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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42화 (441/1,132)

< -- 442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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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황제 처소에 수우를 끌고 들어온 베흔은 이 ‘황제’를 바닥에 거칠게 동댕이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우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아내며 이 무엄한 근위대장과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베흔의 오른팔인 쿠베와 시종장, 그리고 또 한 명이 그의 등 뒤에 얼굴을 감추고 서 있었다.

‘이제 끝이구나.......’

그의 얼굴을 본 수우는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에 지나칠 만큼 힘을 주어 최대한 황제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왜 여기 나타났느냐.”

수우의 물음에 그 시의가 당황했는지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 자는 평소 주치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젊은 의사였다.

수우의 멍해진 머릿속에 구르베스와의 짧았던 사랑과 그의 따뜻한 손길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쯤 구르베스는 무사할까 하는 생각이 자신의 코앞에 닥쳐온 이 끔찍한 위험보다도 더 절박하게 느껴져왔다.

“네놈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수우가 이를 갈며 시의를 노려보았다.

저 배신자가 베흔에게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정보를 흘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치의에게 이 일을 하급자에게도 절대 알리지 말라 신신당부했건만 비밀이 결국은 흘러나간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익숙한 누군가의 영상이 베흔의 옆에 지직거리며 나타났다.

“빌어먹을 새끼, 가만히 있으면 황제 행세나 하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을. 제 주제를 알아야지........”

화만 나면 얼굴이 유난히 붉게 달아오르는 형 제롬의 특징은 수우도 잘 알고 있었다. 악담을 퍼부으려는 그를 베흔이 일단 가로막았다. 베흔이 눈을 부릅뜨며 수우에게 물었다.

“황비 전하를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알 게 뭐야, 연극 보러 갔다니까.”

수우가 턱을 내밀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베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 마누라를 독살한 페로 놈 심정을 이제 좀 이해하겠군요.”

베흔의 말에 숨은 뜻을 눈치챈 수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베흔과 형 제롬, 그리고 배신자 시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베흔이 킬킬거리며 시의의 어깨를 한 팔로 돌려안았다.

“이 친구를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황실의 피를 더 우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이 잇기를 바라는 충정 때문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니까요.”

“저놈이 뭐라고 말했길래?”

수우의 물음을 받은 베흔은 잠시 제롬을 돌아보았다.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질질 끌 시간이 아니잖아!”

제롬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수우에게 다가왔다.

“말해, 구르베스 그년은 도대체 어디로 갔냐?”

“극장을 뒤져보면 알 것 아니요, 형님.”

“이 새끼가!”

격분한 제롬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수우가 코웃음을 치며 제롬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진짜로 내 앞에 있었다면 열 대는 넘게 팼겠소? 그런데, 지금 형이 동생을 두들겨 팰 입장이요? 아니면 제수를 범한 후안무치한 형을 그 동생이 저주할 상황이요?”

수우가 제롬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롬이 이를 빠드득 갈며 베흔을 휙 돌아보았다.

“이 새끼 당장 죽여. 더 이상 필요 없어. 어차피 후계자도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순간 조금 놀란 쿠베와 시종장이 얼른 베흔의 눈치를 보았다. 수우는 죽음을 각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만 자신을 죽이라는 말이 근위대장이 아닌, 자신과 절반이나마 피를 공유한 형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갈가리 헤집을 뿐이었다. 그는 형의 얼굴을 노려보며 가슴을 드러냈다.

“맘대로 하시오.”

베흔이 제롬에게 침착하게 다가서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폐하께선 안 계시면 도망친 황비를 어떻게 찾습니까. 그리고 폐하를 우리가 계속 모시고 있으면 그 여자는 어차피 제 발로 돌아올 겁니다.”

“죽었다고 발표만 안 하면 되잖아! 지 여자 뱃속에 내 자식이 들은 걸 아는 놈이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아! 어차피 내가 섭정공을 하면 되잖아!”

제롬은 그동안 내심 품고 있던 야심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수우는 죽음의 공포와, 묘한 쾌감이 이렇게까지도 겹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저 시의는 구르베스 뱃속의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까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런 짓을 또 하면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제발,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제발 진정 좀 하세요.”

베흔이 일단 제롬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런 한심한 아들을 바라보는 베흔의 속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개차반이 되어 버린 거냐.’

