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40화 (439/1,132)

< -- 440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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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 루다베 부인과 함께 1번 도시 시내에 나선 투르케스크는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껏 부인에게 그리도 무뚝뚝하게 굴던 그가 웬일로 근사한 옷과 구두를 사 주더니, 이번엔 느닷없이 심야에 있는 음악 공연을 함께 보자며 공연장 사람들을 느닷없는 귀빈맞이에 허둥거리게 했다.

“친구들 만나신다면서요?”

아버지가 내민 귀빈석 표를 받아든 오르마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남편의 달라진 모습에 모처럼 해사한 미소를 품은 루다베 부인 역시 둥그레진 눈으로 이 키 큰 남편을 올려보았다.

“이 시간에 친구는 무슨 친구냐.”

오르마즈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무언가 미심쩍다는 느낌을 받은 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궁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오르마즈를 구해 준 건 할룩스 한 통이었다.

“여보세요.”

오르마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순간 얼굴이 굳어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았네. 내 곧 가 보지.”

“뭐냐?”

순간 바싹 긴장한 표정의 투르케스크 공이 얼른 물었다.

“누가 부르니 황궁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대신 경호원을 한 명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하지만.......”

투르케스크가 그를 급히 말리려 했지만 표를 경호원의 손에 잽싸게 넘겨준 오르마즈는 마치 도망치듯 황궁을 향해 모습을 감추었다.

오르마즈에게 제발 와달라며 급박한 연락을 한 사람은 황제의 곁을 지키던 시종장이었다. 133층 대전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는 상기된 얼굴로 이곳에 올라온 오르마즈의 모습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각하.”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오르마즈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쉰 시종장이 누가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대전에서 혼자 술을 드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대전 근위가디언들까지 다 쫓아내시고.......”

“왜?”

오르마즈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굳게 닫힌 대전 문을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술을 드시면서도 계속 울고 계십니다. 종종 각하 이름을 부르기도 하시고.......술도 잘 못 드시는 분께서 저러시니 당혹스럽습니다.”

“후우.”

오르마즈는 잠시 눈을 감고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내 들어가 볼 것이니 대전엔 아무도 들이지 말게나.”

대전에 막 들어선 오르마즈를 반겨준 건 옥좌 쪽에서 날아든 빈 술잔이었다. 하지만 표적을 한참 벗어난 수정잔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흩어졌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네놈을 당장 잡아다가......”

다시 잔을 집어던지려던 황제는 문 앞에 서 있는 오르마즈의 모습에 잠시 자리에서 멈추고는 비틀거렸다. 문을 단단히 닫은 오르마즈는 옥좌가 있는 당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취하셨습니다. 폐하.”

혼자 벌써 몇 잔째 독한 리커를 들이키던 세나우스 2세는 어둠 속 서 있는 그의 흰 형상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술도 약하신 분께서 그렇게 계속 드시다니요.”

작은 체구의 황제는 그에게는 버거워 보일 만큼 큰 옥좌에 기대앉아 의미없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당하에서 절을 올리려는 오르마즈에게 움직이지 말라며 느닷없이 손짓을 보냈다.

“지금 자네에게 절을 받고 싶지는 않아.”

“......”

당상에서 번지는 희미한 백열광에 오르마즈의 무지개빛 눈동자가 유난히 화려한 빛깔로 반짝거렸다.

“하나둘씩 둥지를 떠나는군. 그리고........자네도 동생 결혼식만 끝나면 남편하고 자식들과 함께 북부로 돌아가겠지.”

황제가 또 한 잔을 벌컥 비우며 마치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외로우십니까?”

오르마즈의 물음에 황제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외롭냐고? 아냐. 내가 왜 외롭겠나. 난 외롭지 않아. 내겐 2백 명이 넘는 남편이 있고, 6명이나 되는 든든한 자식들, 그보다 훨씬 많은 손자 손녀들도 있어. 내 이름 하나에 벌벌 떠는 신하들도.......난 외롭지 않아. 절대로.”

또다시 히죽거리던 황제는 술 한 잔을 다시 들이켰다. 당하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오르마즈는 느닷없이 옥좌가 있는 당상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어딜 올라오는가.”

황제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흰 원피스자락을 끌며 계단을 계속 밟아 올라갔다.

“내려가라니까!”

황제가 악을 쓰듯 고함을 내지르며 그의 얼굴을 향해 잔을 힘껏 집어던졌다. 오르마즈의 어깨에 부딪친 수정잔은 가는 무지개빛 조각이 되어 그의 발밑에 쏟아졌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오르마즈는 문득 어깨를 짚었다. 찢겨진 원피스와 머플러자락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한 발짝만 더 옮기면 암살 미수범으로 당장 잡아다가 죽여 버릴 테다.”

옥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던 황제는 중심을 잃으며 다시 바닥에 구르듯 쓰러지고 말았다. 황제의 엄포를 듣는 둥 마는 둥, 오르마즈는 다시 당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너를.......너를.......”

오르마즈를 가리키며 이를 빠드득 갈던 황제는 그의 작은 몸을 번쩍 안아드는 손길에 순간 바싹 굳어버렸다. 두 팔로 황제를 안아 든 오르마즈는 취해 고개조차 가누지 못하는 이 불쌍한 군주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르마즈는 어느 순간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 이렇게 안아드리면 내가 어린아이냐고 신경질을 부리곤 하셨죠.......”

황제 역시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며 그 드문 미소를 잠시나마 비쳤다.

“난 이렇게 해 줄 수 없어 질투가 났던 건지도 몰라.”

황제가 그 작은 손을 내밀어 오르마즈의 목을 꼭 껴안았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오르마즈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다고 정말로 내려놓을 때는 한 대 때려주고 싶었어.”

