벽을 점거한 가디언들이 복구된 구름다리를 넘어오는 아군 보병들에게 격려의 함성을 질렀다. 이제 달아날 길조차 막힌 중앙성의 남부 보병들에게는 투항 아니면 죽음 둘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죽은 남부 보병의 시체 수백구가 널린 댐 위는 인조석의 회색빛이 아닌,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옥상! 옥상의 탑으로 올라가.”

베레트라는 무언가에 홀린 듯, 아직 불편한 걸음으로 계단을 비틀거리며 걸어 올랐다. 중앙성 첨탑 꼭대기에 오른 그는 그곳에 아직까지도 걸려 있던 대대장의 썩어가는 시체 토막을 급히 끌어올려 벗은 망토 위에 내려놓았다. 시체 앞에 털썩 꿇어앉은 베레트라는 짧게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그에게도, 11중대의 병사들에게도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지난 전투에서 통제소를 끝까지 사수하다가 아리엘에게 참살당한 지휘관의 시체는 지금까지 서성을 끈질기게 지켜 온 북부 보병들에게 도리어 강인한 의지를 심어 준 존재였다.

“이런, 한발 늦었네요.”

통제소에서 급히 달려 올라온 자이납은 아리엘의 잘린 머리를 대대장의 바싹 마른 시체 옆에 내려놓았다. 중상을 입고 구출된 헨지가 다른 가디언들의 등에 업힌 채 구름다리를 건너 이암성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건 제가 해도 되죠?”

자이납이 손을 툭툭 털고는 첨탑의 깃대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그 꼭대기에 달려 있던 근위대의 금빛 깃발을 북 찢어내 밑에 내던졌다. 하늘거리며 날아간 그 깃발은 중앙성 성벽 위에서 기다리던 북부 보병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너무 세게 밟지는 마! 황궁에 가져갈 기념품이니까!”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친 자이납은 품에 가져간 검은빛 황룡 깃발을 꺼내 빈 깃대에 묶었다. 그가 바람을 따라 힘껏 날린 거대한 검은빛 깃발이 밤바람에 펄럭이면서 중앙성을 다시 탈환한 동맹군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이암호를 뒤흔들었다.

함성에 휩싸인 이암댐을 배경으로, 평소처럼 낮고 침착한 남자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피아 모두에게 울려퍼졌다.

“이암댐 수비 대대장 타슈카 라코타 교위가 통제실에 알린다. 수문을 열어라. 수문을 최대한 열고 물을 내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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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번 파트 마지막 전투가 이제야 끝났군요. 이제 한동안은 저도 홀가분.....(이게 아닌데)

어쨌든;; 원고마감으로 힘듭니다. 이럴 때 작가에게 힘을.......(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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