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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41화 (440/1,132)

< -- 441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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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선 제롬은 드넓은 욱리하와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황성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전 이래, 그의 연합군이 해 놓은 건 이곳 욱리하 건너편에 ‘도착한 것’이 전부였다. 황궁을 지키는 6개의 성 중 그의 연합군이 차지한 것은 아직 단 한 개도 없었다.

“솔직히 별로 해 놓은 것이 없군요.”

제롬이 샤자한 공에게 힘없이 말했다.

“3군 본대까지 다 합치면 보병 12만에 동부기병 3만, 남부기병이 4만5천입니다. 공성전만 몇 번 치렀지 변변한 야전이 없었다보니 기병은 아직까지 그럭저럭 건재하군요. 그런데 보병은......”

제롬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나토 가가 보병 2만하고 기병 7천을 데리고 도망갔고, 이암성하고 주류성에 각각 남겨둔 병력이 2만씩이니.......뭐 전력 자체의 손실은 크지 않고, 적들 역시 비슷한 수가 성에 묶여있으니 크게 상심할 필요까지는 없지요.”

샤자한 공은 지금 제롬을 위로해 줘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퍽이나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카렐을 배신하고 이쪽을 택했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쪽에서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면에서는 도리어 제롬보다도 운신의 폭이 더 좁은 처지였다.

샤자한 공이 숙영지를 빙 돌아보았다. 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머무는 만큼, 숙영지라기보다는 거대한 임시 도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2달이나 되는 우기 동안 여기서 꼼짝도 않는다면 보급이 큰 문제군요. 전투병만 20만에 노예나 사역병까지 합치면 30만이 넘는데.......게다가 기병비가 높아서 보급의 압박이 클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롬은 욱리하 강물을 야속한 표정으로 계속 쳐다보았다. 상류의 이암성, 신성, 하류의 건무성만 아니라면 수로를 통한 보급도 가능하련만 이젠 그것조차도 어려웠다.

“이용 가능한 보급선은 딱 2개로군요. 우리 1군이 올라온 길을 따라 남쪽에서 올라오는 길하고 3군이 남하한 길을 따라 북쪽 상류에서 내려오는 길 뿐입니다.”

“그 둘 다 그리 미덥지를 못하니 탈이지요. 적들이 욱리하의 선단을 억류하고 수로를 장악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강변의 길은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걸 아셔야죠. 5천의 대군이 호위하고 오던 수송단까지 적에게 습격당하고 대장군이 전사했는데 다른 수송단이라고 안전할 것 같습니까.”

샤자한 공이 대뜸 입을 씰룩거렸다.

“최고제후님.”

조금씩 무거워져가던 둘 사이에 화급하게 끼어든 건 남부의 근위기병대장 릴라크였다.

“저어, 잠깐........”

무언가 급한 일임을 직감한 제롬이 급히 양해를 구하고 사령관 개인 막사로 물러났다. 릴라크가 중요하지도 않는 주제로 최고제후들간의 대화에 끼어들 만큼 생각없는 사람이 아님을 그도 잘 알고있었다.

“뭐냐?”

쌀쌀맞게 묻는 제롬에게 릴라크가 할룩스를 대신 내밀었다.

“모르겠습니다. 최고제후님과 반드시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오시안트의 시의(侍醫)입니다.”

순간, 무언가 도둑질이라도 들킨 듯 화들짝 놀란 제롬이 재빨리 할룩스를 빼앗아들며 릴라크에게 나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플랩을 걷고 일단 물러나온 릴라크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막사를 다시 돌아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지난번 그가 목격했던 제롬의 ‘씨도둑질’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라질, 저 인간 갈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군.”

안 보이는 곳에서 침을 퉤 뱉은 그는 일단 자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사오시안트에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자신과는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모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밖에 나온 구르베스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활기찬 시내 풍경을 빙 돌아보았다. 황제령의 수에니 경제특구는 비록 그다지 넓지 않은 반사막이었지만 제국 최대의 해안 휴양지이고 금융의 중심지인 만큼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그만큼 문화행사도 많이 열리는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도 타르서스와 인접한 덕에 이곳은 황제령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서부 특유의 분위기가 길거리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서부인인 구르베스에게는 그런대로 낯설지는 않은 거리 풍경이었다.

수우는 당초 구르베스가 ‘별도의 경호원 없이’ 직접 차를 몰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하라며 쿠베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그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를 따라온 2명의 가디언 중 한 명은 차를 운전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감시하고 있었다.

“여깁니다.”

가디언이 차를 세운 곳은 이곳 수에니의 고급스런 분위기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오래되고 허름한 극장이었다. 그래도 제법 인기는 있는지, 저녁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극장 앞은 꽤 어수선했다. 수우가 연극학교를 졸업한 직후, 몇 명의 동기들과 손잡고 그의 땀으로 직접 세웠다는 극장이었다.

막 공연장에 들어서려던 구르베스는 주머니에서 갑자기 울리는 할룩스의 낯선 감촉에 움찔거렸다. 동부를 떠나온 이래로 웬만한 연락은 모두 측근들을 통해서 해 왔기에 이 개인 할룩스는 꽤 오랫동안 거의 써 본 일이 없었다. 무심코 할룩스를 들어 본 그는 그곳에 나타난 수우의 얼굴을 보며 무심코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멀리서 통신으로 뵈오니 철없이 연애질하는 젊은이가 된 기분입니다. 이런 느낌도 정말 새롭군요.”

“그런가요.”

수우가 오늘 아침처럼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 전해 달라 부탁한 짐 말이요. 공연 전에 그 친구에게 좀 전해주시겠소?”