“제가 당하로 다시 내려갔으면 쫓아와 때려주려 하셨습니까?”

“그럴 지도 모르지.”

황제는 오르마즈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혼자 울먹였다.

“넌.......어린 나한테는 너무 큰 존재였잖아.......나같이 작고 못난 사람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것 같았어.”

황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마즈에게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오르마즈는 역한 술냄새가 풍겨오는 그의 부르튼 입술 사이로 살짝 혀를 밀어넣었다.

“아.......”

난생 처음, 그리도 소원하던 그의 입술을 맞이한 황제는 순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목을 꽉 껴안은 채 가늘게 몰아쉬는 황제의 숨소리가 은밀한 대전에 낮게 깔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황제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의 매끈한 턱과 코, 그리고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촉촉한 입술을 차례로 더듬었다.

“즉위식 이후로 처음이시군요.”

황제를 다시 세워 준 오르마즈는 그의 눈시울에 가득 고인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내 주었다.

“제발, 가지 마.”

한 발 물러나려는 오르마즈의 허리를 황제가 얼른 부둥켜안았다.

“오늘 밤만은 제발 나와 함께 있어주게.”

이 자존심강한 황제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놀란 오르마즈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애원만은 결코 하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었다.

“외로우십니까?”

오르마즈가 다시 물었다. 황제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흐느끼고 있는 황제, 아니 유평 나이킨 리쿠를 품에 다정하게 보듬어주었다.

“황제가 된 지 이제 99년이나 되었어.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황제가 오르마즈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오르마즈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내년이면 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르셔야죠.”

“가끔 수명개조라는 게 도대체 왜 있을까 싶어.......내 모든 허물을 죽음 속에 파묻어버릴 수 있다는 게 이런 피 묻은 손으로 영원히 사느니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피는 앞으로 씻으실 수 있습니다. 이제 힘든 때는 다 지나지 않았습니까.”

“태평성대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닐 거야. 내 이미 즉위식 때 말했지 않나.”

한 발 물러선 황제는 어리둥절해진 오르마즈의 얼굴을 올려보며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눈가의 눈물자국을 훔쳐내고는 한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살며시 얹었다.

“내일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야. 자네도 꼭 함께 있어주게나.”

“발표요?”

“내일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난 상황(上皇)으로 물러날 걸세. 피로 찌든 내 시대는 이제 끝날 때가 되었어. 태평성대는 그 시대에 맞는 황제가 다스려야지. 바로 자네의 피를 이은 아이가 말이야.”

황제는 오르마즈의 가슴에서 손에서 전해지는 느낌으로 그의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요동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창백해진 그의 표정까지도.

하지만 오르마즈는 황제의 결정을 대놓고 기뻐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나머지 한 손을 다정하게 쥐어주었을 뿐이었다.

“로노 녀석이 반발하겠지만.......내가 두 눈 뜨고 살아있으니 감히 뭐라 하지는 못하겠지. 새 황제가 된 주페가 국정을 장악하거든 난 모든 것에서 깨끗하게 손을 뗄 거야. 깨끗하게.”

황제의 조금은 아쉬운 눈웃음 뒤에는 앞날에 대한 나름대로의 밝은 희망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남극성당 박사과정에 복학할까봐. 그때만 해도 공부도 곧잘 했었는데 이젠 다 까먹어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큰일이야.......그래도 나중엔 대제학에라도 오를지 혹시 아나.”

“200명이나 되는 그 많은 남편들은 다 어쩌시고요?”

오르마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농담처럼 물었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네들? 훗, 내가 가라고 하면 좋다고 짐 싸서 죄다 본가로 도망갈걸. 착해빠진 이르센이나 펜톤은 어쩌면 남을지도 모르지만. 옛날 어머니하고 살던 그 술집 뜯어고쳐서 작은 별궁 하나 만들 생각이야. 눈치 없이 기숙사에 살았다간 생도들이 나보다 더 스트레스 받을 것 같고. 아참, 이름은 뭐라고 하지? 어머니 이름 따서 유레트 별궁이라고 할까? 아니면.......자네가 거기서 하던 술집 이름이 뭐였더라? 자네도 자주 와 줘야 할 것 아냐.”

황제는 당장이라도 남극성당 생도로 돌아갈 듯 혼자 이런저런 계획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오르마즈는 간만에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황제는 다시 오르마즈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대에게도 또 어려운 부탁을 해야겠어.”

황제가 오르마즈의 허리를 다시 껴안았다. 오르마즈는 황제의 말을 짐작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투모카프의 죽음 이후, ‘시킬 놈이 없다’는 황제의 엉뚱한 고집으로 총리직은 여전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즉위했을 때 날 도와주었듯이, 이번에도 새 총리가 되어서 주페, 아니, 나와 자네의 아들을 도와주게. 그 애는........나처럼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 창녀 소생에 비열함으로 똘똘 뭉친 나와는 근본부터 다른 아이가 아닌가.”

오르마즈는 ‘황제’로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그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 주었다. 그의 굳은 표정과, 단호한 말투 속에는 그간 아들을 위해 피로 길을 뚫어 온 그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어려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술기운에 여전히 비틀거리며 오르마즈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밤은 나와 150층에 있어주게, 제발.”

오르마즈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150층은 이 문란하던 황제도 즉위 이래 지금껏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은 금단의 구역이었다.

“자넬 위해 만든 곳이었어. 원래 주인이 한 번도 못 와본 채로 여길 떠날 수는 없지 않나? 안 그래?”

황제는 오르마즈의 허리를 끊어져라 꽉 껴안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오르마즈는 여전히 술기운에 비틀거리는 그를 다시 안아들고 150층으로 직결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낮은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황제는 그 잠깐의 시간조차 기다리기 싫다는 듯 그의 턱과 목에 거칠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금빛 머플러를 벗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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