베흔이 이마를 싸쥐었다. 자상한 어머니 네페티와 격리된 채 난폭한 테번의 밑에서 자라면서 제롬의 성격이 거칠어진 건 사실이었지만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최고제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뜻이 있는 젊고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지나면서 이제 제롬은 이제 베흔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수우를 언젠가 제거해야 한다는 데는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베흔은 자신의 아들이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각하, 잠시만......”

베흔은 계속 수우를 죽이라며 날뛰는 제롬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롬은 수우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베흔에게 바싹 다가섰다.

“지금 황제를 죽이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변수는 구르베스 황비입니다.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칫 적에게 투항할지도 모릅니다.”

“숨기면 되잖아! 무슨 걱정이야! 전쟁 끝날 때까지만 숨기면 되잖아!”

“날 죽이라니까! 이 새끼들아!”

수우가 이를 드러내며 악을 썼다. 제롬이 워낙 큰 소리를 지르는 통에 멀리 있는 수우 역시 이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두 알아챌 수 있었다. 베흔의 눈짓을 받은 쿠베가 그의 머리에 자루를 씌어 버렸다. 베흔이 제롬을 다시 진정시키며 짜증스레 말했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각하 뜻은 알겠습니다. 쿠베를 시켜 죽이도록 하지요. 하지만 황비가 행방불명 상태인 지금은 안 됩니다. 구르베스 황비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럼 저 놈은?”

“황비를 체포하는대로 황제를 바로 제거하겠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태아는 캡슐에 넣어 따로 키우는 것이 낫겠습니다. 태아를 세나우스 5세로 선포할 테니 성년이 될 때까지 각하께서 섭정공을 맡으십시오. 이제 됐습니까?”

“황비 그 년도 죽여야 돼. 그년이 살아있으면 내가 섭정을 할 수가 없잖아?”

제롬은 멍청이 동생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에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수우를 다시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각하께선 원정군 일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베흔은 그때까지도 수우의 목덜미를 붙들고 있던 쿠베에게 지시를 내렸다.

“처소에 가두도록 해. 지정된 가디언들 외에는 출입을 엄금하고 외부인들과는 일체의 접촉을 못하게 해라. 특히 자해를 못 하도록 각별히 신경 써. 내각에는 사고로 한동안 집무를 볼 수 없는 것으로 알릴 테니.”

“알겠습니다. 아참, 주치의 녀석은 어떡할까요? 일단 불러들이라고 이야기는 해 두었습니다만.......”

쿠베의 물음에 베흔은 옆에 선 밀고자 시의를 힐끔 돌아보았다.

“새로 자리 하나 만들어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베흔의 말뜻을 알아들은 쿠베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푸훗, 알겠습니다. 바로 제거하겠습니다.”

타르서스의 해안가 뒷골목, 지하 공동구에서 냄새나는 쓰레기 주머니를 끌고 기어 나온 이 더러운 타르서스인 남자 청소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급 휴양지인 수에니에서 가난한 타르서스 원주민은 ‘관광객’으로서보다 이런 ‘노동자’로 있는 모양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행인 하나가 그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비켜, 제기랄.”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온통 검댕이와 구정물을 뒤집어쓴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손에는 저 낡고 오래된 극장에서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 안전하게 탈출하는 법을 적어놓은 수우의 자필 쪽지가 아직까지도 꼭 쥐어져 있었다.

“폐하.......”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그의 얼굴, 아니 타르서스인 남자의 얼굴 마스크에는 흰 눈물자국이 턱밑까지 그려져 있었다. 기계실의 맨홀 뚜껑을 뜯어낼 수 있는 공구, 그리고 그곳에서 이어진 우수관로의 지도까지 모두 챙겨 준 것이 바로 수우였다.

“이게 정말 현실입니까.......”

그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지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하룻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그의 옆으로는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극장을 향해 달려가는 근위대 병력수송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쓰레기 주머니를 벌려보았다. 수우가 연극 연습을 한다며 모아 온 분장용품들과 가디언을 피하기 위한 강한 향수, 군용 위장포, 가짜 신분증과 5만 골드의 현금이 지금 그가 손에 쥔 쪽지와 함께 그 ‘짐’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수우의 것이 분명한 갈색빛 머리칼 약간이 작은 병에 담긴 채 함께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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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쿠트라스의 사교 대성당 앞에 광장을 겸한 공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 중간의 큰 전나무 밑에서 매일 저녁 6시부터 8시 사이에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궁으로는 돌아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버지 샤자한 공에게도 연락하지 마십시오. 내 열흘 이내에 그대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혹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들에게 잡혔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니, 그 때는 이 편지를 들고 동맹군에 투항하도록 하십시오.