구르베스는 딴에는 맘먹고 한 다정한 말에 수우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내심 실망했다. 하지만 이 통화 역시 근위대 보안국 요원들에게 모두 감청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수우가 민망함에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그러죠.......어디로 가면 되죠?”

“공연장 지하의 북쪽 복도를 타고 길이 끝날 때까지 쭉 들어가요. 복도 끝에 보면 오른쪽에 분장실이 있고, 그 왼쪽에 있는 방에 짐 받을 사람이 있을 거요.”

수우와의 통화를 끝낸 구르베스는 이 찰거머리같은 가디언을 거느린 채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북쪽 복도를 따라 죽 들어갔다. 공연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텝들로 지하층 복도는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수우가 말한 대로, 오른쪽에 위치한 분장실이 보였다.

“응?”

복도 끝과 마주한 구르베스가 잠시 당황했다. 수우의 말대로, 복도 오른쪽에 분장실이 있었지만 왼쪽에는 아무 것도, 아니 방이 있었던 흔적조차 없는 꽉 막힌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폐하.......”

순간 다리가 풀린 구르베스는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분장실 맞은편, 왼쪽 벽에는 분장을 마치고 나오는 배우들을 위한 큰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는 지금 구르베스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구르베스와의 통화를 마친 수우는 거추장스러운 조우관을 옆에 벗어놓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황비도 없으니 속편하게 유흥가에나 좀 다녀오자고.”

수우가 옆에 선 시종장에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시종장의 표정에 ‘그래, 네가 그렇지’ 하는 묘한 비웃음이 번지고 있었지만 수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렘에 있는 까다로운 귀족년들은 질색이야. 돈만 던져주면 발바닥이라도 핥는 싸구려 창녀들이 내 입맛엔 제격이지.”

수우가 키득거리며 황제 처소를 나섰다. 그리고 평소처럼 근위대 가디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줄줄이 따라와서 황제 폐하 납신다고 광고할거야? 시종장하고 둘이서만 다녀올 테니까 너희들은 제발 좀 떨어져.”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던 수우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시오면 딱 2명만 따라가겠습니다.”

“빌어먹을.”

수우가 눈가를 찡그리며 시종장의 손에서 가방을 확 빼앗아들었다. 그는 별궁 주차장이 있는 뒤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복도 모퉁이에서 웬 사내들이 불쑥 나타난 건 그때였다.

“어딜 가시옵니까, 폐하.”

너무도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수우가 자리에서 움찔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이 거구의 남자를 천천히 올려보았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인 일이 없던 격렬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자, 자정에 온다더니.......일찍 돌아왔군, 근위대장.”

수우가 그간 다듬어 온 연기실력을 최대한 발휘해 입가 가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노련하고 차가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 어디로 행차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베흔의 굵고 밋밋한 목소리에는 마주선 사람을 그대로 주저앉힐 정도의 무서운 위압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수우도 그에게 바로 굴복하지 않았다.

“모처럼 놀러나가는 길이야. 황제인 짐이 근위대장에게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황비 전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황비가 연극 공연을 보러 간 건 여기 사람들이 다 알아.”

수우의 대꾸에 격분한 베흔의 턱에 순간 힘줄이 곤두섰다. 지금껏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던 이 ‘황제’는 지금 감히 그에게 저항하려 들고 있었다.

“폐하를 안으로 모셔라.”

베흔이 옆에 선 쿠베에게 눈짓을 보냈다.

“누구 마음대로!”

수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모르는가!”

“빨리 모시라니까. 그리고 황비 전하를 호위하고 있는 놈들에게도 당장 모시고 들어오라고 알려라. 당장.”

무어라 더 소리치려던 수우의 입을 쿠베의 큰 손이 덥석 가로막았다. 불행히도, 이 좁은 복도의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보고 있는 사람은 시종장과 몇 명의 가디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탁받은 짐을 전해줘야겠다’며 분장실 안에 들어간 구르베스를 기다리던 가디언은 계속 시계만 보고 있었다. 연극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구르베스는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동안 몇 명의 배우들과 스텝들이 오갔고, 대부분의 배우들이 대기실로 들어가면서 잠시 전까지도 미어터질 듯 북적거리던 분장실과 복도도 조금은 썰렁해져 있었다.

“어떻게 되신 거지?”

기다리다 못한 가디언이 분장실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크지 않은 분장실 안에는 연극 의상과 소품들이 산더미같이 널브러져 있었고, 몇 명의 스텝과 연기자들이 아직까지 자기 할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구르베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거.......”

분장실에 문이 으레 2개가 있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대기실과 통하는 2번째 문 앞은 차를 몰고 온 동료 가디언이 지키고 있었다. 당황한 그는 뭐 하냐며 묻는 스텝들을 거칠게 밀어젖히고 대기실쪽 문을 확 열어젖혔다.

“무슨 일입니까?”

반대편 문 앞에는 차를 몰고 온 가디언이 처음처럼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전하께선?”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제기랄!”

가디언이 멍해진 머릿속을 다시 뒤져보았다. 그 길지않은 시간, 분장실을 나간 10명이 넘는 사람들 중 구르베스, 아니 그의 체취와 느낌을 풍기는 사람조차 없었다. 최소한 가디언으로서 그의 감각으로는 그런 사람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의상들 사이에 파묻힌 눈에 익은 가방이 들어왔다.

“도, 도망갔다.......”

무언가가 가득 들었던 구르베스의 가방은 지금 텅 빈 채 이곳에 버려져 있었다. 바로 그 때, 가디언의 품에 있던 할룩스가 ‘긴급’을 알리며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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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회 자축입니다~~ 으음;; 별 의미 없나?? 어쨌든 기념으로 흔적을 남겨주세요 ^^ 코멘트란는 아래에, 추천키는 오른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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