행여 나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당신과 내 아들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이 위험한 선택을 제발 용서해 주시구려.

사랑합니다.

당신이 내 지난 삶이 헛되었음을 깨우쳐 주었듯이, 나는 당신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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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구르베스는 풀린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레기 주머니를 질질 끌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베흔과 제롬이 수우의 처리를 놓고 한참 말다툼을 하던 그 시각, 사오시안트 별궁을 막 나와 늦은 퇴근을 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보통 키에 유달리 통통한 그 남자는 한 손에 작은 가방을, 나머지 한 손에 할룩스를 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사오시안트 별궁과 2번 도시를 잇는 길고 좁은 다리를 느긋하게 건너던 참이었다.

“최대한 빨리 들어오라 하십니다. 폐하께서 갑자기 발작을......”

할룩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다리 건너 별궁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듯, 근위대 병사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의원 당직의사들이 일단 올라갔지만 아무래도 주치의께서 옆에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았다. 당장 들어가지.”

수우의 주치의로 있던 그 남자는 할룩스를 끄며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궁에 되돌아가는 대신, 가던 대로 다리를 계속 건넜다. 바닷가에 면한 사오시안트 별궁의 북쪽, 구름다리 건너에는 황제령에서 세 번째로 큰 2번 도시의 시끌벅적한 저녁 퇴근시간이 한창이었다. 다리 건너편을 지키던 근위대 경비장교가 그에게 평소처럼 웃으며 눈인사를 던졌다. 주치의 역시 그에게 모자를 벗어 보이며 씽긋 웃음을 지었다.

“잘 있게나. 오늘 밤도 수고하게.”

다리를 빠져나온 그는 행인들로 가득한 번화가에 발을 들여놓았다. 몇 발짝 더 걷지 않아 그의 할룩스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고 그대로 꺼 버리고는 길거리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몇 걸음을 더 옮긴 그는 길가에 서 있던 웬 차에 태연하게 올라탔다.

“아주 난리가 났더군.”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멀리 다리 건너 별궁 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지.”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태연하게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운전석의 남자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정말 오랜만일세, 쿠마르.”

지난번 카렐의 즉위식에 아스탈, 밀리타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던 이 쿠마르라는 남자는 주치의의 인사에 짧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바로 사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똘마니 의사 놈은?”

“비밀을 다 알고 있는데 베흔 저놈이 살려두겠나. 뭐, 살려두건 말건 우리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내 욕심 많고 멍청한 놈으로 골랐으니 베흔 그놈도 별로 쓸모는 못 느낄 거야.”

“그 녀석 지금쯤 네 목을 벨 칼도 같이 갈고 있겠지?”

샌드위치를 씹던 주치의는 입 안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쿠마르가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가방에 가져온 새 할룩스를 주치의에게 건네주었다.

“이젠 이거 써. 복귀 신고하는 거 잊지 말고.”

주치의는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우겨넣고는 새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별궁 매점 샌드위치 맛은 정말 최고인데, 이젠 이걸로 바이바이군.”

“허, 언제는 황궁 앞에서 파는 피타 샌드위치가 그립다며? 아참, 듣자하니 근위대 병신들이 수에니에서 여자를 놓친 모양이야.”

“쯧쯧, 결국 이것도 우리가 도와줘야 되는 거야?”

주치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쿠마르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그랬지?”

“쿠트라스로 간다는 것 같더군. 저녁 시간에 성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을 거야. 운도 지지리 없는 년 같으니, 어쩌다가 곧 죽을 황제 놈의 새끼는 가져가지고.......쯧쯧. 난 찝찝한 일은 안 할 테니까 근위대엔 네가 알려.”

“니가 언제부터 깨끗한 일만 했나.”

쿠마르가 비웃듯이 킬킬대며 할룩스로 메시지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치의는 그에게서 방금 받은 최신 자료를 뒤적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아케메니아 쪽은 잘 되어가나?”

“그쪽은 스메르디스님이 이미 시작하셨어.”

“허, 양쪽 황제 다 뒈지고 나면 이거 정말 흥미진진해지겠군.”

킬킬거리고 웃음짓던 주치의는 방금 받은 할룩스를 켜고 첫 발신을 보냈다.

“니딘투벨, 임무 무사히 완수하고 귀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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